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형(李尙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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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85년(선조 18)∼1645년(인조 23) = 61세]. 조선 후기 인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홍문관 교리(校理)이고, 증직(贈職)은 이조 판서이다. 자(字)는 덕선(德先)이며, 호(號)는 천묵재(天默齋)·규봉(圭峯)·환성(喚醒)이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전라도 남원(南原) 둔덕리(屯德里)이다. 아버지는 이욱(李昱)이고, 어머니 장흥임씨(長興任氏)는 사인(士人) 임대영(任大英)의 딸이다. 효령대군(孝寧大君)의 7대손이고, 대사헌이목(李楘)의 8촌 동생이다. 사계(沙溪)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고, 박이항(朴以恒)과 절친한 사이였다.

인조 시대 활동

1612년(광해군 4) 사마시(司馬試)의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8세였다.[『국조방목(國朝榜目)』] 1625년(인조 3)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41세였다.[『국조방목(國朝榜目)』] 바로 성균관 학론(學論)에 보임되었는데,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 인조가 강화도로 피난을 가자, 서울에 남아서 유생들에게 격문을 돌리고 오섬(吳暹)·김여각(金汝鈺)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1628년(인조 6) 겨울 성균관 학록(學錄)·학정(學正)으로 차례로 승진하였는데, 그가 경학(經學)에 밝다고 하여 승정원 가주서(假注書: 임시 주서)에 임명하여, 특별히 경연(經筵)에 참여시켰다. 인조에게 이상형(李尙馨)이 『서경(書經)』과 『주역(周易)』의 난해한 부문을 막힘없이 시강(侍講)하자, 인조가 그의 집안 내력을 물어보며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비문]

1629년(인조 7) 1월, 세자시강원 설서(說書)에 임명되었고, 그해 5월, 사서(司書)로 승진되었으며, 그해 12월, 예조 좌랑(禮曹佐郞)이 되었다. 1630년(인조 8) 사간원 정언(正言)을 거쳐, 세자시강원 전적(典籍)이 되었고, 병조의 좌랑과 정랑(正郞)을 거쳐, 그해 7월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으며, 10월에 성균관 직강(直講)으로 전임되었다가, 11월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었는데, 모두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1631년(인조 9) 2월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자원하여 전라도 옥과 현감(玉果縣監)으로 나갔다. 그해 7월 부인 임씨(任氏)가 돌아갔는데, 그때 이상형이 47세였다. 1633년(인조 11) 7월 동당(東堂)의 시관(試官)이 되어 영암(靈巖)에서 시취(試取)하였고, 8월에 감시(監試)의 시관(試官)이 되어 옥구(沃溝)에서 시취(試取)하였다.[연보]

1634년(인조 12) 5월 어머니 임씨(任氏)가 돌아가자 여묘살이를 하였는데, 1635년(인조 13) 홍문록(弘文錄)에 선임되었다. 1636년(인조 14) 9월 탈상 한 뒤, 그해 10월에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에 임명되었다. 그해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인조가 황급하게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난하였는데, 이상형은 홍문관에 입직(入直)하다가,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게 되었다. 그때 서책을 실은 말을 잃어버리면서 그가 지은 원고가 많이 유실되었다. 그는 남한산성에서 싸움을 독려하는 독전(督戰) 어사(御使)에 임명되었는데, “위기에 임하여 구차스럽게 이를 모면하려 하는 것은 신하의 도리가 아니다.”라며 날마다 성(城) 위에 올라가 군사를 독려하였고, 차자(箚子)를 올려 성 위에서 머뭇거리고 싸우지 않는 여러 장수들의 죄를 논하였다.[행장] 주화파와 척화파가 싸울 때 이상형은 척화파 김상헌(金尙憲)을 지지하고 주화파 최명길(崔鳴吉)·김류(金瑬)를 공격하였다.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47일간을 버티다가 강화도가 함락되자, 결국 삼전도(三田渡)에 내려가 청나라 태종(太宗)에게 항복하였는데, 그 모습을 본 이상형은 크게 실망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 남원으로 돌아와 은거하려고 결심하였다.[비문]

1637년(인조 15) 2월 병을 핑계대고 남원으로 돌아와서 쉬었는데, 그해 6월 홍문관 수찬(修撰)에 임명되었다, 서울로 올라간 그는 강화도를 지키지 못한 강화 유수(江華留守)장신(張紳)·검찰사(檢察使)김경징(金慶徵)·검찰 부사이민구(李敏求)를 논죄하는 한편, 사헌부와 사간원의 양사(兩司)가 권신(權臣)의 눈치를 보며 말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김경징의 아버지 김류(金瑬), 장신의 형 장유(張維), 이민구의 형 이성구(李聖求)는 모두 인조반정의 1등 공신으로서 당시 실권자였기 때문이다. 이상형은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병을 핑계대고 낙향하였다. 그해 7월에 홍문관 수찬(修撰)에 임명되었고, 그해 8월에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되었으며, 그해 12월에 또 홍문관 수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연보]

1638년(인조 16) 1월 홍문관 교리(校理), 3월에 사헌부 장령(掌令), 4월에 홍문관 부수찬, 7월에 홍문관 부교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병을 핑계대고 부임하지 않았다. 그해 11월에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에 임명되었는데,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청나라 심양(瀋陽)의 질자관(質子館)에 잡혀가 있었기 때문에 감히 병이라고 핑계대지 못하고 아픈 몸을 이끌고 심양의 질자관으로 가서 직무를 보려고 하자, 조정에서 그 처지를 딱하게 여겨 마침내 체임(遞任)시켰다.[비문]

1639년(인조 17) 1월에 사간원 사간(司諫), 3월에 홍문관 교리(校理)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는데, 나라에서 한재(旱災)에 대한 구언(求言)을 하자, 제향(祭享)과 병정(兵政)이 국가의 큰일이라고 진언하였다. 그해 5월에 사헌부 장령, 6월에 사간원 사간, 7월에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그해 12월에는 방종한 풍속을 교화시키기 위하여, 남원 지방의 향약(鄕約)을 기대승(奇大升)의 광주(光州) 향약에 따라 수정하였다.[행장]

1640년(인조 18) 2월에 홍문관 교리, 3월에 사간원 사간, 4월에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그해 7월에 사헌부 집의(執義), 10월에 홍문관 교리에 임명하였으나 모두 병을 핑계대고 사양하였다. 1641년(인조 19) 1월 중풍(中風)을 맞았는데, 그때 나이가 57세였다. 그해 2월에 사헌부 집의(執義)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양하였다. 이상형이 중풍을 앓는다는 소식이 조정에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더 이상 그를 벼슬에 임명하지 않았다. 이상형은 그 뒤 몇 년 동안 중풍을 앓다가, 1645년(인조 23년) 4월 4일 전라도 남원(南原) 둔덕리(屯德里)에 있는 운교(雲橋)의 고향집에서 돌아갔는데, 향년 61세였다.

문집으로 『천묵유고(天默遺稿)』가 남아 있다.

성품과 일화

풍채가 중후(重厚)하고 침착하였고, 성품이 순박하고 너그러웠으며, 행동이 겸손하고 온순하였다. 사람을 상대할 때 남에게 모질게 대하지 못하였고, 남보다 잘난 체 하지 않았다. 평상시에는 말이 없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으나, 나라의 대사(大事)를 다스릴 때에는 대의(大義)에 의하여 용단(勇斷)을 내리고 민첩하게 일을 처리하였는데,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를 고려하지 않았다. 나라의 정사를 논할 때에는 반드시 하늘의 도리를 밝혀 사람의 욕망을 막았으며, 존비(尊卑)의 위계를 정하고 기강(紀綱)을 세우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다. 호란(胡亂)이 일어났을 때, 비분강개하여 여러 번 주화론(主和論)을 배척하는 상소를 올려서 춘추(春秋)의 대의(大義)를 밝혔으나, 끝내 그 뜻을 펴지 못하였다. 이에 이상형은 결연히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물러나, 벼슬을 사양하고 몸을 숨겼다. 이상형은 겉모습을 보면, 온화한 군자였으나, 속마음은 강직한 충신이었다. 그가 벼슬에 나아가고 사양한 것과 그가 상소하고 침묵한 것이 각각 그 알맞은 때에 이루어졌는데, 이것이야말로 바로 『역경(易經)』에서 말하는 알맞은 때와 거의 부합하였다.[행장]

이상형은 1585년(선조 18) 4월 12일 전라도 순천부(順天府) 각천리(桷泉里)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 이혼(李渾)때 부터 전라도 남원부 둔덕리(屯德里)로 옮겨와 살았는데, 어머니 임씨(任氏)가 임신한 몸으로 순천에 있는 농장에 나갔다가, 그 곳에서 그를 낳았다고 한다. 그 부근에 타원형으로 우뚝 솟은 규봉(圭峯)이 있었는데, 이상형은 자신이 그 산에 감응하여 태어났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호(號)를 ‘규봉(圭峯)’이라고 하였다. 그는 어린아이 때 잠이 많아서, 이름을 여러 번 불러야 겨우 잠을 깨울 수 있었으므로, 집안사람들이 그를 ‘환성(喚醒)’이라고 불렀으며, 또 말을 배울 때에는 말을 더듬거려서 ‘천묵(天默)’이라고 불렀다. 그 후, 이상형은 어눌한 자신을 ‘천묵재(天默齎)’라고 불렀는데,[행장] 그는 비록 말이 어눌하였으나, 논지(論旨)가 분명하고 논리가 질서 정연하였다. 경연(經筵)에서 선조가 『서경』과 『주역』을 공부할 때, 당대 석학(碩學)의 강론을 듣고도 이해하지 못하다가, 이상형의 강론을 듣고 비로소 어려운 역학(易學)의 이론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한다.[비문]

1597년(선조 30) 13세 때부터 그는 가까운 친척인 활계(活溪)이대유(李大㽕)에게 4서(書) 5경(經)을 배웠다. 이상형은 어린 나이에도 『주역(周易)』을 공부할 때, 역학(易學)의 근본 이론을 이해하려고 스승 이대유에게 의혹이 풀릴 때까지 질문하였으며, 열심히 탐구하였다. 이에 이대유는 “이 아이는 반드시 학문에 대성(大成)할 것이다. 단순히 학문이 과거 공부에만 그치지 않을 것이다.” 라며 항상 감탄하였다. 1604년(선조 37) 20세 때에 선산임씨(善山林氏)와 혼인하였고, 이듬해 1605년(선조 38) 21세 때 진사시(進士試)의 초시(初試)에 합격하였다. 1608년(선조 41) 24세 때 아버지 이욱(李昱)이 돌아가서 여묘살이를 하였는데, 그때 선조가 승하하고, 스승 이대유도 세상을 떠났다. 1610년(광해군 2) 탈상하고, 1612년(광해군 4) 나이 28세 때,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였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자,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동방(同榜)의 친구 6인과 함께 스스로를 ‘칠광(七狂)’이라 일컬으며 호남 지방의 명산(名山)을 찾아다니며 방랑하다가, 사계(沙溪)김장생(金長生)을 찾아가 그 문하(門下)에서 예학(禮學)을 공부하였다. 이에 그는 예학과 역학(易學)에 정통하였을 뿐만 아니라, 제자백가(諸子百家)와 음양(陰陽) 지리(地理)까지 널리 통달하였다.[비문]

1623년 3월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다시 과거에 응시하였다. 1625년(인조 3) 나이 41세 때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성균관(成均館) 학론(學論)에 보임되었다. 1628년(인조 6) 나이 44세 때 성균관 학정(學正)으로 승진하였는데, 그가 경학(經學)에 밝다고 하여 승정원 가주서(假注書)에 임명되어, 경연(經筵)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때 경연관(經筵官) 정경세(鄭經世)와 장유(張維) 등이 『서경(書經)』을 시강(侍講)하였는데, 난해한 부분이 많았으므로, 인조는 당대 석학(碩學)의 강론을 듣고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었다. 이에 두 사람은 함께 성균관 사유(師儒) 가운데 경학(經學)에 가장 정통하다는 이상형(李尙馨)을 천거하였다. 인조는 즉시 이상형을 경연(經筵)에 참여시켜 시강(侍講)할 것을 명령하였다. 인조가 『서경(書經)』의 기삼백(朞三百)과 선기옥형(璿璣玉衡)의 주석과 조석(潮汐)의 이치에 대하여 묻고, 이어 『주역(周易)』 등 다른 경전의 의문스러운 부문을 이것저것 묻자, 이상형은 임금이 묻는 대로 막힘없이 대답하고, 그 해석까지 무난하게 하였다. 학문에 열의를 가진 인조는 이상형에게 어좌(御座)에 가까이 다가오도록 한 후, 귀를 기울이고 들으며 기쁜 표정을 지었다. 경연은 저녁때가 되어서 파하였는데, 이상형과 경연관들이 물러간 뒤에, 인조가 중사(中使: 환관)를 보내 그의 가문내력과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물어보도록 하였다. 당시 조정의 유신들은 이를 특별한 대우라고 여겨 모두 이상형을 부러워하였다.[비문]

묘소와 후손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묘소는 전라도 임실현(任實縣) 운암(雲巖) 종산(鍾山)의 산기슭에 있는데, 신독재(愼獨齋)김집(金集)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비문] 방두천(房斗天)이 지은 행장(行狀)과 윤정현(尹定鉉)이 지은 시장(諡狀)이 남아 있다.[『천묵유고(天默遺稿)』 5권 부록] 죽은 다음에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고, 전라도 남원의 요계서원(蓼溪書院)에 제향되었다.

부인 선산임씨(善山林氏)는 예빈시(禮賓寺) 부정(副正)임극립(林克立)의 딸인데, 자녀는 6남 3녀를 낳았다. 아들은 이문헌(李文獻)·이문원(李文源)·이문재(李文載)·이문영(李文英)·이문계(李文啓)·이문귀(李文貴)이고, 장녀는 유학 윤지(尹砥)에게, 차녀는 유학 양윤거(楊雲擧)에게, 3녀는 유학 오첨희(吳添喜)에게 각각 시집갔는데, 모두가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들이다. 측실에서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이문중(李文中)이고, 딸은 최수해(崔壽海)의 처이다. 그 중에서 3남 이문재는 아버지 이상형의 뒤를 이어서 이름난 유학자가 되었는데, 생원(生員)으로서 참봉(參奉)을 지냈고, 『석동유고(石洞遺稿)』를 남겼다. 아버지 이상형은 사계(沙溪)김장생(金長生)의 제자이고, 아들 이문재는 신독재(愼獨齋)김집(金集: 김장생의 아들)의 문인이고, 방두천(房斗天)은 그 문하생이다. 그러므로 이문재가 스승 신독재김집을 찾아가 아버지 이상형의 묘갈명(墓碣銘)을 간청하였고, 또 동생 이문영을 제자 방두천에게 보내 아버지의 행장(行狀)을 짓도록 부탁하였던 것이다.[『천묵유고(天默遺稿)』 5권 부록]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천묵유고(天默遺稿)』
  • 『석동유고(石洞遺稿)』
  • 『사계전서(沙溪全書)』
  •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한수재집(寒水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