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부(李聖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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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83년(선조 16)∼1624년(인조 2) = 40세]. 조선 중기 광해군~인조 때의 무신. 행직(行職)은 수원 부사(水原府使)·경기 방어사(防禦使)이고, 증직(贈職)은 병조 판서(兵曹判書)이다. 자(字)는 존중(存中)이고,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참봉(參奉)이문익(李文益)이고, 어머니 원주 원씨(原州元氏)는 현감(縣監)원연(元埏)의 딸이다. 정종(定宗)의 서출 제 10왕자 덕천군(德泉君)이후생(李厚生)의 8대손이고, 의정부 참찬(參贊)이준(李準)의 종손자이다. 황해도 병마사(兵馬使)이후성(李後晟)의 조부이고, 우의정김덕원(金德遠)의 외조부이다. 어릴 때 종조부 이준(李準)에게 글을 배우다가, 무술(武術)을 익혀서 무장(武將)이 되었는데, 충무공(忠武公)김응하(金應河) 장군과는 막역한 친구 사이였다.

<인조반정(仁祖反正)> 당시, 7백여 명의 병력이 홍제원(弘濟院)에 모였으나, 대장 김류(金瑬)는 반정계획이 이미 누설되었다는 이유로 망설이다가 제시간에 도착하지 않았다. 이에 모인 사람들이 불안해하며 흩어지려고 하자, 이성부가 이괄(李适)을 임시 대장으로 추대하고 군중을 안정시켰다. 이어 대장 김류와 이서(李曙)의 장단 군사가 도착하자, 이성부와 이괄은 선봉장이 되어 1천 5백여 명의 군중을 이끌고 창덕궁을 포위한 다음,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옹립하였다. 인조가 왕위에 즉위한 후, 김류가 <정사공신(靖社功臣)>을 선정하였는데, 이괄은 2등 공신이 되고, 이성부는 3등 공신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겨우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머물렀다. 이때 평안도 병마사이괄은 <정사공신>의 선정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성부는 경기·강원도 우방어사에 임명되어, 좌방어사이중로(李重老)와 함께 예성강 상류 저탄(猪灘)에서 이괄의 반군을 맞아 싸우다가, 패배하여 강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광해군~인조 시대 활동

1608년(광해군 즉위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가, 비변사(備邊司) 낭관(郎官)이 되었는데, 비변사 당상관 영의정이덕형(李德馨)과 좌의정이항복(李恒福)의 공첩(公牒: 공문서)을 맡아 처리하였다. 두 정승은 공문서가 쌓일 때마다 반드시 이성부를 불러 공첩을 건네주며 정리하도록 하였는데, 그가 일을 숙련되고 민첩하게 처리하였을 뿐 아니라, 문필도 겸비하였기 때문이었다.[시장] 두 정승의 추천으로 도총부(都摠府) 도사(都事)로 승진하였고, 이후 함경도 문천 군수(文川郡守)로 나갔다. 이때 마침 북청(北靑)에 축성(築城) 공사가 있었는데, 남병사(南兵使)가 이성부를 중군(中軍)으로 삼아, 축성 공사를 감독하도록 하였다. 축성 공사가 끝나자, 임금이 그 공로를 포상하여 비단 1필을 하사하였다. 경상도 통영 우후(統營虞候)로 전임되었는데, 그가 통영의 전함(戰艦)을 수리하는 데 온갖 노력을 다하자, 나라에서 그 공로를 포상하여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陞品)시켰다.[시장]

1619년(광해군 11) 명나라에서 후금(後金)의 누르하치를 정벌하기 위하여, 조선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명나라의 요동 경략(經略) 양호(楊鎬)가 10만여 명의 대군을 이끌고 누르하치의 본거지 헤투아라[興京老城]로 향하다가, 사르흐 전투에서 전멸하였다. 조선의 도원수강홍립(姜弘立)도 1만 3천 명의 원군을 거느리고 누르하치의 본거지로 향하다가, 심하(深河) 전투에서 누르하치의 기병에게 패배하여, 항복하였는데, 이성부의 친구 김응하(金應河)도 이 전투에서 3천 명의 부하를 이끌고 끝까지 오랑캐 군사와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심하 전투 이후에 압록강 일대의 방어가 위급해졌으므로, 조정에서는 이성부를 평안도 만포 첨사(滿浦僉使)에 임명하여 상로 대장(上路大將)을 겸임하도록 하였다. 그때 대북(大北)의 이이첨(李爾瞻) 일당이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출에 반대하는 서인을 조정에서 몰아냈는데, 이성부는 만포 첨사로 부임한 지 한 해가 채 못 되어,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가 석방되었다.[시장]

그 후 이성부는 집에 2년 동안 은거하였는데, 기평(杞平)유백증(兪伯曾)과 지천(遲川)최명길(崔鳴吉)을 자주 만났다. 유백증도 인목대비의 폐출에 반대하다가, 관직을 삭탈당하고 집에 은거하고 있었는데, 일찍이 이성부의 의기(義氣)에 감명을 받은 적이 있었으므로 서로 왕래하며 교분을 쌓았다. 이성부는 유백증의 소개로 가평(加平)에 은거하고 있던 최명길을 만나게 되었다. 최명길은 그의 아버지 최기남(崔起南)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외조부 김제남(金悌男)과 친하다는 이유로, 관직에서 쫓겨나 경기 가평(加平)에 살고 있었다. 당시 최명길은 신경진(申景禛)의 부탁을 받고 <인조반정(仁祖反正)>의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최명길이 먼저 유백증을 설득한 후, 다시 유백증과 함께 무장 이성부를 집요하게 설득하여 거사에 참여하도록 권유하였다.

1623년 3월 12일 밤중에 거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7백여 명 가량 홍제원(弘濟院)에 집결하였는데, 대장 김류(金瑬)가 오지 않자, 홍제원(弘濟院)에 모인 군중들이 겁을 먹고 흩어지려고 하였다. 이때 이성부가 이괄(李适)을 임시 대장으로 추대하고 부대를 편성하여, 군중을 안정시켰다. 대장 김류가 늦게 도착하면서 이괄과 지휘권을 둘러싸고 대립하자, 이괄을 설득하여, 이성부와 이괄 두 사람이 선봉장이 되고, 이서(李曙)의 장단 군사 7백 명과 힘을 합쳐서 1천 5백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창덕궁을 포위한 다음에,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옹립하였다. 이때 이성부는 대오를 이탈하는 군중을 호령하여 인솔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인조반정>에 공훈을 세운 58명에게 <정사공신(靖社功臣)>을 책봉하였는데, 이때 이성부는 대장 김류의 반대로 3등 공신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겨우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봉되었다. 평안도 병마사이괄은 2등 공신에 책봉된 데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평안도 병마사이괄은 구성부사(龜城府使)한명련(韓明璉)과 함께 평안도의 군사 1만여 명을 이끌고, 평안도 영변(寧邊)을 출발하여 순천(順川)·수안(遂安)·황주(黃州) 등을 차례로 점령하고 예성강을 건너 개성(開城)으로 진격하려고 하였다. 이때 비변사에서 이성부를 경기·강원도 우방어사에 임명하고, 좌방어사이중로(李重老)와 함께 경기·강원도 군사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이괄의 반군을 막게 하였다. 우방어사이성부와 좌방어사이중로는 군사를 신계(新溪)·마탄(馬灘) 등지로 몇 차례 옮겨가며 반군과 싸웠는데, 예성강 상류 저탄(猪灘)에서 이괄의 반군을 맞아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패배하여 강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 이성부가 예성강의 저탄에서 자결한 날이 1624년 2월 6일이었는데, 이성부는 향년 40세였다.[마탄의 충렬사(忠烈祠) 「비명(碑銘)」]

<인조반정> 때 이성부의 활약

<인조반정>의 계획이 진행될 당시, 이성부는 친구 유백증(兪伯曾)의 권유로 가평(加平)으로 가서, 지천(遲川)최명길(崔鳴吉)과 만나게 되었다. 그때 최명길은 아버지 최기남(崔起南)을 모시고 가평의 만곡(晚谷)에 살고 있었는데, 아버지 최기남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외조부 김제남(金悌男)과 친하다는 이유로, 관직에서 쫓겨나 경기 가평(加平)의 시냇가에 만곡정사(晚谷精舍)를 짓고 한가롭게 지냈기 때문이었다. 이때 최명길이 호방한 이성부에게 반정(反正)할 뜻을 은근히 내비치자, 이성부는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출시킨 것에 대하여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분개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후, 유백증과 함께 계속 이성부의 의중을 떠본 최명길은 마침내 그에게 반정의 계획을 알려주었다. 최명길이 반정할 날짜를 1623년 3월 12일 밤중으로 정하고, 홍제원(弘濟院)에 모이라고 통보하자, 반정에 참여할 것을 흔쾌히 약속한 이성부는 그날 저녁에 남보다 먼저 서교(西郊)로 달려가, 홍제원에 도착하였다.[시장]

<인조반정>은 처음에 무장 이서(李曙)와 신경진(申景禛)과 구인후(具仁垕)가 그 계획을 세웠는데, 구인후의 고종 4촌 동생 능양군(綾陽君)이종(李倧: 인조)을 추대하기로 합의하였다. 이들은 서로 은밀히 모의한 다음에 문사 중에서 위엄과 인망이 있는 동지사(同知事)김류(金瑬)를 방문하였는데, 말 몇 마디에 서로 의기투합하면서 김류를 반정군의 대장으로 삼았다. 그 후, 신경진과 구인후는 경륜이 많은 평산 부사(平山府使)이귀(李貴)를 방문하여 반정할 계획을 털어놓았다. 이때 이귀는 선뜻 수락했을 뿐 아니라, 그의 두 아들 이시백(李時白)·이시방(李時昉)도 참여시켰으므로, 그를 반정군의 부장(部將)으로 삼았다. 이어 신경진과 구인후는 문사 최명길(崔鳴吉)·장유(張維), 유생 심기원(沈器遠)·김자점(金自點) 등을 포섭하였고 이들과 함께 반정을 모의하였다. 이때부터 반정 모의에 가담하고 협력하는 자가 날로 늘어갔는데, 이를 눈치 챈 영의정박승종(朴承宗)이 신경진을 평안도 박천(博川) 효성령(曉星嶺) 별장(別將)으로, 구인후를 진도 군수(珍島郡守)로 좌천시켰다. 이때 신경진은 최명길(崔鳴吉)에게 “그대가 맡아서 힘써 주기를 바란다.”며 모든 계획을 그에게 맡기고, 평안도 박천으로 떠났다. 마침 이서(李曙)가 장단(長湍) 방어사에 임명되자, 최명길은 장단(長湍)의 군사를 반정에 동원하기 위하여, 거사할 날짜를 1623년 3월 12일 밤중으로 앞당겨 정한 후, 모두 홍제원에 모이라고 통보하였다.

1623년(인조 즉위) 3월 12일 밤 2경(更),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모두 홍제원(弘濟院)에 집결하였다. 구굉(具宏: 구인후의 삼촌)과 신경진(申景禛)은 능양군(綾陽君)이종(李倧)을 모시고 연서역(延曙驛)에서 방어사이서(李曙)의 장단 군사를 기다리고, 반정군의 부장(副將) 이귀(李貴) 부자를 비롯하여 최명길(崔鳴吉)·김자점(金自點)·심기원(沈器遠)·이성부 등이 먼저 홍제원(弘濟院)에 도착하니, 이괄(李适)·이중로(李重老)·장유(張維)·신경유(申景裕)·최내길(崔來吉: 최명길의 형) 등이 모였는데, 이들이 각자 거느리고 온 장정들이 모두 합하여 6, 7백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때 이이반(李而頒)이 이 사실을 고변(告變)하자, 대궐문을 닫고 비변사(備邊司)의 당상관이 밤중에 대궐에 나와서 모였다. 고변의 소식을 들은 반정군의 대장(大將) 김류(金瑬)는 이미 계획이 누설되었다는 이유로 어찌 할까 망설이며 밤이 깊도록 홍제원에 도착하지 않았다. 반정군의 주장(主將)이 오지 않자, 여러 사람들이 불안해하며 우왕좌왕하다가, 곧 흩어져 해산될 형세가 되었다. 이때 이성부(李聖符)가 부장 이귀(李貴)에게 “일이 다급하게 되었는데, 어떻게 지체하면서 기다릴 수만 있겠습니까.” 하면서, 이괄(李适)에게 다가가 “내가 선봉을 맡겠으나, 주장(主將)은 장군이 아니고서는 할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제의하니, 여러 사람들이 찬동하였다. 이들이 이괄을 추대하여 임시 대장으로 삼고 부대의 배치를 끝마치자, 비로소 대장 김류가 나타났다.

뒤늦게 도착한 대장 김류가 이괄에게 명령을 내리자, 분노한 이괄은 자기가 그대로 대장(大將)을 맡겠다고 고집하였다. 김류와 이괄이 대장 자리를 놓고 서로 다투자, 이성부가 나서서 이괄에게 “원래 주장을 바꾸면 안 돼지만, 오늘의 거사는 서로 마음을 합하여 재빨리 군사를 움직이는 데 성패가 달려 있으니, 부디 양보하여 처음 논의한 대로 김류를 대장으로 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라고 회유하였고, 나이 많은 부장 이귀도 이괄을 달래니, 이괄이 그 제의를 받아들여, 이성부와 함께 좌우의 선봉장을 맡았다.

이어 장단(長湍) 방어사이서(李曙)가 한밤중에 장단 군사 7백여 명을 거느리고 연서역에서 능양군(綾陽君)이종(李倧)을 맞이하여, 홍제역에 도착하니, 군사가 모두 1천 4, 5백여 여 명이 되었는데, 문무관 출신 장수가 2백여 명이었다. 대장 김류가 반정군을 이끌고 창덕궁(昌德宮)으로 향하였으나, 군사의 위용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고, 지휘가 일사분란하게 이루어지지 않자, 이탈자까지 생기면서 군중이 불안해하였다. 이때 선봉장 이성부가 말고삐를 잡은 채 칼을 빼어 들고 군중을 향하여 “본래 이번 거사를 도모하는 것은 종묘사직을 위하여 죽음도 불사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이제 와서 자기만 살겠다고 뿔뿔이 흩어지니, 아이들의 장난처럼 하자는 것인가. 한 사람이라도 감히 대오를 이탈하는 자가 있으면 군법대로 처형하겠다.”면서 호령하자, 불안해하던 군중이 숙연해지면서 진정되었다. 이때 이성부가 칼을 빼 들고 군중의 이탈을 막지 않았다면, <인조반정>은 결코 성공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밤 3경에 반정군이 창의문(彰義門)으로 들어가, 광해군이 기거하던 창덕궁(昌德宮)을 에워싸고 포위하였는데, 궁궐 안에 있던 비변사 대신들과 여러 관리들은 반정군의 함성소리를 듣고 모두 놀라서 도망쳤다. 대장 김류 등은 단봉문(丹鳳門)을 열어젖히고 궁궐로 들어간 후, 창경궁에 도착한 능양군을 인도하여 인정전(仁政殿) 서쪽 뜰 위에 나아가 동향하여 호상(胡床)에 앉게 하였다. 반정군이 그 앞에 줄지어 서서 만세를 부르고 환호하자, 궁궐 안에 시위하던 장졸들이 이를 보고 모두 흩어졌다. 이때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침전(寢殿)에서 잠을 자다가, 반정군의 함성을 듣고 깨어난 광해군은 북쪽 후원의 소나무숲 속으로 도망하였는데, 사다리를 놓고 궁궐의 담장을 넘어 사복시(司僕寺) 앞 개천가에 있는 의관 안국신(安國信)의 집으로 숨었다. 왕세자 이지(李礻+支)는 광해군을 뒤쫓다가 찾지 못하고 장의동(莊義洞) 민가에 숨었다.(『광해군일기』 15년 3월 12일) 광해군은 그 뒤에 안국신의 고발로 붙잡혀서 반정군 앞으로 끌려 왔다. 3월 13일 아침, 대장 김류는 서궁(西宮)으로 가서 인목대비(仁穆大妃)를 모셔다가 복위(復位)시키고, 인목대비의 명령을 받아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능양군(綾陽君)이종(李倧)을 왕으로 추대하니, 그가 바로 인조(仁祖)이다. <인조반정>이 성공한 후, 반정에 공훈을 세운 58명을 1, 2, 3등으로 나누어 <정사공신(靖社功臣)>에 책봉하였다. 이때 이성부와 이괄에게 나쁜 감정을 가졌던 김류의 반대로 이괄은 겨우 2등 공신에 책정되었고, 이성부는 아예 3등 공신에도 들지 못하였다. 논공행상과정에서 <정사공신> 2등에 책봉된 것에 불만을 품은 이괄은 결국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성부는 공신에 책봉되지 못한 것에 대하여 전혀 불평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괄의 반란을 막는 역할을 하였다.

예성강 저탄 전투에서 방어사 이성부의 장렬한 죽음

<정사공신(靖社功臣)>의 책훈 과정에서 김류(金瑬) 등 10명은 1등 공신에 책훈되고, 이괄(李适) 등 15명은 2등 공신으로 책훈되자, 이괄은 이에 불만을 품었다. 이후, 도원수(都元帥)장만(張晩)의 추천으로 평안도 병마사(兵馬使)가 된 이괄은 1624년(인조 2) 1월 22일 구성부사(龜城府使)한명련(韓明璉)과 함께 평안도 지방의 군사 1만여 명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괄은 임진왜란 당시 투항한 왜병(倭兵) 1백여 명을 앞세우고, 평안도 영변(寧邊)을 출발하여 순천(順川)·자산(慈山)을 거쳐, 황해도의 수안(遂安)·황주(黃州) 등을 차례로 점령하고 예성강을 건너 개성(開城)으로 진격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방어에 나선 도원수장만의 군사가 패전을 거듭하자, 비변사에서는 이성부를 경기·강원도 우방어사에 임명하고, 이중로(李重老: 1577~1624)를 좌방어사에 임명하여 반란군을 막게 하였다. 그때 조정에서는 김류(金瑬)의 건의에 따라 서울에 있던 이괄의 부인과 동생을 잡아 처형하였다. 하지만 이괄의 군대가 예성강을 건너 서울로 침입하려고 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인조는 서울 도성을 떠나 공주로 피난하였다.

우방어사이성부는 좌방어사이중로와 함께 경기와 강원도 지방의 군사를 이끌고 양주(楊州)로 나가 주둔하였다. 당시 도원수장만이 황해도 평산에서 강원도 철원으로 군사를 이끌고 후퇴하자, 부체찰사(副體察使)이시발(李時發)과 부원수(副元帥)이서(李曙)가 좌우 방어사에게 각각 멋대로 명령을 내려 혼선이 생기는 바람에 좌우 방어사는 6일 동안 세 차례나 군사를 이동하였다. 2월 4일, 명령에 따라 신계(新溪)의 석령(石嶺)을 지켰으나, 2월 5일, 다시 예성강의 상류의 마탄(馬灘)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마탄은 석령에서 160리 떨어진 곳이었는데, 이성부와 이중로는 군사를 이끌고 160리나 되는 험한 산길을 이동하였는데, 이들은 서로 “형세가 다급하니, 우리들은 오직 힘을 다해 싸우다가 나라에 목숨을 바쳐야 할 뿐입니다. 내가 1보(步)를 물러나면, 장군이 군법에 따라 나를 처단하고, 장군이 1보를 물러나면, 나도 장군을 처단할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격려하였다. 힘든 과정을 거쳐 겨우 마탄에 도착하였으나, 또 저탄(猪灘)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은 두 방어사는 군사들에게 군장을 가볍게 하도록 하고 하룻밤 사이에 빠르게 달려, 2월 6일 해가 뜰 무렵에 예성강의 저탄에 이르렀다. 예성강 상류에 있는 마탄과 저탄은 불과 몇 리 밖에 떨어지지 않은 여울이었는데, 우방어사이성부와 좌방어사이중로는 예성강 상류의 저탄(猪灘)에서 여울을 등지고 포진하였다. 이때 평산 부사(平山府使)이곽(李廓), 연안 부사(延安府使)이인경(李寅慶)은 먼저 군사를 이끌고 마탄으로 와서 진을 치고, 풍천 부사(豐川府使)박영신(朴榮臣), 옹진 현감(瓮津縣監)윤정준(尹廷俊)도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마탄 아래를 지켰다. 이때 이괄의 반군이 마탄에 이르러 먼저 이곽과 이인경을 공격하였는데, 이들 군대가 싸우지도 않고 달아났으므로, 이괄의 반군은 연달아 풍천과 옹진의 군사를 공격하여 격파시켰다. 좌우 방어사가 거느린 군사는 모두 합하여 1천여 명 정도에 지나지 않는 작은 군사였는데, 하루 낮밤에 160리를 행군하면서 굶주림과 피곤함에 지쳤을 뿐 아니라, 예성강의 하류 마탄에서 관군이 패주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모두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이괄의 반군이 저탄의 군사를 몇 겹으로 포위하면서, 두 방어사는 군사들을 독려하여 싸움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힘을 쓸 수가 없었다. 반군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이성부와 이중로 두 방어사는 적에게 사로잡혀 치욕을 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모두 물속에 뛰어들어 죽었다. 이성부가 이중로와 함께 예성강의 저탄에서 자결한 날이 1624년 2월 6일이었는데, 이성부는 향년 40세였고, 이중로는 향년 48세였다. [마탄의 충렬사(忠烈祠) 「비명(碑銘)」]

예성강의 마탄(馬灘)과 저탄(猪灘)에서 관군을 대파시킨 이괄의 반란군은 개성을 점령한 후, 임진강을 건너 2월 11일, 마침내 서울 도성에 들어와 선조의 서출 제 10왕자 흥안군(興安君)이제(李瑅)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2월 14일, 도원수장만이 각지의 관군을 규합하여 서울 근교 길마재[鞍峴]에 진을 쳤다. 2월 15일, 이괄은 군사를 두 갈래로 나누어 길마재의 위쪽에 포진한 관군을 위로 쳐다보고 공격하다가, 아래로 내려다보고 공격하는 관군에게 대패하였다. 이날 밤에 이괄은 수백 명의 패잔병을 이끌고 수구문(水口門 : 지금의 광희문)으로 빠져나가 삼전도를 거쳐 광주(廣州)로 달아났다. 관군이 맹렬히 추격하자, 이괄의 패잔병은 뿔뿔이 흩어졌다. 2월 15일 밤 이괄이 이천의 묵방리(墨坊里)에 이르렀을 때, 반기를 든 부하 장수들이 이괄과 한명련의 목을 베어 관군에게 바치고 항복하면서, 이괄의 반란은 불과 23일 만에 끝났다.

1694년(숙종 20) 황해도 평산(平山)의 유림(儒林)에서 <이괄(李适)의 난> 때 예성강의 상류 마탄(馬灘)과 저탄(猪灘)에서 이괄의 반란군과 맞서 싸우다가 전사한 이성부·이중로 등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예성강의 마탄 물가에 충렬사(忠烈祠)를 세웠으며, 1712년(숙종 38) 나라에서 민충사(愍忠祠)라고 사액(賜額)하고, 노비와 위토(位土)를 하사하였다.[『신증동국여지승람』 42권]

성품과 일화

키가 훤칠하고 용모가 준수하였다. 성품이 강개(慷慨)하고 기개(氣槪)가 있었으며, 뜻이 크고 기질이 호방하였는데,[시장] 어릴 때부터 남다른 데가 있었다.

이성부는 여섯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갔다. 자라면서 종조부인 참찬(參贊)이준(李準)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는데, 그가 글공부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놀이를 좋아하자, 종조부 이준은 종손자 이성부에게 글공부를 그만두고 무술(武術)을 배우도록 권하였다. 이성부의 어머니 원씨(元氏)는 아비 없는 아들을 올바르게 교육시키려고 항상 아버지처럼 엄하게 대하였으며, 아들에게 충성과 의리를 반드시 지키도록 가르쳤다. 그러므로 이성부도 어머니를 엄한 아버지처럼 섬기고 효도를 다하였다. 1623년 3월 13일 아침,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성공하고 난 후, 이성부는 구종(驅從: 몸종)을 앞세우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어머니 원씨는 대문을 닫은 채 선뜻 내다보지 않고 있다가, 한참 후에 아들이 어머니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대문을 열어주었다.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온 도성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두 중천에 솟은 해와 같이 알고 환영하였지만, 어머니 원씨는 세상 사람들의 유속(流俗)과 달리 항상 아들의 안위를 걱정하며, 방안에서 조용히 정좌(正坐)하고 불공(佛供)을 드리고 있었다.[시장]

이성부는 비록 무관(武官)이었으나 평소 성실히 자기 몸을 단속하고 근신하며 수양에 힘썼으므로, 무인의 거센 기질이 전혀 없었다. 재주와 지략이 있어서 서울과 외방에서 관직 생활을 할 때, 모두 높은 고과 성적을 받았다. 그는 청렴결백함을 신조로 삼았으므로, 집안에 저축된 곡식이 한 섬도 없어서, 어머니의 봉양을 제대로 할 수 없었으나, 어머니 원씨는 이를 편안하게 여기며, 아들에게 구차스럽게 영리를 추구하지 말도록 경계하였다. 이성부는 성품이 원래 강직하여 명리(名利)를 멀리 하고 시속을 따라 움직이지 않았으며, 권귀(權貴)를 추종하거나 그들의 비위를 맞춘 적이 없었으므로 벼슬길에 나가서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다. 인조 때에는 권신 김류(金瑬)의 비위를 거슬러 공신(功臣) 책훈에서 제외되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가 억울하게 되었다고 하였으나, 이성부는 태연히 이를 받아들이고 끝까지 전혀 불만의 기색을 보이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훌륭한 무장이라고 더욱 칭찬하였다.[시장]

이성부가 통영 군수(統營郡守)로 있었을 때, 선비 홍무적(洪茂績)이 대북(大北) 이이첨(李爾瞻) 일당의 사악한 행위를 규탄하는 상소를 광해군에게 올렸다가 거제도로 귀양을 왔는데, 군수이성부는 녹봉을 쪼개어 홍무적을 도와주었다. 이후, 그가 체직되어 서울로 돌아가게 되자, 본인이 타고 다니던 당나귀를 홍무적에게 건네주었다. 홍무적은 나중에 판서(判書)가 되었는데, 이성부가 베풀어준 온정을 잊지 못하고, 항상 이성부를 칭송하였다. 이성부는 평생 남과 사귀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나, 충무공(忠武公)김응하(金應河)와는 막역한 친구로 지냈다. 두 사람은 만날 때마다 항상 충의로써 서로 격려하며,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자고 맹세하였다. 이후, 친구 김응하는 명나라가 후금(後金)을 칠 때, 조선이 명나라 군사를 도와 후금의 누르하치와 싸웠던 「심하(深河) 전투」에서 3천여 명의 군사와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결국 김응하는 심하의 싸움에서 순국하고, 이성부는 저탄(猪灘)의 싸움에서 순국하면서, 두 사람 모두 충의를 지키다가 죽은 명장으로 후세에 이름을 남겼다.[시장]

일찍이 이성부의 비장(裨將) 가운데 방흡(方潝)이라는 무관이 있었다.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이성부는 경기·강원도 우방어사(右防禦使)에 임명되었다. 그가 출전하려고 할 때, 방흡이 담복(禫服)을 입고 찾아와 그에게 종군할 것을 간청하였으므로, 방어사이성부는 방흡을 종사관으로 데리고 갔다. 군사를 이끌고 예성강 저탄(猪灘)에 도착한 방어사이성부는 군사의 진영(陣營)을 배치한 후, 방흡을 적진(敵陣)에 파견하여 정세를 정탐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성부의 명령을 받고나갔다가 본진으로 돌아온 방흡은 반군의 기습을 받아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전멸해 버린 상황을 목격하게 되었다. 방흡은 방어사이성부의 시신을 찾기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하였으나 결국 시신을 찾지 못하였다. 이성부가 강물에 투신하여 죽었다는 사실을 즉시 깨달은 방흡은 그의 종에게 자기의 옷을 벗어 주고 집으로 돌려보내면서, “주장(主將)이 충성을 다하려고 순국하였는데, 내가 혼자 구차하게 산다면 뒷날 지하에서 무슨 면목으로 주장을 만나겠는가.”라고 하면서, 그도 강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결국 이성부의 충성과 의리가 막료와 부하들을 감동시켰기 때문에 막료 방흡이 죽음으로써 보답한 것이다.[시장]

묘소와 후손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죽은 뒤에 인조의 명으로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고, 숙종 때 ‘충신(忠臣)의 정문(旌門)’이 세워졌으며, 황해도 평산(平山)의 민충사(愍忠祠)에 제향되었다. 이성부의 손자인 병마사이후성(李後晟)이 숙종에게 조부의 시호를 내려달라고 계청(啓請)하자 예조에서 시호를 내렸는데, 그때 이후성이 만정(晩靜)서종태(徐宗泰)에게 이성부의 시장(諡狀)을 지어 달라고 간청하였다.

서종태는 시장에서 “이성부가 세상을 떠났을 때, 인조가 즉시 병조 판서에 추증하였으나, 자손들이 아직 어려서 조정에 정려(旌閭)와 시호(諡號)를 내려달라고 계청(啓請)하지 못하였다. 1684년(숙종 10년) 예조 참판이선(李選)이 ‘이성부와 이중로(李重老)가 나라에 바친 충절은 같습니다. 이중로는 이미 정려(旌閭)를 받았으나 이성부는 정려를 아직 받지 못하였으니, 똑같이 정려를 시행해야 마땅할 것입니다.’라고 상소하니, 숙종이 마침내 이성부의 집 앞에 정려를 세우도록 허락하였다. 그 뒤에 평안도 평산(平山) 선비들이 합의하여 예성강의 저탄(猪灘)에 민충사(愍忠祠)라는 사당을 세우고, 이성부와 순절한 여러 사람을 함께 봉향(奉享)하였다. 1703년(숙종 29) 이성부의 손자 이후성이 나라에서 시호를 내려줄 것을 청하자, 예조가 복계(覆啓)하기를, ‘이성부의 본직이 종2품이므로, 관품으로 시호를 내리는 법령에는 맞지는 않으나, 절의(節義)를 지키고 죽은 사람에게는 특별히 시호를 내리는 관례가 있으니, 마땅히 시호를 내려주어 그 충성과 의리를 표창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숙종이 이성부에게 시호를 내려주도록 허락하였다.”고 하였다.[시장]

부인 김씨(金氏)는 사인(士人) 김익형(金益炯)의 딸인데, 자녀는 1남 2녀를 낳았다. 외아들 이철헌(李哲獻)은 참봉(參奉)을 지냈다. 나라에서 죽은 이성부를 포상할 때 아들 이철헌에게도 참봉 벼슬을 주었는데, 그때 그의 나이가 겨우 14세였다. 장녀는 참봉(參奉)황우(黃)에게, 차녀는 사복시(司僕寺) 판관(判官)김인문(金仁文)에게 각각 시집갔다. 이철헌의 아들은 참봉이후필(李後泌), 황해도 병마사(兵馬使)이후성(李後晟), 그리고 이후백(李後白)·이후강(李後綱)이다. 병마사이후성(李後晟)은 조부 이성부의 공으로 은사(恩賜)를 받아서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다. 둘째사위 김인문의 아들이 김덕원(金德遠)인데, 문과에 급제하여 의정부 우의정(右議政)을 지냈다.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계곡집(谿谷集)』
  • 『서계집(西溪集)』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