이윤(李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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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62(세조 8)∼미상 = ?]. 조선 중기 성종(成宗)~중종(中宗) 때의 문신. 홍문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 등을 지냈다. 자는 자백(子伯)이고, 호는 쌍매당(雙梅堂)이다. 본관은 고성(固城)이며, 거주지는 서울과 영산(靈山 : 지금 경상남도 창녕)이다. 아버지는 사온서(司醞署) 영(令)을 지낸 이평(李)이고, 어머니 양천 허씨(陽川許氏)는 호군(護軍)허추(許樞)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영산현감(靈山縣監)을 지낸 이증(李增)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철성부원군(鐵城府元君)으로 좌의정(左議政)을 지낸 이원(李原)이다.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이주(李胄)와 홍문관 수찬(修撰)이려(李膂)의 형이기도 하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며, 김일손(金馹孫)과 교유하였다.

성종~연산군 시대 활동

성균관 유생 시절인 1483년(성종 14) 정여창(鄭汝昌)과 함께 조정에서 수강궁(壽康宮)을 보수하는 역사에 동원된 승려들에게 도첩(度牒)을 남발 하는 것을 반대하는 상소를 하였다.(『성종실록』 14년 9월 11일) 이듬해인 1484년(성종 15) 승려들이 중학(中學)에 들어와 유생(儒生)을 구타한 사건이 일어나자, 승려들을 엄벌에 처할 것을 상소하기도 하였다.(『성종실록』 15년 2월 12일)

1486년(성종 17)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5세였다. 1487년(성종 18) 춘추관(春秋館) 기사관(記事官)에 보임되었다가, 1489년(성종 20) 승정원(承政院) 주서(注書)가 되었다. 1491년(성종 22) 부친상을 당하였으며, 상례(喪禮)를 마친 후 1494(성종 25) 종학(宗學) 교수(敎授)가 되었다. 1496년(연산군 2)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동생 이주와 함께 김종직의 문인이라는 이유로 귀양 갔다가, 1500년(연산군 6) 풀려나서 고향인 안동으로 돌아갔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 때에는 귀양 가 있던 동생 이주가 대궐 안에 대간청(臺諫廳)을 설치할 것을 청한 일이 있었다는 이유로 결국 극형을 받았다. 이 일로 아버지는 부관참시 되었으며, 형제는 모두 연좌되어 거제도로 귀양 가는 등 일가가 참변을 겪었다.(『연산군일기』 10년 5월 22일)

중종 시대 활동

1506년(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홍문관 부응교(副應敎)에 임명되었으며, 홍문관 응교(應敎)을 거쳐서 홍문관 전한(典翰)으로 승진하였다. 다시 경연청(經筵廳)으로 옮겨서 시강관(侍講官)이 되었다가 참찬관(參贊官)에 임명되었다.

1507년(중종 2) 홍문관 부제학(副堤學)에 임명되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킨 원흉으로 지목된 유자광(柳子光)에 대한 대간의 탄핵이 시작 되었는데, 홍문관 부제학이었던 이윤도 그를 신랄하게 탄핵하였다.(『중종실록』 2년 4월 14일),(『중종실록』 2년 4월 15일),(『중종실록』 2년 4월 18일),(『중종실록』 2년 4월 21일) 결국 유자광은 평해(平海 : 지금 경상북도 울진)로 유배되었다.(『중종실록』 2년 4월 23일) 그 해에 어머니상을 당하였고,(『중종실록』 2년 6월 9일) 1509년(중종 4)에는 할머니 상을 당하였다. 1510년(중종 5) 이계맹(李繼孟) 등과 함께 성절사(聖節使) 일행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저서로는 『쌍매당선생일고(雙梅堂先生逸稿)』 1책이 있다.

성품과 일화

이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타고난 체격이 크고 훤칠하였으며, 재주가 있고 영리하였다. 노모의 봉양을 위해 청도훈도(淸道訓導)에 재임하면서 청렴하다는 이름을 얻었다.

1498년(연산군 4) 사헌부 지평으로 재임할 당시 동생 이주와 함께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김종직의 문인으로 몰려 귀양 가게 되었다. 그리고 1500년(연산군 6) 방면되면서 고향인 안동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그는 영산(靈山)을 지나면서 옛날 추억과 할아버지의 유풍이 남아있는 영산현(靈山縣) 장마면(丈麻面) 마고(麻姑 : 지금 창녕군 장마면 유리)에 머물게 되었다. 이곳을 은하반월(銀河半月)의 명승지로 여긴 이윤은 산기슭에 집을 지은 후, 절개를 상징하는 두 그루의 매화를 심어 자신의 호를 쌍매당(雙梅堂)이라 하고 강학(講學)의 장소로 삼았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동생 이주가 극형을 받으면서 그의 형제들로 연좌되어 모두 거제도로 귀양 갔다. 이윤은 사화를 겪은 이후 삶이 항상 우울하고 즐거움이 없었으므로 병을 핑계로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다. 중종반정 이후 등용되어 관직에 부임하기도 했으나 만년에는 쌍매당에 은거하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상남도 창녕읍(昌寧邑) 옥천리에 있고, 이주정(李周禎)이 지은 행장(行狀)이 남아있다.

부인 여흥 민씨(驪興閔氏)는 현감(縣監)민충달(閔忠達)의 딸인데, 자녀는 2남 3녀를 두었다. 장남은 현감(縣監)이복(李復)이고, 차남은 공조 좌랑(佐郞)이후(李後)이다. 장녀는 진사(進士) 우세열(禹世烈)의 처가 되었고, 차녀는 진사 박희삼(朴希參)의 처가 되었으며, 3녀는 김언필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쌍매당선생일고(雙梅堂先生逸稿)』
  • 『망헌유고(忘軒遺稿)』
  • 『팔우헌선생문집(八友軒先生文集卷)』
  • 『동문선(東文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