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예(李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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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19년(세종 1)~1480년(성종 11) = 62세]. 조선 전기 세종(世宗)~성종(成宗) 때의 문신. 집현전(集賢殿) 부교리(副校理)와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 형조 판서(判書) 등을 지냈다. 자는 가성(可成)이고, 시호는 문질(文質)이다. 본관은 양성(陽城)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중추원(中樞院) 첨지사(僉知事)를 지낸 이전지(李全之)이며, 어머니 안씨(安氏)는 안철석(安哲石)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중추원 부사(副事) 등을 지낸 이맹상(李孟常)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이한(李澣)이다.

세종~세조 시대 활동

1438년(세종 20)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441년(세종 23) 식년문과에서 을과(乙科) 2위로 급제하였다.[『국조방목(國朝榜目)』] 이후 집현전 박사(博士)로 경연관(經筵官)이 되었고, 1445년(세종 27)에는 집현전 부교리로 집현전 직제학(直提學)김문(金汶), 신석조(辛碩祖) 등과 함께 『의방유취(醫方類聚)』의 편찬에 참여하였다.(『세종실록』 24년 12월 7일),(『세종실록』 27년 10월 27일) 또 신숙주(申叔舟), 성삼문(成三問) 등과 함께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과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의 편찬에도 참여하였으며, 이듬해인 1446년(세종 28)에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좌정자(左正字)로 세자의 서연(書筵)에 참석하였다.(『세종실록』 28년 10월 5일) 1447년(세종 29)에는 다시 과거에 응시하여 을과 3등으로 급제하였다.[『국조방목』] 세종이 세상을 떠나자 집현전 응교(應敎)로서 『세종실록(世宗實錄)』의 편수관(編修官)으로 참여하였다.[『세종실록』 부록 편수관 명단]

문종(文宗)이 즉위한 뒤에도 경연관으로 활동하였는데, 1451년(문종 1)에는 경연석상에서 은사과(恩賜科)를 다시 실시할 것을 청하기도 하였다.(『문종실록』 1년 2월 19일) 은사과란 과거에 열 번 응시하여 합격하지 못한 사람이나, 나이가 50이 넘도록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사람을 위하여 국가에서 특별히 베푼 과거 시험을 의미하며, 주로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 부정기적으로 거행되었다. 이듬해에는 이석형(李石亨), 김예몽(金禮蒙) 등과 함께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편찬에 참여하였다.(『문종실록』 2년 2월 20일)

단종(端宗)이 즉위한 뒤에도 계속하여 집현전의 직책을 역임하였으며, 1454년(단종 2)에는 기녀(妓女)와 더불어 회음(會飮)하였다는 이유로 집현전 부제학(副提學)하위지(河緯地), 집현전 직제학이석형 등과 함께 추핵되었다. 그러나 이때 집현전과 춘추관(春秋館)의 관원은 공신(功臣)의 후손과 더불어 처벌받지 않도록 하였기 때문에 논죄되지 않았다.(『단종실록』 2년 7월 7일) 이듬해에는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가 되었다.(『단종실록』 3년 5월 17일)

세조(世祖)가 즉위한 뒤에는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고, 사헌부 집의로서의 임무를 지속하였다.(『세조실록』 1년 12월 27일) 1459년(세조 5)에는 중추원 첨지사에 제수되었으며, 이듬해인 1460년(세조 6)에는 호조 참의(參議)가 되어 『손자주해(孫子註解)』의 교정(校正) 작업에 참여하였다.(『세조실록』 5년 8월 19일),(『세조실록』 6년 3월 29일) 1461년(세조 7) 서거정(徐居正) 등과 함께 『북정록(北征錄)』의 교정 작업에 참여하였고, 그 해에 인순부윤(仁順府尹)으로서 중추원 부사김유례(金有禮)와 함께 명(明)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표문(表文)과 전문(箋文)을 바쳤다.(『세조실록』 7년 3월 25일),(『세조실록』 7년 9월 6일) 1466년(세조 12)에는 중추부(中樞府) 동지사(同知事)로서 서거정 등과 함께 경연에 참여하여 『주역(周易)』을 강(講)하였으며, 그 해에 왕명으로 신숙주(申叔舟), 양성지(梁誠之)등과 함께 역(易), 천문(天文), 지리(地理), 의(醫), 복서(卜筮), 시문(詩文), 서법(書法), 율려(律呂), 농상(農桑), 축목(畜牧), 역어(譯語), 산법(算法) 등으로 분류된 유서(類書) 편찬 작업에 참여하였다.(『세조실록』 12년 6월 2일),(『세조실록』 12년 10월 2일)

성종 시대 활동

성종이 즉위한 뒤 가정대부(嘉靖大夫)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에 제수되었으며,(『성종실록』 2년 6월 9일) 이듬해인 1472년(성종 3)에는 문화현(文化縣)의 전 사직(司直)최지(崔池)와 전 전직(殿直)최득강(崔得江)을 방문하여 삼성당(三聖堂)의 사적(事跡)을 왕에게 보고하였다.(『성종실록』 3년 2월 6일) 삼성당은 환인(桓因)과 환웅(桓雄), 단군(檀君)을 모신 사당으로, 일찍이 태종(太宗) 대에 평양의 기자묘(箕子廟)에 합사(合祀)되었다. 그러나 이예가 삼성당의 사적을 보고한 뒤 다시금 국가 차원의 삼성당 치제(致祭)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황해도 지역의 삼성당이 평양 기자묘에 합사된 뒤, 이 지역 사람들은 황해도 지역의 자연재해가 끊이지 않고 발생하는 것을 삼성당이 평양으로 옮겨가서라고 여겼기 때문이다.(『성종실록』 3년 2월 6일) 1474년(성종 5)에는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개성부유수에 제수되었다.(『성종실록』 5년 1월 23일),(『성종실록』 5년 4월 28일)

1476년(성종 7) 공조 판서가 되었는데,(『성종실록』 7년 9월 10일) 『경국대전(經國大典)』을 편찬할 때 부녀자의 재가(再嫁) 금지를 강력히 주장하여 관철하기도 하였다. (『성종실록』 8년 7월 17일) 1479년(성종 10)에는 용양위(龍驤衛) 대호군(大護軍)에 임명되었다.(『성종실록』 10년 12월 23일) 이듬해인 1480년(성종 11)에는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고, 그해 가을 62세의 나이로 성종이 인정전(仁政殿)에서 베푼 양로연(養老宴)에 참석하였다.(『성종실록』 11년 5월 10일),(『성종실록』 11년 9월 19일) 이후 형조 판서에 제수되었다가 그해 12월 세상을 떠났다.(『성종실록』 11년 10월 19일),(『성종실록』 11년 12월 25일)

성품과 일화

이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자질이 영명하고, 학식과 견문이 넓었으며, 성품도 겸손하여 겉으로 드러내 자랑하지 않았다. 집현전에 들어간 이후부터는 거의 문한(文翰)의 직임을 역임하였다.(『성종실록』 11년 12월 25일)

세조가 즉위한 뒤 과거에서 사은(謝恩)하는 자리에서 “성덕을 읊으려고 일어서 춤추려니(歌詠聖德欲起舞) / 하늘바람 소매에 불어 춤사위를 돕는 듯이(天風吹䄂助回旋)”라는 시를 짓자 세조는 “내 일찍이 이예가 고지식한 선비라 여겼는데 이제 이 시를 보니 호기가 넘치는구나” 하고는 곧 나인으로 하여금 비파를 타서 그의 시에 곡조를 붙여 노래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일어나 춤추게 하며 매우 즐거워하다 헤어졌다. 세조는 평소에 이예를 담력이 부족한 자라고 생각하였었는데, 이날 또 다른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이후 이예는 성종 대에 개성부유수를 역임하면서 명리(名吏)로 이름을 높여 ‘은혜로운 정치가 있었다’는 평을 받기도 하였다.

후손

이예는 안철석(安哲石)의 딸과 혼인하였으나 무후(無後)하였고, 다만 측실(側室)로부터 1명의 서자(庶子)를 두었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용재총화(慵齋叢話)』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허흥식, 「九月山 三聖堂事跡의 祭儀와 그 變化」, 『단군학연구』, 창간호,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