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원(理藩院)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청에서 번부(藩部)와 관련한 사무를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한 중앙관청.

개설

이번원은 몽골·청해(靑海)·티베트·신강(新疆) 등 청의 번부(藩部)와 관련한 사무를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된 중앙관청으로, 후금 정권과 내몽골 각부의 밀접한 정치적·군사적 관계 속에서 설립된 몽고아문(蒙古衙門)을 전신으로 하여 초기에는 주로 내몽골과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였지만, 이후 청의 외번이 확대됨에 따라 그 조직 체계 및 업무 범위도 지속적으로 확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이번원(理藩院)은 홍타이지[皇太極] 통치기에[1634년 이전] 내몽골 부족들과 관련된 업무를 전담하는 기구로서 설치된 몽고아문(蒙古衙門)을 전신으로 하였다. 내몽골 각 부의 존재는 후금의 성장 과정에서 그 군사적 동맹자인 동시에 잠재적 위협 세력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이에 홍타이지는 정권의 안정과 직결되어 있었던 몽골과의 관계를 보다(조금 더) 체계적으로 정비하기 위한 중앙관청으로 몽고아문을 설치했고, 이는 1638년에 이번원으로 개칭되어, 청의 외번(外蕃) 혹은 번부와의 관계를 담당하는 중앙 기구로서 청말까지 존속하였다.

청은 조선·류큐·베트남 등 동아시아 문화권의 번국(藩國)들과의 관계는 예부(禮部)를 통하여 내몽골·외몽골(할하)·서몽골(준가르)·청해·티베트·신강 등 비동아시아 문화권에 속하였던 번부와의 관계는 이번원을 통하여 관할하게 하는 이원 체계를 구축하였다. 조선과의 관계는 이번원 관할이 아니었으나, 1833년(순조 33) 7월, 청 황후의 부고를 전하기 위하여 칙사가 파견되었을 때, 이번원우시랑상백기몽고부도통(理藩院廂白旗蒙古副都統)새상아(賽尙阿)가 부사로서 파견되어 온 바 있다(『순조실록』 33년 6월 15일).

조직 및 역할

건륭(乾隆) 후기에 대체로 완성된 이번원의 조직과 편제는 이후 인원 등의 면에서 다소 변화를 보일 뿐, 청말 관제 개혁 시까지 유지되었다. 『이번원치례(理藩院則例)』·『대청회전(大淸會典)』등을 통하여 확인되는 대체적 편제는 아래와 같다.

당관(堂官)은 종1품의 상서(尙書)와 종2품의 좌·우시랑(左·右侍郞)으로 각기 만주인 1인을(1명을) 임명하였다. 당관은 원칙상 만주인을 임명하였으나 몽골 기인(旗人) 출신도 등용되었다. 당관 아래에서 번부에 관한 실무를 처리하는 기관으로 청리사(淸吏司)가 있었으며, 이는 관할 지역과 업무에 따라 기적사(旗籍司)·왕회사(王會司)·전속사(典屬司)·유원사(柔遠司)·협원사(㣣遠司)·이형사(理刑司)로 편성되었다.

이번원은 번부에 관한 제반 사무를 담당하였는데, 구체적으로는 몽골의 호구 파악이나 왕공들과의 통혼, 회맹(會盟) 및 자사크(jasak) 임면 등 몽골 맹기(盟旗)에 대한 사무, 몽골 왕공들에 대한 작록과 번부의 조공에 대한 업무, 사법 및 라마교 관련 업무, 변경의 통제와 교역에 대한 업무 등을 관장하였다. 또한 청의 번부는 아니었으나 러시아와 관련한 외교 업무 역시 이번원이 담당하였다.

변천

이번원의 전신인 몽고아문의 관속에는 육부(六部)와 마찬가지로 승정(承政)·부이사관(副理事官) 등이 설치되었다. 1638년(숭덕 3) 관제를 개혁해 각 부원(部院)에 만주 승정 1명과 좌·우참정 각 1명씩 두도록 규정하면서 이번원도 이에 따르게 되었다. 입관 후, 1644년(순치 원년)에 관직 명칭을 개정해 이번원 승정을 상서(尙書)로, 참정을 시랑(侍郞)으로, 부이사관을 원외랑(員外郞)으로 바꾸었다. 또 계심랑(啓心郎) 3명, 당주사(堂主事) 2명, 사무(司務) 2명, 한부사(漢副使) 1명을 두었다. 하급 실무관에 일부 한결(漢缺)이 생겼지만 대부분의 관직은 만주인과 몽골인이 담당하였고, 육부상서에 적용된 만한병용의 제도가 이번원에 적용되지는 않았다.

1659년, 이번원 상서를 예부상서함장이번원사(禮部尙書銜掌理藩院事)로, 좌·우시랑을 예부시랑함협리이번원사(禮部侍郞銜協理理藩院事)로 개칭하여 이번원을 예부에 예속시켰으나, 1661년 순치제가 사망하고 강희제가 즉위한 후 다시 독립시켰다. 이와 함께 육부상서의 예에 따라 이번원도 의정에 참여하도록 하였으며 공부(工部) 다음 반열에 들게 하였고, 이번원 아래에 청리사를 설치하여 육부에 준하는 체제를 갖추었다. 이때 설치된 청리사는 내몽골의 기 편성과 봉작 등을 관할하는 녹훈사(錄勳司), 내몽골의 조공 및 봉은(俸銀) 등을 관리하는 빈객사(賓客司), 라마교와 관련한 업무 및 외몽골의 조공을 관장하는 유원사(柔遠司), 몽골 각 부의 사법 문제를 관장하는 이형사(理刑司)였다.

외몽골이 복속한 이후인 1699년(강희 38), 유원사는 유원전사(柔遠前司)와 유원후사(柔遠後司)로 분리되어, 유원후사에서 외몽골의 기 편성 및 봉작 등 업무를 관장하였다. 이후 1757년(건륭 22), 녹훈사는 전속사(典屬司)로, 빈객사는 왕회사(王會司)로, 유원후사는 기적사(旗籍司), 유원전사는 유원사로 개칭되었다. 1761년, 신강과 관련한 사무를 전담하는 협원사(㣣遠司)가 신설되었다. 이로써 청리사는 관할 지역과 직무의 성격에 따라 6개의 청리사로 분리·확정되었다.

1906년(광서 32) 관제개혁 후 이번부(理藩部)로 개칭되었으며, 1911년(선통 3) 내각제도가 창설되면서 상서는 대신, 시랑은 부대신이 되었다. 중화민국 이후에도 그 기능은 몽장사무국(蒙藏事務局)·몽장위원회(蒙藏委員會) 등의 특수행정기구로 이어졌다.

참고문헌

  • 최정연, 「이번원고(理藩院考)」 상, 『동아문화』 제20집, 서울대학교 동아문화연구소, 1982.
  • 최정연, 「이번원고(理藩院考)」 하, 『동아문화』 제21집, 서울대학교 동아문화연구소, 1983.
  • 이선애, 「청 초기 외번(tulergi golo) 형성과정과 이번원」, 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