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구(李聖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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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84년(선조 17)∼1644년(인조 22) = 61세]. 조선 중기 광해군~인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의정부 영의정(領議政)이다. 자(字)는 자이(子異)이고, 호(號)는 분사(汾沙)·동사(東沙)이다. 시호는 정숙(貞肅)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이조 판서지봉(芝峯)이수광(李晬光)이고, 어머니 안동김씨(安東金氏)는 의금부 도사(都事)김대섭(金大涉)의 딸이다. 태종의 서출 제 1왕자 경녕군(敬寧君)이비(李裶)의 7대손이고, 도승지이민구(李敏求)의 형이다. 예조 판서이일상(李一相: 이정구 손자)의 장인이고, 대사성이현기(李玄紀)와 판서이현석(李玄錫)의 조부이다.

광해군 때 이성구가 사간원 헌납(獻納)에 임명되었는데, 아버지 이수광은 대사헌이었고, 동생 이민구는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이었으므로, 3부자가 삼관(三館)에 포진하였다고 하여 세인들의 주목을 받았다. 사헌부 지평(持平)으로 있을 때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옥사가 일어났는데, 이성구는 이에 적극 반대하다가 파직되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에 서인이 정권을 잡자, 대사헌을 거쳐, 이조·형조·병조의 판서를 지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당시,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청나라 오랑캐 군사와 싸울 때, 병조 판서로서 군사를 총지휘하였고, 척화파(斥和派)와 주화파(主和派)가 논쟁할 때, 최명길(崔鳴吉)·김류(金瑬)와 함께 주화파 3인방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강화도로 피난 간 가족 가운데 부인과 아들과 딸들이 오랑캐 군사에게 화를 당하고, 막내아들은 사로잡혀 심양(瀋陽)으로 끌려갔다. 청나라와 화의가 성립되어,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심양에 볼모로 잡혀갈 때, 우의정에 임명되어 세자를 수행하였다. 귀국한 뒤에 좌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은화 1천 5백 냥의 몸값을 지불하고 심양으로 끌려간 아들을 데려온 사건으로 인하여, 사헌부 장령(掌令)홍무적(洪茂績)의 탄핵을 받았다. 영의정이 되었을 때, 청나라에서 선천 부사이계(李烓)와 의주 부윤황일호(黃一皓)가 명나라와 내통하였다고 의심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들을 변호하다가 파직되었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03년(선조 36)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0세였다. 5년이 지난 1608년(광해군 즉위) 별시(別試) 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5세였다.[『국조방목』] 바로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에 보임되었다.

1609년(광해군 1) 예문관 검열(檢閱)이 되어, 세자시강원 설서(說書)를 겸임하였고, 1610년(광해군 2) 예문관 봉교(奉敎)로 승진하였다.(『광해군일기』 2년 7월 3일) 1611년(광해군 3) 승륙(陞六)하여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임명되었다가, 사헌부 감찰(監察)이 되었는데, 이때부터 여러 차례 홍문관과 사헌부·사간원의 삼관(三館)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비문] 1612년(광해군 4) 홍문관 부교리(副校理)가 되었고, 1613년(광해군 5) 사간원 헌납(獻納)이 되었다가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광해군일기』 5년 4월 22일) 이때 아버지 이수광(李晬光)은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이었고, 아우 이민구(李敏求)는 홍문관 수찬(修撰)이었으므로, 3부자가 모두 삼관(三館)에 재직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성구는 “한 집안에서 세 사람이 삼사(三司)에 나란히 재직하고 있으니, 우리 집안에 화가 미칠까 두렵다.”며 탄식하고 경계하였다.[시장]

당시 대북(大北)의 이이첨(李爾瞻) 일당은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출시키기 위하여 사헌부 장령(掌令)정조(鄭造)와 윤인(尹訒)으로 하여금 인목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시키자는 의논을 제기하도록 하였다. 이를 반대하던 사헌부 지평이성구는 정조와 윤인이 발론(發論)하지 못하도록 적극 저지하다가, 결국 대북의 이이첨 일당의 미움을 샀다. 이때 영의정이항복(李恒福)은 인목대비의 폐출을 극력 반대하였으므로, 이이첨 일당은 영의정이항복을 무고(誣告)하여 함경도 북청(北靑)으로 유배시켰다.[비문] 사헌부 지평이성구는 백사(白沙)이항복(李恒福)의 주장을 옹호하였으므로, 그의 유배를 반대하며 이이첨 일당과 맞서 싸웠으나, 결국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비문]

1614년(광해군 6) 외직으로 나가서 이천 현감(伊川縣監)에 임명되었는데, 이듬해인 1615년(광해군 7)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동생 이민구(李敏求)와 함께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3년의 상기(喪期)를 마치고, 1618년(광해군 10) 경기 영평 판관(永平判官)에 임명되었다. 영평은 포천현(抱川縣)에 소속되어 있었으므로, 일이 매우 많았으나 모든 일을 적절히 처리하여 공사(公私)가 화합하였다. 그해 가을에 백사(白沙)이항복(李恒福)이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나자, 북청(北靑)에서 고향인 포천으로 반장(反葬)하였는데, 고을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서 제향하였다. 이항복의 사당을 포천사람들이 세웠다고는 하나, 그 책임이 전적으로 영평 판관이성구에게 있다고 여긴 이이첨 일당은 그의 이름을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여, 영구히 벼슬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에 이성구는 광해군 말년에 집에 은거하며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가 파직되어 집으로 돌아온 뒤에 포천 사람들이 이성구의 추사비(追思碑)를 세웠다.

인조 전반기 활동

1623년 3월, 서인(西人)에 의하여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이성구는 사간원 사간(司諫)에 발탁되었다.(『인조실록』 1년 3월 14일) 그 후, 의정부 사인(舍人)이 되었다가, 홍문관 부응교(副應敎)를 거쳐, 강화 부윤(江華府尹)으로 나갔다. 이때 인조가 비변사로 하여금 문신(文臣) 가운데 장수의 재질이 있는 자를 천거하도록 하자, 비변사에서는 이성구(李聖求)·이민구(李敏求) 형제와 심기원(沈器遠)·이명(李溟) 등 10인을 천거하였다.(『인조실록』 1년 11월 7일) 1625년(인조 3) 봄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된 후,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승진하였고,[『승정원일기』인조 3년 3월 22일] 예조 참의(禮曹參議)와 병조 참지(兵曹參知)를 거쳐,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인조실록』 3년 9월 19일) 당시 병조 판서서성(徐渻)은 “병조 참의이성구가 근래 나와 같이 병조의 일을 보았는데, 앞으로 나라의 큰일을 맡길 만한 사람은 바로 이 사람이다.”라고 평하였다.[비문] 즉 장차 전쟁과 같은 큰 일이 일어났을 때, 병조의 일을 맡길 재목은 이성구 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1626년(인조 4) 다시 병조 참지가 되었다가,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임명되었다.(『인조실록』 4년 8월 11일)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났다. 이때 그는 이조 참의로서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분조(分朝)를 따라 전라도 전주(全州)로 내려갔다가 돌아온 후, 다시 대사간에 임명되어, 승문원 부제조(副提調)를 겸임하였다. 1628년(인조 6) 좌승지(左承旨)가 되었다. 이때 함경도 길주(吉州)에 파견되어 무과(武科) 시험을 주관하였으며, 그 지방의 민폐(民弊) 16가지를 조사하여 인조에게 보고하였다.[비문] 인조는 그의 노고를 포상하여 정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陞品)시키고, 전라도 관찰사에 임명하였다.(『인조실록』 6년 7월 16일) 그해 겨울에 아버지 이조 판서이수광의 병세가 위독해지자, 인조가 선전관(宣傳官)을 전주 감영(監營)으로 보내 전라도 감사이성구에게 빨리 서울로 돌아오라고 명하였다. 이성구는 명을 받고 바로 서울 집으로 돌아왔으나, 아버지 이수광(李晬光: 1563~1628)은 향년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동생 이민구(李敏求)와 함께 선영(先塋)에서 여묘살이를 하였는데, 3년 상기(喪期)를 끝마치자, 1631년(인조 9) 다시 대사간에 임명되었고, 이어 도승지(都承旨)로 영전되었다. 그해 겨울에 특별히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임명되어, 도총부(都摠府) 부총관(副摠管)·세자시강원 우부빈객(右副賓客)을 겸임하였다.[비문]

1633년(인조 11) 특별히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임명되었으나, 홍문관 부제학유백증(兪伯曾)이 “병조 판서이성구는 궁중의 인척이기 때문에, 전일 이조 참판을 임명할 때에도 특명에서 나왔고, 지금 또 다시 특명으로 병조 판서에 승진되었으므로, 여러 사람들이 모두 의심하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빨리 성명(性命)을 거두어 여러 사람의 의심을 풀어주소서.” 라며 차자를 올려 반대하였으나, 인조가 비답하지 않았다. 논란의 원인은 바로 이성구의 둘째부인 권씨(權氏)가 국구(國舅: 임금 장인) 한준겸(韓浚謙)의 생질녀였기 때문이다.(『인조실록』 11년 1월 9일) 한준겸은 선조의 <유교(遺敎) 7신(臣)>으로서, 인조의 왕비 인렬왕후(仁烈王后)의 아버지이고, 이성구의 처외삼촌이었다. 곧바로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형조 참판(刑曹參判)이 되었다.

1634년(인조 12) 경기 관찰사(觀察使)로 나갔다가, 홍문관 부제학·대사헌을 거쳐, 다시 도승지(都承旨)에 임명되었다. 1635년(인조 13) 이조 판서(吏曹判書)의 자리가 비게 되자, 인조는 그를 종2품상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승품(陞品)시키고 이조 판서에 임명하였는데, 성균관 지사(知事)를 겸임하였다.[비문] 1636년(인조 14)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전임되었다가 대사헌이 되었다. 그해 여름에 병조 판서(兵曹判書)가 되어, 체찰 부사(體察副使)를 겸임하였는데, 인사를 공정하게 하자, 모든 무관들이 기뻐하였다.

인조 후반기 활동

1636년(인조 14)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다. 청(淸)나라 태종(太宗)이 10만 명의 오랑캐 8기병(旗兵)을 이끌고 쳐들어왔는데, 사흘 만에 그 선봉대가 서울 근교에 진입하였다. 인조는 강화도(江華島)로 피난 가려고 하였으나 오랑캐 군사에게 길이 막히면서, 급히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다. 청나라 군사가 남한산성을 몇 겹으로 에워싸자, 성안의 사람들이 모두 사색(死色)이 되었는데, 병조 판서이성구가 혼자 평소와 다름없이 늠름하게 행동하니, 인조와 다른 사람들이 그를 믿고 안정을 되찾았다. 병조 판서이성구는 여러 장수들에게 1만 3천여 명의 군사를 동서남북으로 나누어 4방의 성벽을 지키도록 하는 한편, 큰 갓에 군복을 입고 수어장대(守禦將臺: 지금의 서장대)의 깃대 아래에 서서 “나는 분명히 여기에서 싸우다가 죽을 것이다.”라고 호령하였다.[비문]

당시 공서파(功西派)의 영의정김류(金瑬)와 이조 판서최명길(崔鳴吉) 등은 인조에게 청나라와 화해(和解)하여 8도 백성들로 하여금 전쟁의 화를 면하도록 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병조 판서이성구는 “왕의 군대[王師]가 아직 한 번도 적과 싸워보지 않았고, 또 외방의 진보(鎭堡)도 아직 온전한데 어떻게 서둘러 항복을 논의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며 반대하였다. 그러나 남한산성 안에 비축했던 군량미가 거의 떨어지자, 성안의 군사들이 빨리 화의를 하라며 두 차례나 크게 시위를 벌였다. 이때 주화파(主和派)의 최명길·김류 등과 척화파(斥和派)의 김상헌(金尙憲)·정온(鄭蘊) 등이 격렬하게 논쟁을 벌였는데, 이후에 병조 판서이성구가 주화파에 가세하면서, 척화파의 김상헌과 크게 논쟁하였다. 이에 영의정김류·병조 판서이성구·이조 판서최명길은 주화파 3인방으로 지목되어, 사림(士林)의 비난을 받게 되었다. 결국 주화파의 최명길과 김류가 청나라 태종과 담판하여 마침내 화의가 성립되었는데, 화의 조건은 해마다 막대한 세폐(歲幣)를 청나라에 바치고, 세자와 대군을 질자(質子: 볼모)로 심양(瀋陽)에 보내는 것이었다.

1637년(인조 15) 1월,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하고, 서울 도성으로 돌아왔다.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이 볼모로 청나라 심양(瀋陽)으로 떠나게 되었는데, 우의정이홍주(李弘胄)가 연로하다고 하여, 그 대신 이성구를 우의정으로 승진시켜 세자를 모시고 청나라로 가게 하였다. 당시 남한산성에서 청나라 오랑캐 군대와 싸웠던 문무관들은 대개 그 가족을 먼저 강화도로 피난 시켰는데, 청나라 섭정왕 도르곤에게 강화도가 함락당할 때, 그 군대에게 화를 당한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최명길은 청나라 측에 부탁하여 섭정왕 도르곤이 그 가족을 찾아 온전히 보호하였다. 그러나 이성구의 가족은 부인과 맏아들 내외와 두 딸이 모두 죽었을 뿐만 아니라, 막내아들은 오랑캐 군사에게 사로잡혀 심양(瀋陽)으로 끌려갔다. 청나라 오랑캐는 <병자호란> 때 조선에서 사로잡아간 사람들을 심양의 서문(西門) 밖의 시장에서 노예로 전매하였다. 소현세자 일행을 모시고 청나라 심양(瀋陽)에 갔던 우의정이성구는 노예 시장에서 그의 아들을 찾아낸 후, 몸값으로 은화 1천 5백 냥을 지불하고 집으로 데려 왔다.

인조는 귀국한 이성구를 좌의정에 임명하였으나, 노예 시장에서 거금의 몸값을 주고 아들을 찾아 온 것이 문제가 되면서 파직되었다. 당시 사헌부와 사간원의 양사(兩司)에서는 “ 국가가 황급할 때, 좌의정이성구가 병조 판서 겸 부체찰사(副體察使)의 직임을 맡아 결국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 그 죄를 면할 수 없습니다. 또 그 아들을 속환(贖還)할 때 은전 1천 5백 냥을 주고 데려왔는데, 이때부터 포로의 속가(贖價: 몸값)가 너무 비싸져서, 가난한 백성들이 사로잡혀간 가족을 속환(贖還)할 희망이 아주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지금 서울과 지방에서 이성구를 원망하고 욕하니, 파직하소서.” 라며 탄핵하였는데, 인조가 “이미 이성구를 파직하였으니, 다시 번거롭게 논죄하지 말라.”고 하였다.(『인조실록』 15년 7월 7일)

<병자호란> 당시 오랑캐에게 사로잡혀 간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략 4~5십 만 명으로 추산된다. 이들은 청나라에서 노예로 전매(轉買)되었는데, 농사를 지을 줄 모르던 만주족[여진족]이 조선 출신의 노예를 사서 농사를 지었다. 오랑캐에게 잡혀 간 우리나라 사람들을 사신 일행이 심양(瀋陽)으로 가서, 몸값[贖價]을 주고 사왔는데, 조선 출신 노예는 저자에서 대개 3~ 4십 냥에 전매되었다. 그러나 종실(宗室)이나 양반 출신의 몸값은 1백 5십 냥까지도 치솟았는데, 종실 출신 포로는 나라에서 돈을 지급하고 공속(公贖)하였으나, 가난한 사람들은 속전(贖錢)을 마련할 방법이 없었다. 우의정이성구가 막내아들을 속환(贖還)하는데 은전 1천 5백 냥을 지불하자, 조선 출신 포로의 몸값이 갑자기 껑충 뛰었으므로, 가난해서 속전(贖錢)을 마련하지 못하는 서울과 지방의 백성들이 모두 우의정이성구를 원망하였다.

좌의정에서 파직된 이성구는 서울의 동교(東郊)로 나가 초막집을 짓고 살았는데, 집이 작고 초라해서 천장에 머리가 닿고 봉당 자리에 겨우 몸만 들어갈 정도였다. 그러나 이성구는 태연하게 지내며 “밭 가운데 씀바귀나물은 ‘쓸개를 씹는’ 듯하고[田中苦菜猶嘗膽], 성곽 밖의 초막집은 ‘장작더미에 누운’ 격이로다[郭外茅茨當臥薪].’라는 시를 읊어 와신상담(臥薪嘗膽) 다시 재기하겠다는 뜻을 보였다. 이때 인조는 이성구를 한직(閒職)과 서반(西班)에 임명하여, 녹봉을 주었다. 1638년(인조 16) 돈녕부 영사(領事)에 임명되었다가, 중추부 영사(領事)를 거쳐서, 중추부 판사(判事)가 되었다.(『인조실록』 16년 12월 21일)

처음에 이성구의 집안도 아들의 몸값을 마련하기 어려워서, 제주도의 쌀 50석을 해남의 배를 이용하여 서울로 싣고 온 후, 시장에서 팔아 은화 1천 5백 냥을 마련하였다. 그런데 1639년(인조 17) 사헌부 장령홍무적(洪茂績)이 “해남 군수(海南郡守)조정립(趙廷立)은 해남의 관미(官米)를 배에 실어 이성구에게 뇌물로 바쳤습니다.”라고 이성구를 탄핵하는 한편, 해남 군수조정립을 체포하여 국문(鞠問)하였다. 그때 이성구는 “제주 목사심연(沈演)은 신의 처와 5촌간 입니다. 제주에서 잡미(雜米) 50석을 배에 실어서 보냈는데, 대간(臺諫)에서 해남군수조정립이 해남의 관미를 뇌물로 보냈다고 주장합니다. 조정립은 일찍이 신의 군관이었기 때문에, 해남의 배를 이용하여 제주도 쌀을 서울로 보내주었을 뿐입니다.”라고 변명하였다.(『인조실록』 17년 5월 13일)

1640년(인조 18) 사은사(謝恩使)로 파견되었는데, 조선은 청나라가 명나라를 치는데 원군을 보낼 수 없다고 통고하였다. 1641년(인조 19) 10월, 인조가 좌의정신경진(申景禛)과 우의정강석기(姜碩期)를 불러 복상(卜相: 재상을 뽑음)하도록 하였는데, 이성구(李聖求)를 영의정으로 천거하였으므로, 그를 영의정에 임명하였다. 영의정이성구는 병자호란 이후,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를 원만히 수습하고, 전후의 민생(民生)을 안정시키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우승지(右承旨)에 임명된 홍무적이 다시 영의정이성구를 공격하였다. 1642년(인조 20) 5월에 임금이 편전(便殿)에서 신하들을 인견(引見)할 때, 우방승지(右房承旨)홍무적이 입시(入侍)하려고 하였으나, 합문(闔門)에서 저지당하여 들어가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였는데, 승지홍무적은 영의정이성구가 물리친 것이라고 생각하여,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를 공격하였다. 그해 가을에 승지홍무적(洪茂績)이 영의정이성구가 사관(史官)에 부적당한 인물을 추천하였다며 공격하자, 이성구는 병을 핑계대고 사직하는 상소를 열 번이나 올렸는데, 마침내 체직되어 중추부 영사(領事)에 임명되었다.

그해 겨울에 청나라에서는 평안도 선천 부사(宣川府使)이계(李烓)가 명나라 상선(商船)과 밀무역하였다고 하여, 사자를 의주(義州)로 보내 이계를 체포하여 처형하였으며, 그 일에 관련된 재상까지 체포하여 심문하였는데, 다시 이계의 가족까지 처벌하려고 하자, 중추부 영사이성구가 적극 반대하였다. 이 사실을 안 청나라에서는 이성구가 역신(逆臣)을 두둔하였다고 하여 그의 관작(官爵)을 삭탈하고 유배형에 처하도록 요구하였으나, 인조가 애써 그의 죄를 말감(末減)하여 파직만 시켰다.[비문] 이성구는 파직된 후, 양화강(楊花江) 가에 나가 ‘만휴암(晩休庵)’이라는 서실(書室)을 짓고 책을 읽고 학문을 연구하였다. 그때 그는 가끔 이웃 사람과 어울려 술을 마시며, 향약(鄕約)을 권유하였는데 <서호향약기(西湖鄕約記)>를 만들어 실행하게 하였다. 1643년(인조 21) 다시 중추부 영사(領事)에 임명되었으나, 녹봉을 반납하고 출사하지 않았다. 그해 1월에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심양(瀋陽)에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영접을 나갔다가, 감기에 걸려서 자리에 누웠다. 1644(인조 22) 2월 3일, 천식으로 서울 집에서 돌아가니, 향년 61세였다.(『인조실록』 22년 2월 3일)

문집으로 『분사집(汾沙集)』이 남아 있다.

남한산성에서 47일간 주화파와 척화파의 논쟁

1636년(인조 14) 조선에 파견된 청나라 사신 용골대(龍骨大)는 청나라 칸(汗: 임금)을 ‘황제(皇帝)’라고 일컬으며, 우리 조정에 대하여 군신(君臣)의 예를 행하도록 요구하였다. 조정에서는 이들의 무리한 요구에 격노하였고, 격분한 조선 사람들이 청나라 사신 용골대를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용골대는 겨우 몸을 빼서 도망하였다. 이에 청나라 태종홍타이지는 조선을 정벌하여 항복을 받으려고 결심하였다. 그해 12월에 청나라 오랑캐 기병(旗兵) 10만 여명이 조선을 침략하였는데, 단 3일 만에 서울의 서쪽 근교까지 진출하였다. 이때 청나라 오랑캐 군사의 선봉대는 기병(騎兵) 수백 명에 불과하였으나, 서울로 진격해오는 형세가 마치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듯 하였으므로, 평안도와 함경도의 서북로(西北路)에 있는 여러 관방(關防)의 군사들이 이들을 막지 못하였다.[시장]

장차 강화도(江華島)로 피난 가려고 했던 인조는 먼저 원임 대신 윤방(尹昉)과 김상용(金尙容)으로 하여금 종묘사직의 신주(神主)를 받들고 빈궁(嬪宮)과 대군(大君)을 모시고 강화도로 가도록 하였으며, 뒤이어 어가(御駕)를 강화도로 출발시켰다. 그러나 청나라의 선봉부대가 이미 양천강(陽川江)을 차단해 강화도로 가는 길이 끊기면서, 인조는 남대문으로 돌아와 숭례문루(崇禮門樓)에 올라가서 머물렀는데, 신하들이 모두 당황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다. 이때 어가(御駕)가 나갈 길을 터야 한다고 주장한 병조판서이성구는 장사(將士) 5백 기(騎)를 파견하여 먼저 녹반현(綠礬峴)을 점거하는 한편, 오랑캐의 기병이 주둔하고 있는 양철교(良鐵郊)에 도성의 군사를 더 파견해서 수비를 강화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훈련대장신경진(申景禛)이 그렇게 할 경우에 도성의 시위(侍衛)가 허술해진다고 반대하면서, 그 계획은 시행되지 못하였다.[시장]

이때 이조 판서최명길(崔鳴吉)이 인조에게 자신이 직접 나서서 청나라 오랑캐 장수를 만나 화의(和議)를 논의할 테니, 그 사이에 빨리 남한산성(南漢山城) 쪽으로 옮겨가도록 청하였다. 청나라 오랑캐 진영으로 가서 사자(使者)를 인도하고 서울 도성으로 들어온 최명길은 장사(將士)들에게 당분간 청나라 군사들과 교전(交戰)하지 말도록 지시하였다. 우리 군사들은 양국의 화의(和議)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고, 준비한 화포와 화살을 쏘지 않았다. 그러나 청나라 8기병(旗兵) 가운데 몽고 병사들은 그 기회를 틈타 우리 군사들을 기습 공격하여 많은 사람을 죽이고 서울 도성으로 진격하였다. 어가(御駕)가 서울 도성을 빠져나가기도 전에 청나라 오랑캐 기병이 이미 사현(沙峴)을 넘어오자, 총융사(摠戎使)이서(李曙)와 호조 참판이시백(李時白) 등은 인조에게 서울 도성의 성문을 닫고 말을 달려 동쪽으로 빠져나가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직행하도록 청하였고, 병조 판서이성구는 훈련대장신경진에게 명하여 시위 군사를 이끌고 도성 밖으로 나가 진(陣)을 치고 어가 행렬의 후면에서 적을 방어하도록 하였다.[시장]

인조가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을 때, 체찰사(體察使)김류(金瑬)는 인조에게 “남한산성이 비록 험조(險阻)하기는 하나 형세가 고립되고 위태로워서 그대로 머무를 수 없으니, 내일 아침 일찍 과천(果川)을 거쳐 강화도로 들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아뢰었고, 병조 판서이성구도 “지금의 형편으로는 강화도로 옮겨가는 것이 가장 나은데, 지금 즉시 떠난다면 모래쯤에 그곳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대가(大駕)가 만일 강화도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강화도를 지키지 못할 것 같아서 신은 매우 걱정됩니다.” 라고 진언하니, 인조가 난색을 표하며 “내가 몸이 피로하여 다시 거둥할 수 없고, 또 중도에 낭패당할 우려가 있으니, 우선 남한산성을 굳게 지키고 있으면서 천천히 적과 강화(講和)하는 것이 가장 좋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인조는 이튿날 다시 강화도로 가고자 하였으므로, 남한산성을 나섰으나, 한겨울의 빙판길이 미끄러워 말이 넘어지고 자빠지면서 미처 산을 다 내려가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되돌아왔다.[시장]

이때 병조 판서이성구는 “비록 대가(大駕)가 강화도로 거둥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내일 세자(世子: 소현세자)로 하여금 수십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강화도로 달려가게 해야 마땅합니다.” 라고 하며 또 다시 강화도 행을 주장하였고, 영의정김류도 병조 판서이성구의 의견에 찬성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사관(史官)이도장(李道長)·김홍욱(金弘郁)·이지항(李之恒) 등이 인조에게 “남한산성을 굳게 지키겠다는 의논을 빨리 결정해서,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켜야 합니다.”라고 상소하니, 나약한 인조는 재빨리 그 세 사람의 주장을 받아들여, 남한산성을 지키겠다고 결정하였다. 하지만 병조 판서이성구가 “성상께서 미복(微服) 차림으로 산성을 나가 호남 지방이나 영남 지방 가운데 한 곳을 골라 가셔서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한다면, 신은 목숨을 바쳐서 이곳을 지키겠습니다.”라고 다시 진언하자, 인조는 “부형(父兄)과 백관들이 모두 여기에 있는데, 차마 나 혼자 산성을 빠져나가지 못하겠다.”고 울면서 거절하였다. 병조 판서이성구가 비밀리에 모두 세 차례나 계책을 제시하였으나, 인조가 모두 거절하면서 결국 시행되지 못하였다.[시장]

청나라 태종홍타이지가 도착하면서 오랑캐 군사는 날로 불어났으나, 남한산성에 고립된 인조에게는 8도(道)의 근왕병(勤王兵)이 오지 않았으므로, 성중(城中)의 인심이 흉흉해졌다. 그러나 병조 판서이성구는 동요하지 않았고 늠름한 행동에 말투가 평상시와 같았으므로, 사람들이 그 기국과 도량에 감복하여 그를 믿고 의지하였다. 병조 판서이성구는 남한산성을 철통같이 방어하기 위하여, 여러 장수들에게 산성의 성벽을 동서남북으로 나누어 맡기고, 군사 1만 3천여 명도 동서남북으로 나누어 방어하도록 하였다. 그는 붉은 갓에 군복을 입고 홍색 띠를 두른 채, 수어장대(守禦將臺: 지금 남한산성의 서장대)에 올라가 큰 대장 깃발 아래에 우뚝 서서 장병들에게 호령하였고, 두 주먹을 움켜쥐고 “나는 싸우다가, 분명히 여기에서 죽으려고 합니다.”라고 맹세하였다. 처음에 병조 판서이성구는 인조에게 “예로부터 나라를 그르치는 것은 언제나 강화(講和)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사방의 근왕병(勤王兵)을 불러들여 적과 한번 혈전(血戰)을 치러서 그들로 하여금 두려운 마음이 들게 한 다음에 화의(和議)를 해야 화의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적이 쳐들어오는데 싸우지도 않고 계속 화의만 거론하다가, 끝내 군사적 굴욕을 당하게 된다면 장차 어찌되겠습니까.” 라며 화의에 반대하였다.[시장]

반면에 영의정김류(金瑬)와 이조 판서최명길(崔鳴吉)은 인조 일행이 남한산성에서 청나라 오랑캐 군사들에게 포위되었을 때부터 8도의 백성들이 병화(兵禍)를 입지 않으려면 청나라와 빨리 화의(和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것이 이른바 주화론(主和論)이다. 그러나 주화론은 조선이 청나라에 항복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으므로 병조 판서이성구는 이에 반대하였다. 그는 “왕사(王師: 왕의 군대)가 한 번도 적과 교전해 보지 않았고, 8도(道)의 성보(城堡)도 아직 건재한데, 어찌 서둘러 항복하자고 의논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으며, 인조도 “병조 판서의 말이 옳다.”고 하였다. 이에 병조 판서이성구는 인조를 받들고 남한산성에서 군사들을 독려하며 오랑캐 군사와 오랫동안 공방전을 벌였다. 하지만 우리 군사들이 모두 지치고 군량미도 거의 떨어지게 되자, 최명길과 김류 등은 더욱 강력하게 주화론을 주장하였으나, 청류(淸流) 유학자 출신의 관료들은 죽어도 오랑캐에게 머리를 숙일 수 없다며 화해에 반대하였는데, 이것이 이른바 척화론(斥和論)이다. 척화론의 대표적인 인물은 청서파(淸西派)의 김상헌(金尙憲)과 정온(鄭蘊) 등이었다.

남한산성에서 우리 군사 1만 3천여 명으로 청나라 군사 10여 만 명과 싸운다는 것은 처음부터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이길 수 없는 전투였다. 8도(道)의 근왕병(勤王兵)이 남한산성으로 와서 지원해 주기를 고대하였으나, 지방의 근왕병은 오랑캐 군사에게 길이 막혀 끝내 오지 못하였다. 청나라 군사들이 남한산성을 몇 겹으로 포위하고 송책(松柵: 소나무 울타리)을 만들어 출입을 통제하였기 때문에, 남한산성의 암문(暗門: 비밀 통로)도 무용지물이 되었으므로, 외부의 물자가 전혀 산성 안으로 반입되지 못하여, 전쟁 물자와 군량미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때 남한산성 안에 주둔하고 있던 각 진영(陣營)의 군사들이 두 차례나 행궁(行宮: 임금의 궁) 앞에 모여, 빨리 청나라와 화의를 맺으라고 촉구하며 대규모 시위를 하였다. 시위에 참가한 군사들은 공서파(功西派)의 각 군영(軍營)에 소속되어 있었으므로, 공서파의 이서(李曙)·신경진(申景禛)·이시백(李時白) 등이 그 시위를 묵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병조 판서이성구는 원래 청서파(淸西派)였으나, 당시 조선의 군사 상황을 고려할 때, 공서파의 최명길·김류의 주장을 따를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주화파의 주장은 현실적이었으나, 척화파의 주장은 비현실적인 이상론이었기 때문이다.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47일 동안 버티면서 오랑캐 군사와 싸웠으나, 강화도(江華島)가 함락되어 세자빈(世子嬪)과 대군(大君)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주화파 최명길·김류·이성구의 주장에 따라 청나라와 화의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조 판서최명길이 항복하는 국서(國書)를 가지고 장차 청나라 진영으로 가게 되자, 대신들이 모여서 그 국서를 검토하였는데, 그 내용을 살펴 본 예조 판서김상헌이 국서를 빼앗아 찢어버리고 주저앉아 통곡하였다. 이때 병조 판서이성구가 일어나 예조 판서김상헌을 부축하면서 “이 오랑캐를 쳐부술 수 있겠습니까.”하고 묻자, 김상헌은 “불가능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성구가 “이 산성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하고 또 묻자, 김상헌은 “불가능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성구가 “적을 쳐부수지 못하고 산성을 지킬 수도 없다면, 장차 군상(君上)을 어디에 모시겠다는 말입니까. 종묘사직이 망하는 것은 필부(匹夫)의 죽음과 다르거니와, 필부의 죽음도 쉬운 일이 아닌데, 더구나 종묘사직이 망하는 일이겠습니까.”라고 하니, 김상헌이 노하여 “그대들은 바로 자기 몸과 처자를 보전하려고 하는 것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이성구는 “후일에 두고 보세요. 누가 제 몸과 처자를 보전하려고 하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시장]

당시 주화론을 주장하는 3인방이 영의정김류·병조 판서이성구·이조 판서최명길의 세 사람이라는 소문이 나면서, 청서파(淸西派)를 적극 지지하는 조정의 신진(新進) 사류(士類)들과 지방의 유림(儒林)에서 병조 판서이성구를 욕하고 비판하였다. 심지어 선조의 부마 동양위(東陽尉)신익성(申翊聖: 신립의 아들)은 병조 판서이성구가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눈을 부릅뜨고 칼을 어루만지며 “대감이 어찌 감히 김상헌 대감에게 항의할 수 있단 말입니까.”라며 위협하였다. 이에 병조 판서이성구는 “그대가 우선 기거주(起居注)의 기록을 한번 읽어보는 게 좋겠소.”라고 태연하게 대답하였다. 기거주(起居注)는 임금의 일상생활과 대화록을 빠짐없이 기록한 일기를 말한다. 이후, 인조의 기거주를 읽어보고 그 실상을 알게 된 동양위신익성은 사과의 글을 지어 병조 판서이성구에게 보냈고, 그 기록을 문집에 실어서 후세에 남겼다.[시장]

1637년(인조 15) 청나라 태종의 명령을 받은 섭정왕(攝政王) 도르곤이 3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삼판선(三板船)을 만들어 강화도를 점령하고, 세자빈(世子嬪) 강씨(姜氏)와 봉림대군(鳳林大君) 등 많은 사람을 포로로 붙잡았다. 이 소식을 들은 인조는 화의를 결정한 후, 비로소 남한산성을 나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하였다. 어가(御駕)를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가서 청나라 오랑캐 군사와 싸웠던 문무관 10명 가운데 7, 8명은 그 가족을 먼저 강화도로 피난 시켰는데, 강화도가 함락되었을 때, 몽고 8기병에게 수많은 사람들이 화를 당하였다. 병조 판서이성구의 가족들도 강화도로 피난 갔다가, 집안사람들이 화를 당하여, 부인과 맏아들 내외와 두 딸이 모두 순절하였다. 이때 막내아들은 청나라 오랑캐 군사에게 사로잡혀 심양(瀋陽)으로 끌려갔다. 이때 영의정김류가 예조 판서김상헌에게 “병조 판서이성구가 당한 가족의 비극을 보면, 지난날 대감이 ‘그대들은 자기 처자를 보전하려고 하는 것일 뿐이다’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이성구는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려.”하는 뼈있는 농담을 던졌다.[시장]

성품과 일화

풍채가 아름답고 체구가 훤칠하여, 조복(朝服)을 입고 정색을 하면, 여러 관료들이 그를 두려워하고 공경하였다. 성품이 너그럽고 온화하면서도 점잖고 절제가 있었으므로, 아무리 가까운 관계라 하더라도 함부로 그에게 청탁할 수가 없었다. 또한 그는 목소리를 높이거나 얼굴빛을 붉히며 남을 대하지 않았지만, 막부(幕府)의 장수나 종사관(從事官)들이 모두 그에게 승복하여 고개를 숙이고 항상 등골에서 땀을 흘렸다. 오랫동안 정승과 판서의 자리에 있었으나, 주변 사람들을 깨끗하게 관리하였기 때문에 그 집 대문 앞에 뇌물 꾸러미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 집 골목길에도 사사로이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요로에 있는 사람이나 권세가 있는 사람과는 접촉하는 일이 드물었으나, 벼슬에서 물러나 강호(江湖)에 우거할 때, 그의 집에 손님이 지나가다가 들르면, 반드시 술상을 차려 공손히 대접하였으며, 대화할 때에는 항상 얼굴에 화기가 넘쳐흘렀다.[비문]

이성구(李聖求)와 이민구(李敏求) 형제는 어렸을 때, 할머니 유씨(柳氏: 조부 이희검의 둘째부인)에게 「천자문(千字文)」을 배웠는데, 그때 벌써 어린 형제가 글자를 맞추어 간단한 문장을 지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할머니에게 『소학(小學)』을 배우고 나서, 비로소 가숙(家塾: 집안 서당)에서 아버지 이수광(李晬光)에게 수학하였는데, 형 이성구는 유학에 정통하였고, 동생 이민구는 문학에 대성하였다. 형 이성구는 나이 20세 때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고, 25세 때 별시(別試) 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동생 이민구는 나이 21세 때 사마시(司馬試) 생원(生員)·진사(進士) 양과에 합격하였는데, 진사과에 장원 급제하였으며, 24세 때 치른 증광(增廣) 문과(文科)에서도 1등으로 장원 급제하였다. 형 이성구는 도승지에 발탁되어, 이조 판서·병조 판서를 거쳐, 좌의정·영의정이 되었고, 동생 이민구는 이조 참판이 되었다가, 홍문관 부제학(副提學)·대사성(大司成)을 거쳐, 도승지·예조 참판을 지냈다. 이성구·이민구 형제는 아버지 지봉(芝峯)이수광(李晬光)의 학통을 이어받았는데, 형 이성구는 이수광의 사상을 정치에 반영하려고 노력하였으며, 동생 이민구는 그 학통을 계승 발전시켜서, 4천여 권의 책을 썼으나, 병화에 모두 소실되고, 『동주집(東洲集)』·『독사수필(讀史隨筆)』·『간언귀감(諫言龜鑑)』 등이 남아 있다.

이성구는 1641년(인조 19) 10월 영의정에 임명되었는데, 그는 국정의 대체(大體)를 원만하게 처리하는 데에만 힘쓰고, 세목(細目)을 깊이 따져서 캐내어 규명하지 않았으며, 옥사(獄事)를 다스릴 때에는 형률(刑律)을 너그럽게 적용하여 죄를 가볍게 해주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국가의 대사(大事)를 처리할 때에는 자기의 주관을 확실히 내세워 흔들리지 않고 소신대로 처리하였다. 의주(義州) 사람 최효일(崔孝一)이 명나라에 귀순했을 때, 의주 부윤황일호(黃一皓)가 그 가족의 뒤를 돌보아주었다고 하여, 청나라 장수 용골대(龍骨大)가 황일호에게 형벌을 가하려고 하였다. 이때 영의정이성구가 완강히 거부하자, 청나라 장수 용골대가 화를 내며, “정말로 그렇게 나온다면 정승 노릇은 사흘도 못할 것입니다.”라며 협박하였다. 용골대의 의지가 확고한 것을 본 좌의정신경진(申景禛)은 영의정이성구에게 항변하지 말도록 만류하였으나, 영의정이성구는 “비록 하루 밖에 정승 노릇을 못한다고 하더라도 무죄한 사람을 사지(死地)에 몰아넣는 것을 보고 어떻게 구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의주 부윤황일호를 애써 보호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용골대는 기어이 황일호를 잡아다가 처형하였다. [비문]

이성구가 영의정으로 재임하던 시기는 명청 교체기였으므로, 온갖 위기를 겪었을 뿐 아니라, 좌우가 서로 모순되어 하는 일마다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에 어떤 친구가 영의정이성구에게 지금부터 뜻을 조금 낮추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일을 처리하도록 충고하였다. 그러나 그는 “일을 하는 것은 나에게 달려 있지만, 일이 성사되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는데. 어떻게 소신을 굽혀서 시대에 영합할 수가 있겠는가.”라며 탄식하였다. 이후, 인조는 결국 용골대의 압력에 의하여, 영의정이성구를 중추부 영사(領事)로 좌천시켰다가, 끝내 파직하였다. 그러나 영의정이시백(李時白: 이귀의 아들)은 이성구에 대하여 “<인조반정> 이후 인조가 발탁한 정승 중에서 인물됨이 가장 으뜸이다.”라고 평하였다.

만년에 관직에서 물러난 이성구는 양화강(楊花江) 가에 지은 ‘만휴암(晩休庵)’에 우거(寓居)하며, 책을 읽고 학문을 연구하였다. 그는 “수십 년 동안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 있다가, 늘그막에 한적한 생활을 하게 되니, 마음이 매우 흡족하다.”고 하였는데, 남여(藍輿)를 타거나 죽장(竹杖)을 짚고 강가를 소요(逍遙)하며 자적(自適)하였다. 어느 날 강가에 지은 집에서 불이 났으나, 이성구는 밭 가운데 앉아 “술항아리는 아무 탈이 없겠지.” 라고 하면서, 이웃 에게 술을 따라 마시라고 권하였는데, 집이 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아무런 미련을 두지 않았다.[비문] 1644(인조 22) 2월 3일에 이성구가 돌아갔는데, 운명할 때에 하늘 가득히 백기(白氣)가 피어올라 흩어지지 않았으며, 그 빛이 밤에 땅바닥이 환하게 비추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비문]

묘소와 후손

시호는 정숙(貞肅)이다. 묘소는 경기 양주(楊州) 장흥리(長興里)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그의 동생인 동주(東洲)이민구(李敏求)가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이 남아있다.[비문] 백호(白湖)윤휴(尹鑴)가 지은 이성구(李聖求)의 시장(諡狀)이 『백호전서(白湖全書)』에 실려 있고,[『백호전서』 22권-시장(諡狀)], 또 미수(眉叟)허목(許穆)이 지은 이성구(李聖求)의 묘지명(墓誌銘)이 『기언별집(記言別集)』에 실려 있다.[『기언별집』 23권 구묘문(丘墓文)]

첫째부인 파주윤씨(坡州尹氏)는 전라도 병마사(兵馬使)윤열(尹說)의 딸인데, 일찍 돌아가서 자녀가 없었다. 이성구의 장모는 외동딸뿐이고 다른 가족이 없었으므로, 그는 첫째부인 윤씨가 돌아간 뒤에도 장모를 이웃집에 모셔두고 평생 돌보았다. 둘째부인 안동권씨(安東權氏)는 의정부 사인(舍人)권흔(權昕: 한준겸의 매부)의 딸이다. 권씨는 5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 이상규(李尙揆)는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아내와 함께 강화도에서 순절(殉節)하였고, 차남 이동규(李同揆)는 유일(遺逸)로서 천거되어, 승지(承旨)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3남 이당규(李堂揆)는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참판(吏曹參判)·홍문관 부제학(副提學)을 지냈고, 4남 이석규(李碩揆)는 좌랑(佐郞)을 지냈으며, 5남 이태규(李台揆)는 정랑(正郞)을 지냈다. 장녀는 예조 판서이일상(李一相: 영의정 이정구 손자)에게, 차녀는 급제 한오상(韓五相: 참찬 한준의 손자)에게 각각 시집갔는데,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모두 강화도에서 순절(殉節)하였다. 측실에 1남 1녀가 있는데, 아들은 이선규(李善揆)이고, 딸은 윤두종(尹斗宗)에게 시집갔다.[비문] 손자 이현기(李玄紀: 이동규 아들)는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성(大司成)을 지냈고, 손자 이현석(李玄錫: 이당규 아들)은 문과에 급제하여, 판서(判書)를 지냈으며, 손자 이현조(李玄祚: 이석규 아들)는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지냈다.

<병자호란> 때 이성구의 온 가족이 강화도에 피난 가서, 함께 모여 있다가, 청나라 오랑캐 군사가 강화도를 점령하자, 둘째부인 권씨와 장남 이상규 내외와 장녀와 차녀가 모두 화를 당하였고, 막내 아들은 사로잡혀 청나라 심양(瀋陽)으로 끌려갔다. 부인 권씨와 장녀·차녀와 맏며느리 구씨(具氏: 이상규 처)가 모두 정절을 지키려고 순절하였으므로, 나라에서 정려(旌閭)하여, 그 집에 정문(旌門)을 세워주었다.[선원보]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편]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동주집(東洲集)』
  • 『백호집(白湖集)』
  • 『기언별집(記言別集)』
  • 『국조보감(國朝寶鑑)』
  • 『동춘당집(同春堂集)』
  • 『명재유고(明齋遺稿)』
  • 『속잡록(續雜錄)』
  • 『송자대전(宋子大全)』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월사집(月沙集),』
  • 『청음집(淸陰集)』
  • 『포저집(浦渚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