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李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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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46년(인조 24)∼1694년(숙종 20) = 49세]. 조선 후기 숙종(肅宗) 때의 유일(遺逸). 자는 문보(文甫)이고, 호는 부춘당(富春堂)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거주지는 경기도 광주(廣州)와 충청도 충주(忠州)이다. 아버지는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사어(司禦)를 지낸 이인실(李仁實)이고, 어머니 경주 김씨(慶州金氏)는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을 지낸 월성군(月城君)김원량(金元亮)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사헌부 장령(掌令)을 지낸 이익(李瀷)이며, 증조할아버지는 판관(判官)이유일(李惟一)이다. 우의정이완(李浣)과 6촌 사이이기도 하다. 막냇동생 이정(李烶)과 함께 윤선거(尹宣擧)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숙종 때 당쟁을 피해 충청도 충주에 은거하였다.

숙족 시대 활동

1687년(숙종 13) 식년시(式年試)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42세였다. 성균관에 입학하여 공부하던 가운데,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났다. 숙종이 인현왕후(仁顯王后)를 폐위하고 장희빈(張禧嬪)을 왕비로 책봉한 후 그녀가 낳은 왕자 이윤(李昀 : 훗날의 경종)을 세자로 책립하면서 서인(西人)과 남인(南人)은 그 찬반에 따라 적극 대립하였다. 서인의 송시열 등은 이를 적극 반대하였으나 남인의 권대운(權大運) 등은 이를 지지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남인 이현령(李玄齡) 등의 상소로 인하여 송시열(宋時烈)과 김수흥(金壽興)·김수항(金壽恒) 형제 등이 유배되고,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이 문묘(文廟)에서 출향(黜享)되었다. 이에 이병은 그 해 3월 서울·경기 출신 유생(儒生) 2백여 명을 거느리고 소두(疏頭)가 되어 대궐 앞에 엎드려 그 부당함을 상소하였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서 함경도 단천(端川)으로 유배되었으나, 그해 가을 큰 가뭄으로 인하여 나라에서 사면령을 내리면서 유배에서 풀려났다.(『숙종실록』 15년 3월 30일),(『숙종실록』 15년 7월 22일) 단천에 유배되었을 때에 유배 생활을 기록한 『부춘당북천록(富春堂北遷錄)』을 지었다.

경기도 광주(廣州)의 집으로 돌아와서 벼슬길에 나갈 생각을 버리고 두문분출하며 지내다가 동생 이정과 함께 가족을 데리고 마침내 충청도 충주(忠州)오갑산(烏岬山)의 선영(先塋) 아래 고향 집으로 옮겨 은거하였다. 자식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것만을 즐거움으로 삼았고, 좋은 시절 아름다운 경치를 만나면 지팡이를 짚고 짚신을 신고 왔다갔다 배회하며 도(道)를 즐기면서 자신이 늙는 줄도 모르고 지냈다.

1694년(숙종 20) 1월 26일, 귀양살이 할 때 얻은 풍토병으로 고향 집의 정침(正寢)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49세였다.

성품과 일화

이병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이 온화하고 중후하며, 인품이 화평하고 순수하였다. 친구 간에 신의를 지켰으며, 사람을 접대하는 데에도 성의가 넘쳐 흘렸다. 평소 사람들과 교유하는 것이 많지 않고 말수가 적었으며, 겸손하고 유순함이 마치 문을 반쯤 열고 밖을 내다보는 처녀와 같았다.

1646년(인조 24) 8월 17일 경기 광주의 집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총명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누가 번거롭게 가르쳐 주거나 공부하라고 독촉하지 않아도 학업이 날로 진취하였다. 시(詩)에 더욱 뛰어나서 한 시대의 동류들에게 추앙을 받았다. 23세 때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고, 30세 때 어머니의 상(喪)을 당해서는 『주자가례(朱子家禮)』 대로 상사(喪事)를 치렀다. 1687년(숙종 13)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과거 공부를 위한 시험 공부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자기 수련을 위한 위기(爲己)의 학문에 힘을 썼다.

한편 광해군(光海君) 때에 북인(北人) 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 등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출하려고 하자, 사헌부 지평으로 있던 이병의 조부 이익은 인목대비를 폐출하려는 논의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광해군의 노여움을 산 이익은 혹독한 심문을 일곱 차례나 받았으나 끝내 그의 주장을 굽히지 않다가 마침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손자 이병도 기사환국 당시 서울·경기 출신 유생 수백 명을 거느리고 대궐 앞에 엎드려 상소하여, 이이·성혼이 무함을 받고 문묘에서 출향당하는 것을 막으려고 하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서 함경도 단천으로 유배되었다. 손자 이병은 할아버지 이익의 곧은 절개를 이어받았던 것으로 당시 선비들이 감탄하기를, “이병은 명망 높은 할아버지의 기풍이 있다.”며 감탄하였다. 이병이 단천에 귀양 가서 있을 때에 북쪽 지방 인사들이 그를 찾아와서 글을 많이 배웠는데, 이병이 세상을 떠나자 그들 중에 상복을 입고 3년 상을 마친 자도 있었다.

이병은 유배 생활에서 풀려난 후 경기도 광주의 집으로 돌아와서 칡덩굴이 우거진 고개[葛陂]에 땅을 골라서 서실을 짓고, 날마다 그 안에서 시를 읊조리고, 학문을 연구하였다. 그 집 앞에 회(檜)나무 두 그루가 있었는데, 그 밑을 깨끗이 손질하여 단(壇)을 쌓고 자리를 만든 다음, 서울 손님이 오면 함께 앉아 이야기하고, 시를 지으면서 하루를 보냈다. 그러나 서인과 남인의 싸움이 그치지 않고, 그 당파 싸움의 소식이 날마다 들려오자, 이병은 결국 서울과 가까운 광주에서 먼 곳으로 이주하고자 결심하였다. 그리고 5형제 중에서 막냇동생 이정과 함께 상의하여 두 형제는 가족을 데리고 충청도 충주오갑산 아래 고향으로 돌아와서 은거 생활을 하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처음에 충청도 충주오갑산의 선영(先塋)에 있었는데, 부인 광주 김씨(光州金氏)를 무덤의 왼쪽에 합장했다가 나중에 충주 현곡의 언덕으로 이장(移葬)하였다. 권상하(權尙夏)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

부인 광주 김씨는 좌랑(佐郞)김진원(金振元)의 딸인데, 자녀는 2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이중국(李重國)은 백부인 이정(李炡)의 후사가 되었는데, 아버지보다 1년 먼저 요절하였고, 차남 이중협(李重協)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을 지냈다. 딸은 아버지보다 1년 뒤에 요절하였는데, 시집도 채 가기 전이었다.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사마방목(司馬榜目)』
  • 『부춘당북천록(富春堂北遷錄)』
  • 『명재유고(明齋遺稿)』
  • 『우계집(牛溪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