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부(李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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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82년(성종 13)∼1552년(명종 10) = 71세]. 조선 중기 중종(中宗) 때의 문신. 병조 좌랑(佐郞)과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등을 지냈다. 자는 자릉(子陵)이고, 호는 행원(杏院)이다. 본관은 고성(固城)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사과(司果)를 지낸 이금(李嶔)고, 어머니 최씨(崔氏)는 최윤공(崔允恭)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부정(副正)을 지낸 이신(李晨)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중추원(中樞院) 부사(副使)를 지낸 이대(李臺)이다. 철성부원군(鐵城府元君)으로 좌의정을 지낸 이원(李原)의 현손이다. 조광조(趙光祖)와 교유하였다.

중종 시대 활동

1519년(중종 14) 현량과(賢良科)의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당시 나이가 38세였다. 급제 후 교서관(校書館) 교리(校理)에 보임되었다가, 병조 좌랑을 거쳐서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다.(『중종실록』 14년 10월 16일) 이때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조광조 등과 함께 <중종반정(中宗反正)> 공신에 대한 위훈삭제(僞勳削除)를 주장하였으나,(『중종실록』 14년 10월 25일) 그 주장이 받아들여 지지 않자 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이 해에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신진 사림(士林)들이 참화를 당하였으나, 이부는 벼슬을 하지 않고 있었으므로 화를 면할 수 있었다. 1545년(명종 즉위년) 현량과(賢良科)가 다시 설치되면서 병조 좌랑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거절하고 학문에 몰두하였다.

성품과 일화

이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학식과 지조의 덕목으로 천거되어 현량과에 급제하고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병을 핑계 삼아 벼슬을 그만두고 진천(鎭川)으로 돌아갔다. 당시 조광조가 한강까지 쫓아 와서 군신의 의리를 내세우며 책망하자, 이부가 탄식하기를, “귀역(鬼魊)들이 옆에서 기회를 엿보고 훈유(薰蕕)가 같은 그릇에 담겨져 있소. 나는 차라리 시내에서 물고기를 낚고 산 속에서 밭을 일구며, 나의 목숨을 온전히 보존하겠소.”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렸다. 그해 겨울 기묘사화가 일어나면서, 이부만이 화를 면하였다.

그는 유복자로서 아버지를 여의고 외가에서 자랐다. 장성하자 당시 큰 선비였던 외할아버지 최윤공이 과거 공부를 하도록 권유하였다. 그러나 그는 과거 합격으로 명성을 얻고 싶지 않았으므로 “불초는 신세가 외로워서 구차스럽게 세상에 나간다 하더라도 별다른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며 거절하였다. 이윽고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게 되었는데, 그는 아버지의 얼굴을 모르는 것을 마음 아파한 나머지 6년 동안 상복을 입고 죽을 마시며 항상 울먹이며 눈물을 흘렸다.

노후에 집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을 때, 먼 곳에 사는 노군(盧君)이라는 사람이 이부에게 들러 명경과(明經科)의 시험을 보러 가는 길이라고 하였다. 그는 노군이 경학에 능통하지 못하면서 시험 보러 가는 것을 의아해 하면서 “공부가 그처럼 부실한데 어떻게 요행수로 급제하기를 바라는가?” 하자, 노군이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며 하직하고 돌아갔다는 일화가 전한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충청북도 진천(鎭川)에 있고, 이민구(李敏求)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 홍문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에 추증되었으며, 진천의 백원서원(百源書院)에 제향되었다.

아들 이곤근(李坤根)이 있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 『동각잡기(東閣雜記)』
  • 『국조보감(國朝寶鑑)』
  • 『기묘록속집(己卯錄續集)』
  • 『학포집(學圃集)』
  • 『정암집(靜菴集)』
  • 『지퇴당집(知退堂集)』
  • 『은봉전서(隱峯全書)』
  • 『범옹집(泛翁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