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언(李粹彦)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총론

[1457년(세조 3)∼1495년(연산군 1)= 39세]. 조선 전기 성종(成宗) 때의 문신. 의정부 사인(舍人)과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 등을 지냈다. 자는 사미(士美)이다. 본관은 광주(廣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이손(李蓀)이며, 어머니 경주 이씨(慶州李氏)는 용양위(龍驤衛) 섭호군(攝護軍)이계반(李繼潘)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이우생(李遇生)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이수철(李守哲)이다. 정국공신(靖國功臣) 이성언(李誠彦)의 형이기도 하다. 성종 때 야인이 두만강 유역을 침범하자, 도원수(都元帥)허종(許琮)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만주 내지에 살던 니마차[尼麻車] 우디케[兀狄哈]의 본거지를 정벌하고 돌아왔다. 문무(文武)의 지략을 겸비하여 장차 재상이 되리라고 기대하였는데, 마흔 살이 되기 전에 죽었다.

성종~연산군 시대 활동

젊어서부터 학문에 힘써 1477년(성종 8) 사마시(司馬試)의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1세였다. 3년이 지나 24세의 나이로 1480년(성종 11) 식년(式年)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처음에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보임되었다가 승정원(承政院) 주서(注書)로 승진하였다. 그 뒤에 형조 좌랑(佐郞)과 예조 좌랑을 거쳐 1484년(성종 15) 예조 정랑(正郞)이 되었고, 1485년(성종 16)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 그 뒤에 외직으로 충청도도사(忠淸道都事)로 나갔다가 호조 정랑으로 전직(轉職)되었다. 1491년(성종 22)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어 사사(寺社 : 절과 사당)의 전세(田稅)를 관에서 거두고 관에서 지급할 것을 주장하였다.[『성종실록』 3월 14일 3번째기사]

얼마 뒤 야인이 두만강 유역을 침범하자, 성종은 병조 판서(判書)허종을 북정도원수(北征都元帥)로 삼아 토벌하도록 하였다. 허종은 문무의 지략을 겸비한 자로서 군무를 보좌할 인물을 구하였는데, 이때 사헌부 장령으로 있던 이수언이 천거되었다. 성종은 이수언을 성균관 사예(司藝)로 바꾸어 임명하고, 도원수의 종사관으로 삼았다.(『성종실록』 22년 4월 19일) 이에 이수언은 도원수허종을 따라 종군하여, 니마차 우디케의 본거지를 정벌하고 돌아왔다.(『성종실록』 22년 11월 10일) 그 결과 그는 승급(昇級)하고 의정부 검상(檢詳)에 임명되었다가, 1493년(성종 24) 의정부 사인(舍人)으로 승진하였다.

1494년(연산군 즉위년) 사헌부 집의(執義)에 임명되었으나, 연산군에게 직언을 하다 파직되었다. 이듬해인 1495년(연산군 1) 조정에서는 장차 평안도에 둔전(屯田)을 설치하고자 사람을 보내 그 가부(可否)를 살펴보게 하였는데, 이수언이 야인을 정벌한 경험이 있다고 하여 추천되었다. 이에 조정에서 이수언을 홍문관 교리에 임명하여 평안도로 보냈고, 이수언은 평안도에 가서 둔전을 설치할 지역을 살펴보고 돌아오는 길에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병사(病死)하였다.(『연산군일기』 2년 1월 2일) 그때가 1495년(연산군 1) 12월 5일인데, 향년이 39세였다.

성품과 일화

이수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이 충직하고 관대하며, 대인(大人)의 도량이 있었다.

1491년 야인들이 두만강 유역의 6진(鎭)을 침범하자, 성종이 병조 판서허종을 북정도원수로 삼아 여진족을 정벌하게 하였다. 도원수허종이 보좌관으로 문무의 지략을 겸비한 자를 구하자, 그때 사헌부 장령으로 있던 이수언이 천거되었다. 성종이 특별히 이수언을 성균관 사예로 바꾸어 임명하고, 도원수의 종사관으로 삼았다. 도원수허종도 평소 좌찬성이손(李蓀)의 아들 이수언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있었고, 평소 그 국량(局量)이 넓고 큰 데에 탄복하고 있었다. 종사관이수언이 군사의 모든 중요한 사무를 도원수를 찾아가서 일일이 물어서 잘 처리하니, 정벌군 2만 명이 두만강을 건너서 여진족 가운데 만주 내지의 타이가 삼림 지역에 살던 니마차 우디케의 부락을 대규모로 정벌하고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허종의 여진 정벌에 대한 논공행상(論功行賞)을 시행할 때 이수언은 그 공이 제일 높게 평가되어 승급되고 의정부 검상에 발탁되었다가, 곧 의정부 사인으로 승진하였다. 허종은 우의정이 되었는데, 의정부 사인이수언이 그 집에 찾아가서 업무를 보고하면, 허종은 이수언과 함께 번번이 해가 지고 밤이 되도록 업무 이외에 여러 가지 세상일을 논하였다. 대개 이것은 두 사람이 서로가 마음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행(李荇)은 후배 이수언과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사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와 잘 어울리던 선배들이 이수언을 평하기를, “평소 기품과 절개가 있는 사람이다,”고 하고, 모두 “이수언은 앞으로 장상(將相 : 재상)이 될 재목이다.”고 기대하는 것을 보았다. 이에 이행은 이수언의 비명에서 애도하기를, “수명이 길었더라면 한 시대의 위대한 그릇이 되었을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결코 그를 잊을 수가 없다. 아, 이제는 그와 같은 사람을 만날 수가 없으니, 후세에 고징(考徵)이 되도록 내가 들은 바를 어찌 비문에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고 하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광주(廣州)무갑산(無甲山)의 선영에 있는데, 이행이 지은 묘갈명이 남아있다. 처음에 경기도 광주 정수리(定水里)에 장사지냈는데, 선영(先塋)은 아니었다. 그 뒤 아버지 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이손이 세상을 떠나자, 경기도 광주무갑산에 장사지내고, 어머니 경주 이씨의 무덤도 옮겨와서 합장하였다. 이때 이수언의 두 아들 이경(李經)과 이위(李緯)가 울면서 말하기를, “돌아간 아버지께서 생시(生時)에 어버이를 효성스럽게 봉양하였고, 일찍이 잠시도 부모의 슬하에서 떠나기를 싫어했는데, 돌아가신 뒤에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으니, 차마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고 하였다. 이수언이 죽은 지 25년이 지난 1519년(중종 14) 부인 양주 조씨(楊州趙氏)가 세상을 떠나자, 두 아들 이경과 이위는 조부모의 산소 옆에 부모의 분묘를 조성하고, 아버지 이수언과 어머니 양주 조씨를 합장하였다. 이때 두 아들 이경과 이위가 이행에게 묘갈명(墓碣銘)을 부탁하여 무덤 앞에 비석을 세웠다.

부인 양주 조씨는 고부군수(古阜郡守)조이(趙籬)의 딸인데, 자녀는 2남 3녀를 두었다. 장남 이경은 장례원(掌隷院) 사의(司議)를 지냈고, 차남 이위는 사헌부 감찰(監察)을 지냈다. 장녀는 현감(縣監)허종(許磫)에게, 차녀는 종실(宗室) 칠성수(漆城守) 이화(李譁)에게, 3녀는 별제(別提)강세침(姜世琛)에게 각각 시집갔다.

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용재집(容齋集)』
  • 『갈암집(葛庵集)』
  • 『하당집(荷塘集)』
  • 『창설재집(蒼雪齋集)』
  • 『밀암집(密菴集)』
  • 『옥천집(玉川集)』
  • 『우계집(雨溪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