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성(李師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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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25년(중종 20)∼1571년(선조 4) = 47세]. 조선 중기 명종(明宗) 때의 문신. 사옹원(司饔院) 정(正) 등을 지냈다. 자는 성지(誠之)이고, 호는 보진재(保眞齋)이다. 본관은 덕수(德水)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사간원(司諫院) 헌납(獻納)이치(李致)이고, 어머니 성주 이씨(星州李氏)는 첨정(僉正)이인수(李麟壽)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적성현감(積城縣監)을 지낸 이자하(李自夏)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이찬(李璨)이다. 사촌 형인 박계현(朴啓賢)과 함께 일찍부터 문예(文藝)로 이름이 났다.

명종~선조 시대 활동

1546년(명종 1) 사마시(司馬試)의 생원과(生員科)로 합격하였고, 1548년(명종 3)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4세였다.[『방목(榜目)』] 바로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이후 박사(博士)로 승진하면서 봉상시(奉常寺) 직장(直長)을 겸하였다.

그해 사간원 헌납이었던 아버지 이치가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킨 권신(權臣) 이기(李芑)와 외척 윤원형(尹元衡)을 비판하면서 이들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명종실록』 3년 4월 19일) 그리하여 1550년(명종 5) 결국 이들에게 모반대역으로 몰려 고신(拷訊)을 받다가 장살(杖殺)되었다. 맏아들 이사성도 이 일에 연루되어 사판(仕版)에서 이름이 삭제되었으며, 금고(禁錮)형에 처해졌다.

이후 금고형이 해제되면서 예조 좌랑(佐郞)과 형조 좌랑을 역임하며 춘추관(春秋館) 기사관(記事官)을 겸임하였고, 외직으로 나가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이어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성균관(成均館) 직강(直講)과 형조 정랑(正郞)을 역임하였다. 1557년(명종 12) 주청사(奏請使)의 서장관으로 임명되어 명(明)나라에 파견되었으며, 돌아온 후에는 예조 정랑에 임명되었다가 평양서윤(平壤庶尹)으로 나갔다. 이때 다시 몇 년 동안 배척을 받아 임용되지 못하다가 형조 정랑이 되었고, 영해부사(寧海府使)·홍주목사(洪州牧使)·광주목사(廣州牧使)를 역임한 후, 군자감(軍資監) 정을 거쳐서 사옹원 정이 되었다.

1571년(선조 4) 11월 세상을 떠나니, 향년 47세였다.

성품과 일화

이사성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이 강직하고 자질이 영특하여, 일찍부터 문예(文藝)를 성취하였다. 어려서부터 사촌인 박계현과 함께 학업을 닦았는데, 두 사람 모두 일찍부터 문장으로 이름이 났다. 이사성은 박계현보다 1살 어렸지만 4년 먼저 문과에 급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항상 벼슬도 앞섰으나, 참하관(參下官)의 여러 관직을 거치며 편치 못한 세월을 보냈다. 반면 박계현은 관직이 도승지(都承旨)·호조 판서(判書)에 이르렀다.

이사성은 1548년(명종 3) 약관(弱冠)의 나이에 우수한 성적으로 과거에 급제한 뒤, 천거를 받아 한원(翰苑)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해 사간원 헌납이던 아버지 이치가 을사사화를 일으킨 이기에 대하여 권력을 전횡한다는 이유로 탄핵하였다. 또한 외척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며 윤원형 역시 비난하였으므로, 이들은 이치에게 앙심을 품었다. 결국 이들은 이치를 충주목사(忠州牧使)로 좌천시켰는데, 이때 마침 <충주옥사>가 일어났다. 이치는 이 사건을 공평하게 처리하려고 하였으나, 이기의 사주를 받은 이무강(李無彊)의 무고로 모반 대역 죄인으로 몰려 1550년(명종 5) 결국 장살되었다.

이치의 맏아들 이사성도 이 일로 소윤(少尹)에 의하여 사판에서 이름이 삭제되고, 금고형에 처해졌다. 이후 금고형이 해제되었으나, 참하관의 여러 관직을 거치는 동안 편치 못한 세월을 보내며 이따금 어머니 봉양을 위해 외직으로 나갔다.

선조(宣祖) 초기에 아버지 이치가 신원(伸寃)되자 이사성은 청요직(淸要職)에 주의(注擬)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성품이 강직하여 끝내 세상에 용납되지 못했으므로 홀로 침묵을 지키면서 일체의 교유를 끊은 채, 오직 전적(典籍)을 탐독하기만 할 뿐 지엽적이고 말단적인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생활을 즐겼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 장단부(長湍府) 홍릉동(弘陵洞)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이식(李植)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

이사성이 죽은 지 60년이 지난 후, 막내아들 사과(司果)이상(李庠)이 이식을 찾아와 비명(碑銘)을 부탁하기를, “할아버지인 헌납이치가 직언을 하다가 권신들의 뜻을 거스르면서 충주옥사 때에 돌아갔습니다. 그때 이이(李珥) 선생께서 일가친척인데다가 그 절조(節操)를 중하게 여긴 나머지 할아버지[이치]의 묘갈명을 써 주었습니다. 지금 당신도 우리와 같은 일가이니, 아버지[이사성]의 묘갈명을 지어주십시오.”하고 요청하였다. 이식(李植)은 나이 많은 족친의 간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이사성의 묘갈명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부인 청주 한씨(淸州韓氏)는 생원(生員) 한유(韓維)의 딸인데, 자녀는 5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이염(李廉)은 진사(進士)이고, 차남 이서(李序)는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사예(司藝)·목사(牧使) 등을 지냈다. 3남 이도(李度)와 4남 이광(李廣)은 일찍 죽었고, 5남 이상은 사과를 지냈다. 딸은 종실(宗室)인 광릉정(廣陵正) 이모(李某)에게 출가하였다. 손자 이여달(李汝達)은 현감(縣監)을 지냈고, 이명달(李命達)은 사옹원 주부(主簿)를 지냈으며, 이영달(李穎達)은 참봉(參奉)을 지냈다.

참고문헌

  • 『명종실록(明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택당집(澤堂集)』
  • 『겸암집(謙菴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