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李溟)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총론

[1570년(선조 3)∼1648년(인조 26) = 79세]. 조선 중기 선조~인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호조 판서(戶曹判書)·형조 판서(刑曹判書)이다. 자(字)는 자연(子淵)이고, 호(號)는 구촌(龜村)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이조 정랑(吏曹正郞)이정빈(李廷賓)이고, 어머니 청주한씨(淸州韓氏)는 한수(韓洙)의 딸이다. 효령대군(孝寧大君)의 7대손이고, 이조 판서이량(李樑)의 손자이며, 의정부 우찬성(贊成)이충(李冲)의 동생이다. 내암(萊菴)정인홍(鄭仁弘)의 제자인데, 대북(大北)에 속하였다. 동계(桐溪)정온(鄭蘊)과 수부(秀夫)김준룡(金俊龍)과 절친한 사이였다.[『기언 별집』 17권]

이명(李溟)과 그의 형 이충(李沖) 형제는 명종 때의 권신 이량(李梁)의 손자라는 이유로 선조 때 현관(顯官)이 되지 못하였다. 광해군 때에 이르러 대북의 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이 정권을 잡자 이들 형제는 비로소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치게 되었다. 그러나 이이첨이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하자 이명은 이에 반대하였다. 때마침 이명의 절친한 친구인 정온(鄭蘊)이 폐모론을 적극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이이첨은 그 상소가 이명의 손에서 나왔다고 여겨, 정온을 귀양 보내고 이명도 내쫓았다. <인조반정>이후, 대북의 정인홍 일당으로 지목되면서 죽을 뻔 하였으나, <반정>의 1등 공신인 이서(李曙)와 이귀(李貴)의 도움으로 살아날 수 있었다.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전라도 순찰사(巡察使)로서 정예병 2천 명을 거느리고 맨 먼저 공주(公州)로 가서 어가를 맞이하였는데, 이때부터 인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공서파(功西派)의 영수인 이귀의 추천으로 황해도·전라도·경기·함경도·경상도 등의 5도 관찰사를 거치면서 호란(胡亂) 이후 민심의 수습과 국방의 강화에 힘썼다. 또 호조·병조·형조의 참판을 거쳐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임명된 후, 7년 동안 재임하면서 호란(胡亂) 이후에 수렁에 빠진 국가 재정을 구출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선조~광해군 시대 활동

1591년(선조 24)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2세였다.[『국조방목(國朝榜目)』] 그 후 15년이 지난 1606년(선조 39) 증광(增廣)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7세였다.[『국조방목(國朝榜目)』] 바로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에 보임되었다.

1608년 2월,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북의 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이 정권을 잡았는데, 정인홍의 추천으로 1608년(광해군 즉위년) 세자시강원 설서(說書)를 거쳐서,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승진하였다. 1609년(광해군 1) 예조 좌랑(禮曹左郞)이 되었다가, 세자시강원 사서(司書)를 거쳐, 문학(文學)으로 승진되었다.(『광해군일기』 1년 8월 3일),(『광해군일기』 1년 8월 20일) 1610년(광해군 2) 다시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었다가,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다. 1611년(광해군 3) 이조 좌랑(吏曹左郞)이 되었고, 1612년(광해군 4)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승진되었다. 1613년(광해군 5) 홍문관 교리(校理)를 거쳐 사간원 헌납(獻納)이 되었고, 다시 이조 정랑을 거쳐 홍문관 응교(應敎)에 임명되었다.(『광해군일기』 5년 7월 4일)

그때 이이첨(李爾瞻) 일당은 <계축옥사(癸丑獄事)>를 일으켜 영창대군(永昌大君)과 그의 외조부 김제남(金悌男)을 죽이고 인목대비(仁穆大妃)까지 폐출하려고 하였다. 당시 문사낭청(問事郎廳)의 낭관(郎官)이었던 이명은 영창대군과 인목대비를 보호하려고 하다가, 이이첨 일당과 대립하였다. 1614년(광해군 6) 양사(兩司)에서는 홍문관 응교이명의 관작(官爵)을 삭탈하고 도성(都城) 문 밖으로 출송(出送)할 것을 청하였으나, 광해군이 따르지 않았다.(『광해군일기』 6년 3월 4일) 영창대군이 살해되자, 사간원 정언(正言)정온(鄭蘊)이 그 부당함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이 일로 광해군의 노여움을 사서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이명은 평소 정온과 가깝게 지냈으므로, 추국청(推鞫廳)에서는 그 상소가 이명의 기초(起草)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다고 판결하였기 때문에, 이명도 관직을 삭탈당하고 고향으로 추방되었는데, 그는 아차산(峨嵯山) 농장에 임시로 은거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그의 형 이충(李冲)은 1615년(광해군 7) 선수 도감(繕修都監) 제조(提調)가 되어, 왜란 때 불탄 궁궐을 수축(修築)하는 일을 맡아보았다. 1617년(광해군 9) 이충이 갑자기 병이 들자, 광해군은 “이충(李沖)이 나랏일에 마음을 다하다가 갑자기 중병을 얻었으니, 내가 몹시 염려한다. 그의 동생 이명(李溟)이 아직 죄적(罪籍)에 들어 있으니, 풀어주어서 형의 집으로 가서 병을 구완하게 하라.”고 하였다. 이명은 즉시 형의 집으로 가서 병을 구완하였으나, 형의 병세는 점차 악화되어 갔다. 1618년(광해군 10) 7월, 이명은 다시 기용되어 서천 군수(舒川郡守)로 나갔는데, 3년이 지나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陞品)되었으나, 사직하고 집으로 돌아왔다.[비문] 1619년(광해군 11) 이명의 형인 의정부 우찬성(右贊成)이충(李冲)이 결국 52세의 나이로 돌아갔다. 1621년(광해군 13)특별히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고, 1622년(광해군 14)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승진되었으나, 이이첨과 대립하다가, 황해도 관찰사(觀察使)로 좌천되었다.

그때 이귀(李貴)가 평산 군수(平山郡守)로 있었는데, 황해도 감사이명이평산으로 순찰을 나갔다. 이때 심기원(沈器遠)과 함께 비밀리에 <인조반정(仁祖反正)>을 모의하던 이귀는 술자리를 마련하고 감사이명을 맞이하였다. 이귀는 술자리에서 감사이명에게 넌지시 거사에 참여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이명은 술에 취한 체하며 대답하지 않았다. 술자리에서 일어나 떠날 때, 감사이명은 부사이귀에게 칼 한 자루를 선물로 주면서, “이러한 거사에 따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따르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의가 벌써 이루어졌다니, 나는 비록 따르지 못할지라도 거사는 의롭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였다.[비문] 〈반정〉사실을 알게 된 감사이명은 비록 조정에 바로 고발하지는 않았으나, 가까운 친척에게 은밀하게 발설하였다. 이때 사헌부에서는 부사이귀의 부정을 탄핵하여 파직하기를 청하였으나, 모역(謀逆)에 관한 문제를 거론하지는 않았다.(『광해군일기』 14년 12월 9일) 당시 황해도 감사이명은 술에 취한 체하며 거사에 찬성하지 않았다고 하였으나,[비문] 이귀는 이명이 거사에 찬성하였다고 간주하였으므로,[『연평일기』]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에 1등 공신이 된 그는 대북파에 속한 이명의 목숨을 구해 주었다.

인조 시대 활동

1623년 3월, <인조반정(仁祖反正)>의 성공으로 인조(仁祖)가 즉위하고 광해군이 강화도(江華島)로 유폐되었다. 광해군 시대에 권력을 잡았던 북인들은〈반정〉이후 거의 숙청당하였으나, 이조 판서이귀는 “이명은 광해군 때 절의를 지킨 사람이며, 그 재주도 아깝습니다.”라며 그를 변호하였다. 그러자 인조는 “만약 그렇다면, 그 형과는 다른 사람인 것 같다.” 고 대답하였는데, 이명의 형인 이충(李沖)이 광해군의 신임을 받아 의정부 찬성(贊成)까지 지냈기 때문이었다. 이때 이귀의 변호를 받은 이명은 황해도 감사에 그대로 유임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해 여름, 강화도에 유배된 광해군의 세자(世子) 이지(李䘭)가 위리안치(圍籬安置)된 곳에서 땅굴을 70여 척이나 판 후, 밤중에 울타리 밖으로 빠져 나와 배를 타고 황해도로 도망가려고 하다가 나졸에게 붙잡힌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 세자 이지는 겉봉에 ‘황해 순영(黃海巡營)’이라고 쓰여 있는 서찰(書札)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추국청(推鞫廳)에서 황해도 감사이명을 체포하여 국문(鞠問)하였으나, 세자 이지가 나루터를 통과할 때 심문을 피하려고 거짓으로 황해도 순영(巡營)을 칭탁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이명은 관작만 삭탈당하고 석방되었다.(『인조실록』 1년 5월 22일) 그해 가을에 인조가 특별히 이명을 전라도 관찰사에 임명하고, 활과 화살을 하사하였다.[비문]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는 서울을 떠나 공주(公州)로 피난하였는데, 전라도 감사이명이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가장 먼저 공주로 달려와 임금 일행을 맞이하였다.(『인조실록』 2년 2월 13일) 이때 감사이명은 그가 거느리고 온 2천명의 군사를 나누어 일부는 임금을 호위하도록 하는 한편, 나머지 일부의 군사를 자신이 직접 거느리고 반군에 맞서 싸우겠다고 요청하였으나, 병조판서김류(金瑬)의 반대로 중지되었다. 인조는 이명을 특별히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승품(陞品)시키고 공주에 머물면서 임금을 호위하도록 명하였다.[비문] 한 달 만에 <이괄의 난>이 평정되자, 인조는 서울로 귀환하였다. 전라도 임지로 돌아간 감사이명은 나라에서 군수품으로 긴급하게 쓸 수 있도록 포백(布帛) 1만여 필과 곡식 수천 석을 호조(戶曹)로 수송하였다. 이에 크게 감동을 받은 인조는 남방의 여러 감영(監營)과 병영(兵營)에 “전라 감사이명이 충성을 다하여 임금에게 보답한 사실을 본받도록 하라.”고 유시 하였는데,[비문] 이때부터 이명은 인조의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되었다.

1625년(인조 3) 조정에서 전라도 감사이명으로 하여금 남평현(南平縣)의 적도(賊徒)를 잡아 다스리도록 하였다. 당시 남평현에는 은루(隱漏)된 전결(田結)이 아주 많았으므로, 감사이명이 아전으로 하여금 세밀히 타량(打量)하여 은결(隱結)을 적발하도록 하였는데, 이에 반발한 토호들이 작당하여 감관(監官)과 색리(色吏: 담당 아전)를 죽였기 때문이었다.(『인조실록』 3년 5월 17일) 1626년(인조 4) 경기 관찰사(觀察使)가 되었으나, 사헌부에서 “경기 감사이명은 처음에 이이첨(李爾瞻)을 섬겨 그의 비호를 받다가, 지금은 친척 권신(權臣)의 지원을 받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청류(淸流)라고 하니, 마음 쓰는 것이 음흉하고 행동이 추잡스럽습니다.” 하고, 파직하기를 청하였으나, 인조는 “감사이명에게 쓸 만한 재주는 있어도 버려야 할 죄는 없다.”고 하였다. 친척 권신은 반정공신 이서(李曙)를 말하는데, 이서가 아들이 없어서 이명의 아들을 양자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사헌부의 탄핵으로 감사이명이 인피(引避)하여 정고(呈告)하고 출사하지 않으면서, 그는 경기 감사에서 체직되었다.(『인조실록』 4년 8월 6일)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을 갔는데, 이명을 다시 경기 관찰사로 삼고, 이원익(李元翼)을 5도 체찰사(體察使)로 삼아 후금(後金) 오랑캐의 침입을 방어하게 하였다. 후금의 군사들은 압록강을 건너 의주(義州)와 평양(平壤)을 점령하고, 황주(黃州)를 장악하였으나, 평산(平山)에 이르러 강화(講和)를 맺고 돌아갔다. 이때 강화도로 피난을 간 왕가(王家)와 대소 신료들에게 경기 감사이명이 공궤(供饋)를 잘 하였다고 하여, 인조가 특별히 종2품상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품(陞品)시켰다. 북방 변경의 방어가 한층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자. 인조는 그해 여름에 이명을 함경도 관찰사에 임명하였다. 이명은 함경도 감사에 부임한 후, 장정을 뽑아 군사 훈련을 시키고 병기를 수선하였는데, 이것이 장포별대(壯砲別隊)의 시작이 되었다.[『목민심서(牧民心書)』 병전 3조] 또한 6진(鎭)의 성곽(城郭)을 수축하고, 각 진(鎭)마다 조총(鳥銃)과 편전(片箭)을 견고하게 만들고, 화살을 충분히 만들어 오랑캐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후에 영의정신경진(申景禛)이 “이명이 함경도 감사로 있을 때 조총을 많이 만들었는데, 모두 아주 정교하면서도 견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부임한 감사가 감영(監營)에서 만든 것은 대부분 쓸모없는 것들이었습니다. 함경도 각 고을에 비축되어 있는 활과 화살도 수량은 많지만, 모두 쓸모없는 것들이었습니다.”라고 보고한 사실에 잘 나타나 있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19년 5월 17일]

1629년(인조 7)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동래(東萊) 왜관(倭館)의 오래된 폐단을 개혁하였다.[비문] 후금(後金)의 누르하치가 만주를 통일하자, 요동에 살던 명나라 군민(軍民)이 배를 타고 우리나라 선천(宣川) 앞의 가도(椵島)로 몰려왔는데, 파락호(擺落戶: 패잔병) 출신 모문룡(毛文龍)이 스스로 제독(提督)이라고 일컫고, 조선과 명나라에 막대한 군량미를 요구하며 횡포를 부렸다. 이에 1631년(인조 9) 모문룡(毛文龍)의 접반사 이여황(李如璜)이 병을 핑계대고 사임하였는데, 이명(李溟)이 접반사에 임명되어 가도(椵島)로 가서 모문룡과 담판하고 돌아왔다.(『인조실록』 9년 10월 8일) 1632년(인조 10) 다시 황해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대고 부임하지 않았다. 그해 겨울에 형조 참판(刑曹參判)에 임명되었다. 1633년(인조 11) 북방의 정세가 위급해지자, 이명이 함경도 감사 때에 업적을 많이 세웠다고 비변사에서 그를 함경도 관찰사에 천거하면서 다시 부임하게 되었으나, 이듬해에 병으로 사임하고 돌아왔다.(『인조실록』 11년 7월 11일)

1634년(인조 12)부터 1635년(인조 13)까지 2년 동안, 호조·병조·형조의 참판(參判)을 지냈다.[비문]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다. 압록강을 건넌 청나라 오랑캐 군사가 파죽지세로 평양을 거쳐 개성까지 침입하자, 인조는 강화도(江華島)로 피난 을 가기 위하여 길을 떠났다. 그러나 청나라의 선봉부대가 이미 양천강(陽川江)을 차단해 강화도로 가는 길이 끊기면서 급히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다. 이때 인조는 이명을 경기 관찰사에 임명하였는데, 그는 인조에게 “신은 남북의 여러 고을에서 병사들을 통솔해 본 적이 있습니다. 성을 빠져나가 병사들을 모으고 나서 요새를 의지해 싸워야 위세를 떨칠 수 있습니다.”하고 아뢰었으나, 여러 사람들이 반대하면서 시행되지 못하였다.[비문]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47일간 버텼으나, 결국 조선은 청나라와 군신(君臣)의 관계를 맺고, 청나라의 연호(年號)를 쓰며, 해마다 청나라에 세폐(歲幣)를 바치기로 한다는 화의(和議)를 맺고 항복하였다.

1637년(인조 15) 서울 도성으로 돌아온 인조는 이명을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품(陞品)시키고,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대간의 탄핵을 받은 이명이 도저히 감당할 능력이 없다며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자, 돈녕부 지사(知事)에 임명하였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15년 6월 22일] 그해 여름에 다시 함경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임하자, 대호군(大護軍)에 임명하였다.[비문] 1638년(인조 16) 형조 판서(刑曹判書)가 되었다가, 관상감 제조(提調)를 거쳐 훈련도감 제조(提調)가 되었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16년 10월 6일] 1639년(인조 17) 다시 호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명은 나이가 70세라며 치사(致仕)하려고 하였으나, 그의 관리 재능을 알고 있는 인조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특별히 정2품상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품(陞品)시켜, 호조의 일을 맡아보게 하였다. 이때부터 이명은 70세의 노구를 이끌고 6년 8개월 동안(1639년 1월~1645년 9월) 호조 판서로 재임하면서, 호란(胡亂) 이후 수렁에 빠진 국가의 재정을 일으켜 세우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이에 1643년(인조 21) 종1품하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품(陞品)되었다.

1645년(인조 23) 호조 판서이명은 관직을 사면해 주도록 잇달아 상소를 올렸으나, 인조는 그를 형조 판서로 전임시켰다가, 곧 다시 호조 판서에 임명하였다. 이명은 애써 호조 판서의 직임을 사양했으나, 인조가 허락하지 않자, 부득이 병든 몸을 이끌고 호조에 나가서 일을 보았다. 그해 9월, 중풍으로 인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집에서 몸을 정양하였다. 인조는 이명을 한성부 판윤(判尹)·중추부 지사(知事)·비변사 당상관(堂上官) 등의 중요 관직에 연달아 임명하였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인조가 특별히 내의(內醫)를 보내어 이명의 병을 치료하도록 하였으나, 결국 1648년(인조 26) 6월 18일 도성의 서쪽 장릉(長陵) 부근 옛집에서 돌아가니, 향년 79세였다.[비문]

호조판서 이명의 경제 정책

1637년(인조 15) 6월, 이명이 처음 호조 판서에 임명되었을 때, 대간(臺諫)에서는 이를 반대하였다. 대사헌이식(李植) 등은 “난리를 겪은 이후, 백성의 목숨과 나라 재정의 근본이 모두 호조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적임자가 장관이 되지 않으면, 나라 흥망의 기틀이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새로 임명된 호조 판서이명(李溟)은 본래 기백도 있고 일을 맡아서 능숙하게 처리한다는 명성도 있으니, 나라 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됨이 거칠고 사나우며, 융통성이 없어서 일이 정체됩니다.” 하고 체직시키기를 청하였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15년 6월 17일] 이에 이명은 감히 호조 판서를 맡을 수 없다고 끝내 사양하였다. 1639년(인조 17) 1월, 다시 호조 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이명은 그해 7월에 “신의 나이가 70세가 넘어서 기혈이 이미 쇠약해지고, 두 다리는 절뚝거리며, 맥박이 막혀 굴신도 하지 못합니다. 전곡(錢穀)을 출납하고 계산하는 아무런 대책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으니, 남의 비방을 듣기에 충분합니다.” 라며 호조 판서를 사양하자, 인조는 “경은 사직하지 말고, 몸을 조리한 다음에 직임을 보라.”고 하였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17년 4월 29일]

이명(李溟)이 1639년(인조 17) 1월 호조 판서에 취임하였을 때, 나이가 70세였다. 그 후 1645년(인조 23) 9월, 호조판서를 사임하고 형조 판서로 전임되었을 때의 나이가 76세였으므로, 그의 호조 판서 재임기간은 6년 8개월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관리의 나이 70세가 되면, 치사(致仕: 관직에서 물러남)하고 벼슬에서 물러나는 것이 관례였으나, 특별한 경우에는 치사하더라도 관직에 계속 머물기도 하였다. 이명도 70세에 치사(致仕)하였으나, 그의 재무 관리 능력을 잘 알고 있었던 인조가 치사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76세까지 7년 동안 호조 판서를 지냈다. 조선에서 70세에 치사(致仕)하고도 정승이 된 사람은 이서(李舒)·권중화(權仲和)·이광좌(李光佐)·김치인(金致仁) 4인뿐이었다.[『임하필기(林下筆記)』 30권] 게다가 명예직인 정승이 아니고 실무직인 판서를 오랫동안 맡았던 사람은 이명(李溟) 한 사람뿐이었다. 당시 조선은 호란을 겪은 이후, 경제 상황이 워낙 어려웠기 때문에, 인조는 이명과 같은 노련한 경제 전문 관료가 아니면 이를 구출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에서 이 같은 선택을 했던 것 같다.

1640년(인조 18) 4월 호조 판서이명(李溟)이 “신은 호조 판서로서 재정과 부세에 대한 일을 총괄하여 다스리고 있습니다. 평상시 아무 일이 없을 때에도 오히려 제대로 직임을 수행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지금 나라 안의 재정이 고갈되어 있는 때에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세금을 많이 징수하면, 나라의 근본이 무너지게 될 것이고, 세금을 적게 징수하면 나라의 경비가 부족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위로 국가의 재정을 풍족하게 만들고, 아래로 백성의 항산(恒産)을 제도적으로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라는 차자를 올렸다. 당시 세금을 공평하게 부과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였으나, 왜란(倭亂)과 호란(胡亂) 이후에 세금을 내지 않는 은결(隱結)이 증가하였으므로, 전국적으로 은결(隱結)을 찾아내기 위하여 양전(量田) 사업을 대대적으로 시행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관료들과 손을 잡은 지방의 토호들이 대북 출신 이명의 양전 사업에 크게 반발하였다.

<병자호란> 이후, 조정에서는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군사를 개편하고 무기를 제작하려고 필사적인 노력하였는데, 이 일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재정이 필요하였으므로, 나라의 경비를 절약하여, 필요한 재정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이에 호조 판서이명은 비변사와 상의하여 국가의 모든 관부(官府)와 병영(兵營)에서 쓰는 경비를 대폭 줄였을 뿐만 아니라, 인조에게 보고하여 궁중에서 쓰는 비용도 크게 줄였다. 1640년(인조 18) 4월 호조 판서이명(李溟)은 “호란 이후, 성상께서 오직 재정을 염려하여, 제향(祭享)과 어공(御供: 각 전의 공물)을 모두 정파(停罷)하였을 뿐만 아니라, 궁중의 모든 쓸데없는 잡비를 절약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라고, 차자를 올려 임금을 칭송하였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18년 4월 12일] 이 사실로 미루어 호조 판서이명과 인조가 나라의 재정을 확보하기 위하여 서로 손을 잡고 나라의 경비와 궁중의 비용을 절감하려고 노력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호조 판서이명은 또한 방납(防納)의 폐단을 막으려고 애썼다. 방납은 시정 모리배가 지방의 특산물인 공물(貢物)을 중앙의 호조에 대신 납부하고 그 지방에 가서 물건 값을 몇 배로 받는 것을 말하는데, 대개 모리배가 그 지방의 수령과 손을 잡고 대납(代納)하는 경우가 많았다. 1639년(인조 17) 5월, 경연(經筵)에서 특진관 이명(李溟)은 인조에게 “방납(防納)이 가장 고질적인 폐단입니다. 이익을 도모하는 무리가 온갖 계책으로 물가를 조작하여 백성들을 침탈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공물(貢物)만 방납하였는데, 오늘날에는 전세(田稅)마저 방납합니다. 만일 지금 금지하지 않으면 그 폐단을 없애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하고 아뢰니, 인조가 “경의 말이 매우 합당하다. 호조에서 적발하여 엄중하게 다스려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이명은 “비록 적발하더라도 수령은 겨우 파면만 되니, 그 죄를 징계하기에 부족합니다.” 하고 아뢰니, 인조가 “앞으로 모두 잡아다가 국문(鞠問)하여 죄를 다스리도록 하라.”고 하였다.(『인조실록』 17년 5월 25일) 이에 호조 판서이명은 방납(防納)을 일절 금지하도록 하였다.

당시 호조가 당면한 가장 큰 난제는 세폐(歲幣)의 수량을 조절하는 일이었다. 청나라에서는 명나라와 싸우는 데에 필요한 물자를 조선의 세폐에서 충당하려고 하였는데, 청나라가 해마다 요구하는 세폐(歲幣)는 조선에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수량이었다. 청나라에서 요구한 세폐(歲幣)의 물목(物目)을 보면, 황금 1만 냥, 백금 1천 냥, 수우각궁면(水牛角弓面) 2백 부(副), 단목(丹木) 2백 근(斤), 환도(還刀) 20자루, 표피(豹皮) 1백 장, 녹비(鹿皮) 1백 장, 다(茶) 1천 포(苞), 수달피(水獺皮) 4백 장, 청서피(靑黍皮) 3백 장, 호초(胡椒) 10근, 좋은 요도(腰刀) 26자루, 좋고 큰 종이 1천 권, 좋고 작은 종이 1천 5백 권, 오조용문석(五爪龍文席) 4벌, 각종 화석(花席) 40벌, 백저포(白苧布) 2백 필, 여러 가지 빛깔의 세주(細紬) 2천 필, 세마포(細麻布) 4백 필, 여러 가지 빛깔의 세면포(細棉布) 1만 필, 베[布] 1천 4백 필, 쌀[米] 1만 포(包)였다.

조선은 명나라에 대해서도 공물(貢物)로 바쳤는데, 금은(金銀)·나전(螺鈿)·면주(綿紬)·저포(苧布)·용문석(龍紋席)·세화석(細花席)·표피(豹皮)·달피(獺皮)·황모필(黃毛筆)·백면지(白綿紙)·인삼(人蔘)·종마(種馬)의 12가지 물목으로 모두 조선의 토산물이었다.[『대명회전(大明會典)』 105권] 그러나 청나라에서는 만주에서 생산되는 인삼(人蔘)과 종마(種馬)의 2가지 물목을 제외하고, 그 대신에 부족한 쌀과 각종 포목(布木)을 요구하였다. 그 뿐 아니라 활의 재료인 남방의 수우각(水牛角: 물소 뿔)·조선의 환도(還刀)·일본의 요도(腰刀)의 3가지 물목을 추가하였는데, 모두 무기류였다. 호조 판서이명은 각 지방에서 호조에 바치는 종이·용문석(龍文席)·저포(苧布)·세주(細紬) 등의 토산물 중에서 상품을 골라서 세폐로 보냈다. 표피(豹皮)·녹비(鹿皮)·수달피(水獺皮)·청서피(靑黍皮) 등은 각 지방의 병영(兵營)과 수영(水營)에서 마련하도록 하였는데, 특히 표피(豹皮)를 구하기가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방납(防納)은 일체 금지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막대한 양의 쌀과 각종 포목(布木)은 전국의 전결(田結)에서 일정량을 징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호조 판서이명은 경상도·전라도·경상도 3도(道)에 양전(量田)을 실시한 후, 전결(田結)에서 세폐미(歲幣米)와 세폐포(歲幣布)를 거두었다. 1639년(인조 17) 8월, 인조가 호조 판서이명에게 “세폐미(歲幣米)는 양전한 다음 어느 도에서 몇 승(升)을 더 거두는가.” 하고 물으니, 이명은 “3남(三南)에서 1결당 2승씩 더 거둡니다.” 하고 아뢰었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18년 11월 18일] 당시 3남 지방에서는 잇달아 흉년이 들었으므로 굶주리는 백성들에게 세폐미(歲幣米)를 거둘 수 없는 형편이었으나, 세폐미(歲幣米)가 해마다 1만 포(包)나 되었으므로, “이러한 부담이 그대로 가면, 나라가 반드시 피폐해질 것이다.” 하고 호조 판서이명은 탄식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청나라 사신 용골대(龍骨大)와 역관(譯官) 정명수(鄭命壽) 등이 올 때마다 그럴듯한 핑계를 대고 10에 9를 줄여서 1천 포(包)만을 보냈으며, 3남(三南)에서 거두는 각종 포목(布木)도 3만 5천 필을 줄여서 몇 천 필만을 보냈다. 1639년(인조 17) 가을부터 해마다 보내던 세폐를 줄여서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청나라 군사가 물화가 풍부한 중국본토를 거의 점령하게 되자, 조선의 쌀과 포목이 별로 필요하지 않게 되었던 까닭도 있었다.

그러나 세폐(歲幣)로 책정된 황금 1만 냥, 백금 1천 냥을 조선에서 도저히 구할 수가 없었다. 1639년(인조 17) 8월, 호조판서이명이 “청나라에서는 금값이 매우 싸고 우리나라처럼 아주 귀하지 않으니, 청나라에서 사오는 것이 좋겠습니다.”하고 아뢰자, 인조는 “이번 사신 행차에 은화 1천 냥을 가지고 가서 숨기지 말고 심양에서 황금을 구매해서 오게 하라. 아니면, 청나라 역관(譯官) 정명수(鄭命壽)에게 통지해서 황금을 사오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라고 하며 찬성하였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17년 8월 3일] 명나라는 왜구를 막기 위한 해금정책을 시행하여 일본 상인과의 교역을 금지하였으므로, 조선은 동래(東萊)에서 중국 비단과 일본의 은화를 교역하는 중개 무역을 행하였다. 조선에는 중개무역을 통하여 유입된 일본 은화가 상당히 많았으므로, 호조판서이명은 이 은화를 가지고 심양으로 가서 황금과 백금을 구매하도록 하여 다시 청나라에 세폐로 보냈던 것이다.

병자호란 이후, 소현세자(昭顯世子) 내외와 봉림대군(鳳林大君) 내외가 청나라 심양(瀋陽)에 볼모로 잡혀가 질자관(質子館)에 있었는데, 세자시강원의 관리들이 모두 따라갔으므로, 질자관에는 항상 4∼50여 명이 머물고 있었다. 호조 판서이명은 질자관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식량과 생활 용품을 매달 공급하였다. 또한 심양과 서울을 왕래하면서 온갖 물품을 요구하는 청나라 사신에게 보내는 물품도 호조에서 수응하여 공급하였는데, 백성들에게는 일절 취렴(聚斂)하지 않았다. 이에 인조는 “호조에 적임자를 얻으니, 백성들이 그 혜택을 입는다.”며 매우 기뻐하였다. 당시 조선에 파견된 청나라 사신 중에서는 장수 용골대(龍骨大)와 역관(譯官) 정명수(鄭命守)의 횡포가 가장 심하였다. 평안도 은산(殷山)의 관노였던 정명수는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심양으로 사로잡혀가 적장 용골대의 심복이 되었는데, 그는 이름을 굴마홍[古兒馬紅]이라고 바꾸고 역관(譯官)이 되어 조선과 청 두 나라 사이의 교섭 사무를 도맡아 처리하였다. 청나라의 조선침략에 앞잡이 노릇을 한 역관 정명수는 이후, 청나라의 세력을 믿고 조정에 압력을 가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용골대의 지시를 받고 조선에서 청나라에 보내는 세폐 중에서 은화 2천 6백 냥을 가로채고, 감과 배를 각각 1천 개씩을 빼돌리기도 하였다. 결국 이들의 횡포를 견디다 못한 질자관의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정뇌경(鄭雷卿)과 시강원 아전 강효원(姜孝元)이 심양에서 정명수를 암살하려다가, 사전에 발각되면서 교수형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호조 판서이명은 금·은·포목 등을 그 품질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어 관리하며 호조 안의 모든 일을 일일이 챙겼는데, 특히 전곡(錢穀)의 출입을 정밀하고 엄격하게 관리하였다. 해마다 청나라 사관(査官: 검사관)이 와서 세폐의 물품을 골라내면, 3∼4백 필의 말에 실어서 청나라로 보냈다. 청나라에 세폐(歲幣)로 보내고 남은 물품은 나라의 창고에 저장해 놓았는데, 수만 냥의 금화(金貨)·은화(銀貨)와 수만 필의 포목(布木)등이 가득 쌓이게 되었다. 호조 판서이명은 인조에게 “국가에 급한 일이 생기면 이것만은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아뢰니, 인조가 크게 기뻐하며 물품을 아끼고 함부로 쓰지 않았다.[비문] 이명은 또한 물가를 공평하게 유지하기 위하여, 쌀값이 오르면 창고의 미곡을 방출하고, 쌀값이 내리면 창고에 미곡을 매입하였는데, 몇 해만에 물가가 안정되고 나라의 창고에 미곡이 넘쳐 나서 창고 밖에까지 미곡을 쌓아 두게 되었다.[비문]

1643년(인조 21) 1월, 인조는 “호조 판서이명(李溟)은 용도를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하여 나의 뜻에 부응하니, 특별히 한 자급을 올려 주라.”고 하였으므로, 종1품하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품(陞品)되었다. 숭정대부는 재상(宰相)에게 주는 극품(極品)으로서, 인조는 곧 이명을 재상으로 임명하려고 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서인(西人) 출신 사관(史官)들은 “이명은 오랫동안 호조 판서를 맡고 있으면서 아랫사람을 수탈하고 윗사람에게 아부하며,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으므로, 그가 가는 곳마다 원성이 자자하였는데, 어찌 ‘백성을 사랑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는 곧 백성의 해충이고 나라의 좀 벌레이다. 나라의 좀 벌레와 백성의 해충에게 ‘용도를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한다’고 하여 자급을 올려 포상하니, 어찌 괴이하지 않은가.”라고 하며 그를 악평하였다.(『인조실록』 21년 1월 6일) 그러나 정론(正論)을 펴는 사관들은 “선조·인조 이후로 나라 살림을 맡은 호조 판서 가운데 이명만큼 훌륭한 사람은 없었다.” 고 평가하였다.[『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29권]

성품과 일화

얼굴이 우뚝하고 볼이 풍만하였다. 성품이 침착하고 굳세었으며, 행동이 슬기롭고 말과 웃음이 적었다.[비문]

이명의 할아버지 이량(李樑: 1519~1582)과 아버지 이정빈(李廷賓: 1539~1592)은 모두 유명한 인물이다. 할아버지 이량은 명종의 왕비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의겸의 누이)의 외삼촌이고, 정사룡(鄭士龍)의 문인이다. 명종이 어머니 문정왕후(文定王后)와 외삼촌 윤원형(尹元衡)의 전횡을 견제하려고, 이량을 중용하여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삼았다. 이량은 명종 후기에 윤원형을 누르고 정권을 잡았으며, 이감(李戡)·신사헌(愼思獻) 등과 결당해서 자기 당파를 만들어 기대승(奇大升)·허엽(許曄)·윤두수(尹斗壽)·이산해(李山海) 등의 사림파와 대립하였다. 그러나 조카인 심의겸(沈義謙)과 기대항(奇大恒)의 탄핵으로 평안도 강계로 귀양 가서 죽었다. 아버지 이정빈은 알성 문과에 장원 급제하고, 이조 정랑과 사간원 정언(正言)을 지냈으나, <임진왜란> 때 왜적을 만나서 피살되었다. 서인들은 이정빈에 대하여 “외척 권신(外戚權臣)의 아들인 그가 과거 공부도 하지 않고 표절로 장원을 차지하고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하였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므로 이명(李溟)과 이충(李冲) 형제는 할아버지 이량과 아버지 이정빈 때문에 서인이 득세하던 선조와 인조 때에는 환영 받지 못하였다.

이명(李溟)은 형 이충(李冲: 1568~1619)과 두 살 차이였는데, 부모가 살아계실 때에도 형제가 부모를 모시고 한 집안에 의좋게 함께 살았을 뿐 아니라, 부모가 돌아간 뒤에도 재산을 나누지 않고 평생 한 집에서 같이 살았다. 이명은 무슨 일이든지 일을 맡아서 처리할 때에 반드시 그 대의(大義)를 먼저 생각하고 사사로운 작은 사정을 돌아보지 않았다. 나중에 나라의 재정을 맡아서 다스릴 때에는 더욱 업무의 규모가 커졌으나, 시세(時勢)를 보아가며 이에 맞추어 경제 정책을 시행하였다. 무려 7년 동안 기쁨과 노여움을 잊은 채 나라의 경제를 운영하여 왜란(倭亂)과 호란(胡亂) 이후 수렁에 빠진 국가 경제를 구출하였으므로, 나라가 부유해지고 백성들이 잘 살게 되었다. 이명이 관찰사로 나가서 다스리던 지방에는 모두 추모비(追慕碑)가 세워졌다. 이명이 세상을 떠나자, 관청의 서리(胥吏)로부터 장사하는 상인(商人)과 수레를 끄는 종에 이르기까지 모두 와서 “우리들 소인들이 대감에게서 받은 은혜를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하고 목을 놓아 통곡하였다. 장례를 치르던 날, 서울 도성의 백성들이 통곡하며 상여를 전송한 사람들이 수 천 명에 이르렀다.[비문]

광해군(光海君) 초기에 이명이 어사(御史)로 의주(義州)에 갔을 때, 마침 이이첨(李爾瞻)이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재임하고 있었다. 이이첨은 이명이 같은 대북(大北)의 정인홍(鄭仁弘)의 제자라고 하여 극진하게 대우해 주었다. 그러나 이명은 서울로 돌아올 때, “후일 나라를 그르칠 자는 틀림없이 이 사람이다.”라고 사사로이 말하였다.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이이첨은 크게 분개하였다. 그 후, 이명이 이조 정랑(吏曹正郞)이 되었을 때, 이이첨이 이조 참판(吏曹參判)이었으므로, 두 사람은 항상 인사 행정을 함께 논의하게 되었다. 이조 참판이이첨이 정조(鄭造)라는 사람을 천거하였을 때, 이조 정랑이명은 반대하였으나, 이이첨은 결국 정조를 사헌부 지평(持平)으로 임명하였다. 이때 정조의 임명을 끝까지 반대하던 이명은 정고(呈告)하고 오래도록 관청에 출사하지 않았다. 이에 분노한 이조 참판이이첨은 마침내 이명을 이조 정랑에서 파직시켜버렸다.[비문] 정조는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출하자는 의논을 가장 먼저 제기한 사람이다. 당시 이명은 광해군의 처남 유희분(柳希奮)과 가까이 지내면서, 이이첨의 전횡을 견제하려 하였으므로, 항상 이이첨과 대립하였다.

선조는 세상을 떠날 때, 일곱 명의 조정 중신을 불러서 유명(遺命)으로 어린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보호해달라는 부탁하였는데, 사람들은 이들을 <유교(遺敎) 7신(臣)>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광해군이 즉위한 후, 정인홍(鄭仁弘)의 문객인 강익문(姜翼文)이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자, 대간(臺諫)에서는 모두 ‘<유교 7신>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강익문의 아들 강대수(姜大遂)와 절친했던 이명은 강대수를 통하여 강익문에게 대간에서 발론(發論)할 때 ‘<유교 7신>은 죄가 없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주장하도록 간절히 부탁하였다. 결국 ‘유교 7신’의 탄핵은 중단되었는데, 그 배후에 있는 정인홍이 제자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유교 7신>에게 죄를 주지 않았던 것이다.[비문] 정인홍은 이이첨과 함께 대북을 이끌었으나, 대의(大義) 명분에 어긋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았던 반면, 이이첨은 명분보다 실리를 중시하였으므로, 서인·남인과 번번이 충돌하여 비난을 받았다.

1613년(광해군 5) 영창대군(永昌大君) 옥사(獄事)가 일어났을 때, 이명은 추국청(推鞫廳)의 문사 낭관(問事郎官)으로 죄수의 추국(推鞫)에 참여하였다. 죄수가 역모(逆謀)를 자백하면서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연루시키려고 하자, 낭관이명은 “임금의 위엄이 엄중한데, 죄수가 어찌 감히 허툰 말을 하려는가.”라고 꾸짖으며 이를 저지하였고, 영의정이덕형(李德馨)도 “왕자는 죽을죄를 지었더라도 너그럽게 처리해야 한다.”며 호응하였다. 그 뒤에 삼사(三司)에서 발론(發論)할 때, 대간(臺諫)들이 정승 이덕형의 말을 문제 삼아 법으로 다스릴 것을 논의하자, 홍문관 응교(應敎)이명은 “대신(大臣)을 죽일 수는 없습니다.” 라고 정색하며 반대하였다. 삼사(三司)의 의논이 통일되지 못하여 의견이 떠들썩하게 들끓었으므로, 홍문관 응교이명은 소매를 떨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와 버렸다.[비문] 결국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삼사(三司)에서 대북 출신 대간(臺諫)들이 서인의 영수 이덕형을 탄핵하려고 하다가, 응교이명의 완강한 반대로 무산되었던 것이다.

1642년(인조 20) 10월 훈련도감 군졸들이 삭료(朔料)를 받을 때, 호조에서 되박을 속이고 묵은 쌀을 주면서 쌀에 콩을 많이 섞어서 지급하였다고 훈련대장구굉(具宏)에게 호소하자, 구굉이 이를 인조에게 고하였다. 인조가 형조로 하여금 그 사실을 조사하도록 하자, 호조 판서이명은 평소에 가까운 형조의 낭관에게 부탁하여 그 증거를 은폐하려고 하였는데, 형조 판서원두표(元斗杓)가 그 낭관을 붙잡아 엄중히 국문하여 공사(供辭)를 받아냈다. 이때 이명과 원두표가 서로 소장을 올려 각자의 주장을 변론하였고, 호조 낭관안정섭(安廷燮) 등이 상소하여 이명의 억울함을 변론하였는데, 승정원이 이를 기각하였다. 대간(臺諫)에서는 “낭관이 외람되게 사직하는 상소를 올려 자기들의 장관을 비호한 일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모두 파직하소서.” 하고 아뢰었는데, 인조는 그 일을 주도한 낭관만 파직시켰다. 그 후, 원두표(元斗杓)가 이명의 뒤를 이어 호조 판서(戶曹判書)의 직무를 승계하였는데, 원두표는 이명을 몹시 싫어하였으므로, 전임자 이명의 업적을 과소평가하였다. 그러나 원두표가 복잡한 호조의 업무를 파악하고, 호조 안의 어려운 정책을 하나하나 챙기면서 “정말 사람은 알기가 쉽지 않구나. 이명이 한 일의 규모와 정책은 남들이 도저히 미치지 못할 점이 많다. 나는 재정 규모를 더 키우지 않을 것이며, 그의 정책을 쓸데없이 어지럽게 고치는 일도 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탄복하였다고 한다.[비문]

인조 때 서인(西人)이 대간(臺諫)을 지배하면서 대북(大北) 출신 이명을 끊임없이 탄핵하였다. 특히 서인(西人) 출신 사관(史官)들은 실록의 간주(間註)에 이명에 대하여 입에 담을 수 없는 비난과 욕설을 퍼부었다. 1648년(인조 26) 6월 18일 이명의 졸기(卒記)를 보면, “중추부 지사(知事)이명(李溟)이 돌아갔다. 이명은 기국이 컸으나, 너무 혹독하고 난폭하였다. 호조 판서로 있던 7년 동안에 상당히 유능하다는 명성을 얻었으나, 사람들은 그가 재물을 취렴(聚斂)했다고 비난하였다.” 하였다.(『인조실록』 26년 6월 18일) 그러나 인조는 이명이 죽었다는 부음(訃音)을 듣고 여러 신하들에게 “이명은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임명되어 말은 하지 않으면서도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나라의 재정을 풍족하게 만들었으니, 이처럼 재능이 많은 사람을 내가 크게 쓰지 못한 게 한스럽다.” 하였고, 영의정김류(金瑬)는 “이명이 관직을 맡아서 직무를 충실히 행한 것은 오로지 나라를 위하는 대의(大義)에서 나온 것뿐이었습니다.” 하였는데, 인조는 이명이 살아 있을 때 그가 오로지 나라를 위하여 마음과 몸을 다하여 힘쓴 점을 극구 칭찬하였다.

1638년(인조 16) 6월 초 하룻날 밤에 큰 호랑이가 또 서울에 들어와 거리에 돌아다니다가, 형조 판서이명(李溟)의 집에서 기르던 개를 물고 갔다.[『속잡록』] 이때 한성부에서는 “인경궁(仁慶宮) 남쪽 성문 밖에 호랑이가 들어왔는데, 지난달 29일과 이달 1일 밤중에 계속 횡행하여 형조 판서이명(李溟)의 집에서 기르던 개를 물어 갔으니 매우 놀랍습니다. 6개월 전에 원유사(苑囿司)에서 호랑이를 추적하여 사로잡은 후, 근래에는 이런 일이 전혀 없었는데, 도성 안에서 이런 걱정거리가 생기게 되었으니, 훈련도감으로 하여금 함정(陷穽)을 설치하고 호랑이를 함정으로 몰아넣어서 잡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아뢰니, 임금이 아뢴 대로 하라고 명하였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16년 6월 2일]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 장단(長湍) 판부리(板浮里)의 언덕에 있는데, 미수(眉叟)허목(許穆)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이 남아있다. 첫째부인 송씨(宋氏)와 둘째부인 양씨(梁氏)의 무덤도 같은 언덕에 나란히 있다.[비문] 또 염원(恬軒)임상원(任相元)이 지은 이명(李溟)의 묘지명(墓誌銘)도 남아 있다.[『염헌집(恬軒集)』 33권]

첫째부인 은진 송씨(恩津宋氏)는 사헌부 감찰(監察)송담수(宋聃壽)의 딸인데, 자녀는 1남 1녀를 낳았고, 둘째부인 양씨(梁氏)는 부장(部將)양사홍(梁思洪)의 딸인데, 4남을 낳았다. 장남 이민개(李敏開)는 진사(進士)로서 주부(主簿)를 지냈고, 차남 이민수(李敏樹)는 문과에 급제하여 의주 부윤(義州府尹)·형조 참의(刑曹參議)를 지냈는데, 형 이충(李冲)에게 양자로 갔고, 3남 이민발(李敏發)은 무과에 급제하여, 전라도 좌수사(左水使)·영흥 부사(永興府使)를 지냈으며, 4남 이민화(李敏華)는 진사(進士)로서 군수(郡守)를 지냈고, 5남 이민백(李敏白)은 첨정(僉正)을 지냈는데, 친족 이서(李曙)에게 양자로 가서, 완안군(完安君)에 봉해졌다. 딸은 파주 목사(坡州牧使)민진량(閔晉亮: 판서 민성휘의 아들)에게 시집갔다.[비문] 측실(側室)에서 1녀가 있었는데, 8세 때 선발되어 심양(瀋陽)에 볼모로 갔다.

1615년(광해 7년) 9월, 이명(李溟)과 3남 이민발(李敏發)이 함께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루되어 수감되었다. 이때 함께 체포되었던 동몽교관(童蒙敎官)심경(沈憬)이 풀려나면서 “외간에서 장차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출할 것이라는 말이 떠돕니다.”라고 하니, 광해군이 크게 노하며 “너는 그런 말을 어디에서 들었는가.”하고 물었다. 심경이 공초(供招)하기를, “이명(李溟)의 자식(3남 이민발)이 신에게 글을 배웠는데, 응교(應敎)로 있는 아버지 이명(李溟)이 정고(呈告)하고 집에 있다고 하기에, 신이 이민발에게 ‘너의 아버지가 정고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고 물었더니, 이민발이 ‘가까운 장래에 인목대비를 폐출하자는 의논이 있을 것이므로, 이를 피하기 위해서 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이명과 3남 이민발 부자는 3개월 만에 감옥에서 풀려났다.

1623년 3월,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난 후, 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 등 대북파를 숙청할 때 이명(李溟)과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고 있었던 차남 이민수(李敏樹)도 함께 체포되어, 대북파로 몰려서 함께 처형당할 뻔하였다. 그러나 <인조반정>을 최초로 계획한 이서(李曙)는 이명의 5남 이민백(李敏白)을 양자로 입양하였기 때문에 신경진(申景禛)·이귀(李貴)와 거사를 논의할 때 가까운 친족인 황해도 감사이명(李溟)과 영의정박승종(朴承宗) 등은 죽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서는 이미 여러 차례 이명을 설득하여 거사에 참여시키려고 하였으나, 이명이 이를 거절하였다. 이귀가 평산 군수(平山郡守)로 있을 때 황해도 감사이명이 평산으로 순찰하러 온다는 말을 듣고, 이서는 심기원(沈器遠)과 함께 감사이명을 맞이하여, 거사에 참여하도록 설득하였으나, 이명은 끝내 거절하였다. 그때 감사이명이 바로 당국에 고발하지 않았던 까닭은 5남의 장래를 생각해서, 그 양부 이서(李曙)를 보호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호조 판서이서의 보호를 받은 이명(李溟)과 차남 이민수(李敏樹)는 바로 풀려나서 관직에 복귀하였다. 5남 이민백(李敏白)은 <인조반정>의 1등 공신 이서의 아들로서 완안군(完安君)에 봉해졌다.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기언별집(記言別集)』
  •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동춘당집(同春堂集)』
  • 『명재유고(明齋遺稿)』
  • 『미수기언(眉叟記言)』
  • 『속잡록(續雜錄)』
  • 『약천집(藥泉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염헌집(恬軒集)』
  • 『응천일록(凝川日錄)』
  • 『대명회전(大明會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