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장(李世長)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총론

[1628년(인조 6)∼1668년(현종 9) = 41세]. 조선 중기 효종(孝宗)~현종(顯宗) 때의 문신. 이조 정랑(正郞) 등을 지냈다. 자는 도원(道源)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거주지는 서울과 경기도 진위현(振威縣)이다. 아버지는 이조 참판(參判)이시술(李時術)이고, 어머니 풍산 홍씨(豊山洪氏)는 예조 참판홍영(洪霙)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예빈시(禮賓寺) 정(正)을 지낸 이정남(李井男)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낸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이항복(李恒福)이다. 공조 참판이세필(李世弼)의 형이기도 하며, 고모부는 형조 판서(判書)를 지낸 정지화(鄭知和)이다.

효종~현종 시대 활동

1652년(효종 3)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와 생원과(生員科)에 모두 합격하고, 1662년(현종 3) 증광(增廣) 문과(文科)의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5세였다. 그 해 승문원(承文院) 가주서(假注書)에 보임되었다. 1663년(현종 4)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이 되었고, 1665년(현종 6) 예문관 대교(待敎)를 거쳐서 봉교(奉敎)로 승진하였다.(『현종실록』 6년 8월 26일) 이어 성균관 전적(典籍)이 되었고,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을 거쳐서, 예조 좌랑(佐郞)으로 전임되었다.(『현종실록』 6년 12월 26일) 영남어사(嶺南御史)를 역임 할 때에는 악성 질병이 유행하거나 먼 곳에 위치하여 다른 사람들이 가기를 꺼리는 외딴 섬 까지도 여러 차례 출입하며 주도면밀하게 민정을 살폈다.

1667년(현종 8)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사서(司書)와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을 거쳐서 홍문관(弘文館)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현종실록』 8년 4월 8일),(『현종실록』 8년 8월 18일) 이어 이조 좌랑(佐郞)이 되었고, 홍문관 교리(校理)와 사간원 헌납(獻納)을 역임하였다.(『현종실록』 8년 9월 4일),(『현종실록』 8년 10월 3일),(『현종실록』 8년 11월 16일) 1668년(현종 9) 병조 좌랑에 임명되었고, 이조 좌랑으로 옮겼으나, 그해 5월 29일 세상을 떠나니 향년 41세였다.

성품과 일화

이세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오뚝한 콧마루에 귀밑머리가 준수하였으며, 눈빛이 쏘는 듯이 늠름하여 바라보면 두려움이 생길 정도였다. 성품은 명랑하고 시원하였으며, 풍채가 준수하고 식견이 통철(洞徹)하여, 어떤 일을 처리할 때에는 한칼에 자르듯이 단박에 결단하였고, 그 일에 얽매어 나약하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질질 끌려 다니거나 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준수하였는데, 그 정기가 서너 사람을 능가할 정도로 우람하였다. 장성한 후에는 김장생(金長生)의 가문에 장가들었는데, 김집(金集)이 이세장을 한번 보더니 이항복(李恒福)의 훌륭한 자손이라며 칭찬하였다.

1662년 과거에 급제한 후, 승문원 가주서에 보임되었을 때, 임금 곁에 입시(入侍)하였는데, 주선(周旋)하는 일이 민첩하고 기주(記注)하는 방식이 간결하고 적절하였다. 당시 현종이 눈병을 앓았기 때문에, 신하들과 야대할 때 촛불을 켜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기사(記事)하였으므로, 다른 사람들은 거의 엉뚱한 것을 쓰기도 하고, 써 놓은 것도 어지러웠으나, 이세장이 쓴 것은 선과 행간(行間)이 모두 고르게 들어맞았으며 한 글자도 어긋나거나 틀린 곳이 없었으므로, 같이 입시한 여러 사람들이 모두 특이한 재주를 가졌다며 칭찬해 마지않았다.

그는 특히 자신의 거취에 있어서 매우 신중하였다. 당시 아버지 이시술의 친구인 영의정홍명하(洪命夏)가 이세장과 같은 동네에 살았다. 홍명하는 나라에 큰 일이 생기면 이세장에게 자기 집으로 와서 함께 논의하고자 하였으나, 이세장은 오히려 홍명하의 집에 찾아가는 일이 아주 드물었다. 이러한 태도는 송시열(宋時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송시열이 이세장을 인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 번도 송시열의 집에 찾아가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선조인 이항복이 이이를 방문하지 않았던 뜻을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처음에 경기도 포천(抱川)의 계류리(溪流里)에 있었으나, 나중에 포천 화산리(花山里)의 선영(先塋)으로 이장(移葬)하였다. 맏사위 김창흡(金昌翕)이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 있다.[비문]

부인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이조 판서(判書)김익희(金益熙)의 딸이자 김장생의 손녀인데, 자녀는 1남 2녀를 두었다. 장남 이성좌(李聖佐)는 부사(府使)를 지냈다. 장녀는 영의정을 역임한 김수항(金壽恒)의 아들 진사(進士) 김창흡의 처가 되었고, 차녀는 학생(學生) 임유하(任由夏)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농암집(農巖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 『청음집(淸陰集)』
  • 『청성잡기(靑城雜記)』
  • 『택당집(澤堂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