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량(李成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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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 무장으로 요동 지역에 22년간 주둔하면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던 인물.

개설

『명사(明史)』에는 이성량의 공훈이 변경 장수 중 건국 이래 가장 훌륭했다는 평가가 기록되어 있다. 이성량은 뛰어난 용맹과 강인한 신체를 가지고 있었고, 무예 역시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집안이 가난했기 때문에 관직을 맡지 못하다가 순안어사(巡按御史)의 눈에 띄어 북경으로 가서 관직을 받게 되었다.

이성량은 요동 험산(險山)에서 참장(參將)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1567년(명 융경 1) 삽한부(揷漢部) 수령인 토만(土蠻)이 대규모로 운남성의 영평(永平)을 공격해 오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이성량은 자원하여 참전해서 큰 전공을 세웠다. 당시의 전공을 통해 부총병으로 승진했다. 험산에서 근무하다가 요양(遼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후 이성량은 요동에서 22년 동안 주둔하면서 수많은 전투를 지휘했다. 대승을 거둔 것만도 10회가 넘었다. 그의 탁월한 군사적 역량은 황제와 조정의 신료 모두에게 인정받았다. 『명사』에는 변방의 장수로서 세운 무공으로만 따진다면 지난 200년 동안 이성량보다 높았던 인물이 없었다는 평가가 수록되어 있다.

가계

『명사』에는 이성량의 고조부 이영이 조선에서 명으로 내부하여 철령위지휘첨사의 관직을 맡게 되면서 가문을 이루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동생 이성재(李成材)는 참장으로 활약했다. 이성량의 큰아들 이여송(李如松) 역시 뛰어난 무재를 지니고 이성량을 도와 많은 공적을 세웠다. 한때 이성량을 능가할 정도의 지위에까지 오르기도 했으며, 임진왜란 당시 명군을 인솔하고 조선으로 출병했다. 다른 아들이었던 이여백(李如柏), 이여정(李如楨), 이여장(李如樟), 이여매(李如梅)는 모두 총병관까지 역임했다. 그리고 이여재(李如梓), 이여오(李如梧), 이여계(李如桂), 이여남(李如楠)은 모두 참장을 역임했다.

활동 사항

1569년 4월에 장파실(張擺失) 등이 이성량의 주둔지에 접근하여 변방을 어지럽히자 공격하여 150여 명을 사살했다. 당시 전투의 공적으로 이성량의 관직이 1등급 오르게 되었다. 다음 해 9월에 신애(辛愛)가 대규모의 병력을 인솔하고 요동을 침입해 왔다. 총병관 왕치도(王治道)가 신애의 군대를 방어하다 전사하게 되었다. 그러자 명 조정에서는 이성량을 발탁하여 요동 일대의 병력을 인솔하고 적을 방어하도록 조치했다.

당시 요동 일대에는 엄답(俺答), 토만, 흑석탄(黑石炭), 난토(煖兎), 공토(拱兎), 복언태주(卜言台周), 황태길(黃台吉) 등의 여러 세력이 위치하고 있었다. 황태길, 속파해(速把亥), 초화(炒花), 동호리(董狐狸), 장앙(張昂)과 같은 인물들이 명에 소속되는 것을 거부하고 요동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이 외에도 왕고(王杲), 왕올당(王兀堂), 청가노(淸佳砮), 양길노(楊吉砮) 등의 무리도 요동 지역을 노리고 있었다.

이성량은 요동의 병력을 지휘해서 10여 년 동안 이들과 전쟁을 거듭했다. 한편 요동 일대의 군사체제를 정비하고 병력을 선발하여, 군비를 갖추면서 4만에 달하는 병력을 확보했다. 그의 노력으로 요동의 군사력은 보다 강해졌고, 요동 일대의 방어체제가 정비되었다.

이성량은 요동에서 22년 동안 주둔하면서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했다. 대승을 거둔 것만도 10여 차례나 되었다. 황제는 이성량의 전승을 보고받을 때마다 종묘에 제사를 올렸다. 그리고 이성량이 전투에서 승리했을 때마다 많은 상과 관직을 하사했다.

조선은 이성량이 광녕총병(廣寧總兵)으로 재직하고 있던 시절부터 월경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자문(咨文) 즉 공문을 주고받기도 했다(『선조수정실록』 6년 11월 1일). 이성량은 원래 조선에서 유명한 인물이었지만 임진왜란 당시 그의 큰아들 이여송(李如松)이 명군을 인솔하고 파견되어 오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선조수정실록』에는 영원백(寧遠伯)으로 있던 이성량이 아들 이여송이 조선으로 출동하자 추후에 글을 보내 “조선은 곧 우리 선조의 고향이니, 너는 힘쓰라.”고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도 하다(『선조수정실록』 26년 9월 1일).

이성량은 장수로서 발탁된 후 출전할 때마다 승리해서 자신의 위엄을 천하에 떨쳤다. 전공이 많아질수록 자연스럽게 그의 관직도 높아졌다. 아울러 그의 동생들과 아들들의 관직도 높아졌다. 뿐만 아니라 이성량을 따라다니던 사람들이나 집안의 노복들까지도 현달하지 못한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이성량은 자신의 관직과 위상이 높아지게 되자 성격이 교만해졌고 사치를 즐기게 되었다. 군자금, 마시(馬市)의 이익, 염세(鹽稅) 등 요동 일대의 재정과 관련된 모든 일은 반드시 이성량의 손을 거치게 되었다. 따라서 요동의 상인과 백성들의 상업 활동은 모두 이성량의 뜻에 따라 조정되었다. 그가 확보했던 경제적 이익은 중앙 조정의 관리들에게 뇌물로 사용되었다. 조정의 관리들 가운데 그로부터 뇌물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할 정도였다.

심지어 그는 조정에 전투에 대한 전공을 허위로 보고하기 시작했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전투에 대한 승전을 보고했고, 양민을 죽이고는 적군을 죽였다고 보고하기도 했다. 그의 허위 보고가 심해지고 뇌물을 받았던 대신들이 조정에서 떠나게 되자 새로운 대신들은 이성량에 대한 탄핵을 진행했다.

결국 이성량은 자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성량이 자리에서 물러났던 10여 년 동안 요동의 책임자가 8명이나 교체되었고, 요동의 방어체제는 약화되었다. 결국 이성량은 76세의 나이에 다시 요동을 책임지라는 명령을 받고 원래의 위치에 복귀하게 되었다. 그가 복귀하자 요동 일대는 다시 안정을 찾았다. 9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계속 요동의 책임자로 자리했다.

참고문헌

  • 『만력삼대정고(萬曆三大征考)』
  • 『명사(明史)』
  • 『명목종실록(明穆宗實錄)』
  • 『명신종실록(明神宗實錄)』
  • 久芳崇, 「16世紀末, 日本式鐵砲の明朝への傳播-萬曆朝鮮の役から播州楊應龍の亂へ」, 『東洋學報』84-1, 2002.
  • 황지영, 「이성량사건을 통해서 본 17세기 요동정세의 변화」, 『조선시대사학보』21, 조선시대사학회,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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