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질(李尙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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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97년(선조 30)∼1635년(인조 13) = 39세]. 조선 후기 인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이조 좌랑(吏曹佐郞)·홍문관 교리(校理)이다. 자(字)는 자문(子文)이고, 호(號)는 가주(家州)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동복 현감(仝福縣監)이진(李瑱)이고, 어머니 함안이씨(咸安李氏)는 생원 이성(李晟)의 딸이다. 완원군(完原君: 성종의 제 3왕자)의 5대손이고, 수몽(守夢)정엽(鄭曄)의 사위이다. 석주(石洲)권필(權韠)의 문인이고, 동명(東溟)정두경(鄭斗卿)과 ‘의형제(義兄弟)’를 맺은 막역한 사이였다.

광해군 때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으나, 춘천의 전리(田里)에 은거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문과(文科)에 장원 급제하여 사간원 장령(掌令)에 임명되었고,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수찬(修撰)을 거쳐, 홍문관 교리(校理)가 되었다. 인조가 생부인 정원군(定遠君)을 원종(元宗)으로 추숭하려고 할 때, 불가한 일이라고 극간하다가 함경도 종성(鐘城)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사면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 철령(鐵嶺)을 넘다가 쓰러져서 회양(淮陽)의 객사에서 돌아갔다.

인조 시대 활동

1616년(광해군 8)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0세였다.[『국조방목(國朝榜目)』] 그러나 광해군의 난정으로 인하여 세상에 뜻을 잃고 춘천의 산중으로 들어가 농사를 지었다. 1623년 3월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비로소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공부를 하며 대과(大科)를 보았으나, 거듭 실패하였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음직(蔭職)으로 나갔는데, 1625년(인조 3) 의금부 도사(都事)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1626년(인조 4)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세마(洗馬)가 되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후금(後金)의 오랑캐 군사를 피하여 인조가 강화도(江華島)로 파천(播遷)하였다. 이때 소현세자(昭顯世子)를 호위하면서, 세자가 특별히 우대하였다. 화친(和親) 조약이 이루어진 후, 후금(後金)의 오랑캐 군사가 돌아가자, 조정으로 들어와 익위사의 시직(侍直)과 위솔(衛率) 등으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과거를 보기 위하여 익위사의 벼슬을 그만두었다.

1629년(인조 7) 11월 정시(庭試) 문과에 갑과(甲科) 1등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33세였다.[『국조방목(國朝榜目)』]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므로, 곧바로 6품의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다. 1630년(인조 8)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전임되었다가, 예조·병조·공조의 좌랑(佐郞)을 두루 역임하였는데, 항상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권점(圈點) 5점을 받아 홍문록(弘文錄)에 선임되자, 홍문관에 추천되어,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수찬(修撰)에 임명되었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8년 10월 10일] 이때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비문] 1631년(인조 9) 다시 사간원 정언이 되었는데, 참시관(參試官)에 임명되어 전라도로 가서 인재를 뽑았다. 그 전에 고시관(考試官)이 부시생(赴試生)들의 사정을 봐주기도 했으므로, 방방(放榜)할 때마다 반드시 말썽이 있었는데, 정언 이상질이 시험을 공정하게 감독하자, 전라도 선비들이 모두 칭송하였다.[비문] 1632년(인조 10) 사간원 헌납(獻納)으로 승진하였고,(『인조실록』 10년 3월 22일) 곧 홍문과 교리(校理)로 전임되었다. 그때 교리이상질은 부교리나만갑(羅萬甲)과 동서간이라고 하여, 피혐(避嫌)하였는데,[『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10년 4월 14일] 대사헌정엽(鄭曄)의 둘째딸이 나만갑에게 시집갔고, 넷째 딸이 이상질에게 시집갔기 때문이다.

1633년(인조 11) 사간원 헌납(獻納)이 되었다. 그때 인조가 궁궐의 수리를 명하였으나, 헌납이상질이 북방 오랑캐의 정세가 매우 걱정스러운 이때에 궁궐을 수리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극력 간쟁(諫爭)하면서, 마침내 궁궐 수리의 계획이 중지되었다.[비문] 그해 9월에 암행어사(暗行御史)에 임명되었는데, 함경도 일대를 염찰하고 돌아와, 인조에게 자세히 보고하였다.(『인조실록』 11년 9월 4일) 당시 함경도의 어떤 수령이 조정의 권귀(權貴)를 믿고 토색질을 하였는데, 암행어사이상질이 인조에게 보고한 후, 그 수령을 잡아다가 치죄하니, 온 나라의 수령들이 모두 헌납이상질을 두려워하였다.[비문] 이어 홍문관 교리(校理)에 임명 되었다.

1634년(인조 12) 인조가 생부인 정원군(定遠君)을 원종(元宗)으로 추숭(追崇)하고 그 신주를 종묘(宗廟)에 부묘(祔廟)하려고 하자, 대다수의 유신(儒臣)들은 인조가 선조의 후사왕(後嗣王)이 되었으므로 생부를 추숭할 수 없다고 반대하였다. 삼관(三館: 홍문관·사헌부·사간원)에서 적극 반대하였는데, 홍문관의 부제학(副提學)김광현(金光炫)·교리(校理)이상질(李尙質)·수찬(修撰)이시해(李時楷) 등이 인조에게 소목법(昭穆法)을 설명하고 종묘에 부묘(祔廟)할 수 없다고 상소하자, 인조가 대노(大怒)하여, “김광현·이상질·이시해 등을 삭탈관작하고 북쪽 변방으로 찬출(竄黜)하라.”고 엄명하였다. 함경도 종성(鐘城)으로 유배된 이상질은 북단(北端)의 추운 땅에서 겨울을 보내다가 풍토병에 걸리게 되었는데, 그가 몹시 아프다는 소식을 들은 친구들이 모두 걱정하였다. 1635년(인조 13) 여름에 가뭄이 들자, 인조는 사면령을 내리고, “김광현·이상질·이시해 등 5인을 모두 석방하라.”고 명하였다.(『인조실록』 13년 7월 14일) 그러나 종성에서 귀양살이 하던 이상질이 사면을 받고 서울로 돌아오는 도중에, 철령(鐵嶺)을 넘다가 지쳐 쓰러져서, 그해 10월 5일 회양(淮陽)의 객사(客舍)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39세였다.[비문]

이상질이 죽고 난 후, 그의 친구 정두경(鄭斗卿)이 그가 남긴 시고(詩稿) 1백여 편을 편찬하여 『가주집(家州集)』을 간행하였다.

성품과 일화

성품이 호방(豪放)하고 강직(剛直)하였다. 기개가 뛰어나고 성품이 강직하였으므로, 누구도 큰일을 앞 둔 그의 비장한 뜻을 빼앗을 수 없었다.[비문]

이상질(李尙質)은 1597년(선조 30)에 태어났는데, 11세 때 아버지의 상을 당하고, 15세 때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으므로, 어린 동생 이상검(李尙儉)과 함께 외할머니 권씨(權氏)의 보살핌을 받으며 외가에서 자랐다. 외할머니 권씨는 습재(習齋)권벽(權擘)의 외손녀이고, 석주(石洲)권필(權韠)의 누님이었다. 이상질 형제는 어릴 때부터 문학으로 유명한 권필에게 글을 배웠는데, 이상질이 뛰어난 문장 솜씨를 보이자 권필이 크게 칭찬하였다. 석주(石洲)권필(權韠)의 친구였던 수몽(守夢)정엽(鄭曄)이 이상질의 명성을 듣고 넷째 딸을 시집보냈는데, 그때 이상질의 나이가 17세이고, 부인 정씨는 이상질과 동갑이었다. 수몽정엽은 우계(牛溪)성혼(成渾)의 제자 중에서 서인의 유학자로 추앙을 받는 인물이었으므로, 이상질은 혼인한 뒤에 다시 장인 정엽에게 유학을 수학하였다. 이때 이상질이 경전(經典)의 대의(大義)를 모두 통달하자, 장인 정엽은 사위 이상질이 장차 ‘나라의 큰 그릇[國器]’이 될 것이라고 칭찬하며 진중하게 여겼다. 1617년(광해군 9) 정엽이 양양 부사(襄陽府使)로 나갔을 때, 사위 이상질은 장인과 함께 영동 지방의 오대산(五臺山) 낙산사(洛山寺)와 금강산(金剛山) 비로봉(毘盧峰)등의 명승지를 두루 유람하고 동해 바다도 구경하고 돌아왔다. 이때 이상질이 지은 「장유서(壯遊序)」와 「수창시(酬唱詩)」가 있는데, 문장의 기세가 호방하여 사람들이 모두 신선(神仙)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칭찬하였다.[비문]

이상질은 평소 김자점(金自點)과 가깝게 지냈는데, 김자점이 너무 자기 이익만을 취하고 명분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자, “그대는 공신이니, 의리상 국가와 존망(存亡)을 같이 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국사는 생각하지 않고 오직 자기 이권만을 도모하고 있으니, 내가 어느 곳에 멍에를 벗어 놓아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하며 김자점을 꾸짖었다. 이에 얼굴색이 상기된 김자점이 이상질과 서로 논쟁하게 되었으나, 결국 김자점이 “알았다. 알았어.” 하면서 손들고 말았다. 인조 말년에 김자점은 인조가 총애하던 조귀인(趙貴人)과 손을 잡고 <강빈(姜嬪) 옥사(獄事)>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영의정이 되었으나, 효종이 즉위한 후, 조귀인과 함께 처형되었다. 그때 친구들은 이상질에게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회고하였다.[비문]

1634년(인조 12) 인조가 그의 생부인 정원군(定遠君)을 원종(元宗)으로 추숭(追崇)하여 그 신주를 종묘(宗廟)에 부묘(祔廟)하려고 할 때에 임금에게 불가(不可)하다고 간언(諫言)하던 사람들이 줄줄이 귀양을 갔다. 이때 홍문관 교리(校理)이상질(李尙質)도 차자(箚子)를 올려서 불가하다는 직간(直諫)하려고 하였는데, 그의 막역한 친구인 정두경(鄭斗卿)이 “자네는 여느 사람과 다르다. 자네의 외조모가 여든이 넘은 나이로 후사가 없이 오직 자네만을 길러 왔는데, 자네는 이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만류하였다. 그러나 이상질은 “임금에게 간언(諫言)을 하는 삼관(三館)의 관직에 있는데, 어떻게 개인 사정을 돌아볼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임금에게 극간(極諫)하다가, 마침내 인조의 진노(震怒)를 사서 함경북도 종성(鐘城)으로 유배되었다. 이상질은 북단(北端)에 위치한 종성에서 풍토병에 걸려 고생하였다. 비록 이듬해 가을에 사면을 받았으나, 철령(鐵嶺)을 넘던 도중에 지쳐 쓰러져서 회양(淮陽)의 객사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때 사림(士林)에서는 “바른말을 하는 곧은 신하를 잃어버렸다.”고 눈물을 흘리며, 모두 안타까워하였다. 인조가 복관(復官)을 명하고, 그를 반장(返葬)할 때 연로의 군읍(郡邑)에서 영구(靈柩)의 호송을 돕도록 하였다.[비문]

동명(東溟)정두경(鄭斗卿)이 지은 『가주집(家州集)』의 서문(序文)을 보면, “나의 망우(亡友) 교리(校理)이상질은 약관의 나이에 문장으로 이름이 났다. 그러나 그의 뜻은 개연히 경국제세(經國濟世)할 것을 자부하여 한묵(翰墨: 문장)에만 전념하지 않았다. 이상질은 일찍 죽어서 자신의 뜻을 다 펴지 못하였으므로, 천명을 다하지 못한 것이 애석하다. 이상질은 시조(詩調)가 청아하였고, 변려문(騈儷文)도 특이하였다. 맏아들 이훤(李藼)이 아버지의 유고 1백여 편을 모아 나에게 보여 주면서, 서문을 지어 달라고 청하였다. 내가 읽어 보니, 태반이 사라지고 없었다. 이훤이 아버지를 잃었을 때의 나이가 겨우 여덟 살이었고, 얼마 뒤에 또 <병자호란>을 겪었으니, 시고(詩稿)를 잃어버린 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 그러나 한 편의 글만 읽어보더라도 그의 시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 수 있다. 시가 비록 성정(性情)을 읊는 것이기는 하지만, 어찌 이것이 이상질이 평생에 온축(蘊蓄)한 바를 다 말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후대에 이 시집을 보는 자들은 그를 한 시인으로만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다.[『동명집』 11권 서(序)]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 파주(坡州) 고령산(高靈山)의 언덕에 있는데, 동명(東溟)정두경(鄭斗卿)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남아있다. 이상질과 정두경은 ‘의(義) 형제’를 맺을 만큼 아주 가깝고 막역한 사이였다.

첫째부인 초계정씨(草溪鄭氏)는 대사헌정엽(鄭曄)의 막내딸인데, 자녀는 1남을 낳았다. 둘째부인 진주강씨(晉州姜氏)는 강위재(姜渭載)의 딸이다. 외동아들 이훤(李藼)은 문과에 급제하고, 중시(重試)에 장원하여, 세자시강원 보덕(輔德), 중추부 첨지사(簽知事)를 지냈으며, 대제학조석윤(趙錫胤)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5녀를 두었다. 맏손자 이한익(李漢翼)은 진사(進士)로서 현감(縣監)을 지냈다.[비문]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가주집(家州集)』
  • 『동명집(東溟集)』
  • 『계곡집(谿谷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응천일록(凝川日錄)』
  • 『청음집(淸陰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