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겸(李鳴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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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 = ?]. 조선 초기 세종(世宗)~세조(世祖) 때의 문신. 형조 참의(參議)와 제주목사(濟州牧使), 한성부윤(漢城府尹) 등을 지냈다. 호는 지산(地山)이고, 본관은 벽진(碧珍)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이조 판서(判書)를 지낸 이신지(李愼之)이며, 어머니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권옹(權雍)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이희경(李希慶)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이군상(李君常)이다.

세종~문종 시대 활동

숙부인 이사지(李思之)로부터 학문을 익힌 이명겸은 1423년(세종 5)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집현전(集賢殿)박사(博士), 집현전 부교리(副校理) 등의 관직을 거쳐 1435년(세종 17)에는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 찬집에 참여하였다.(『세종실록』 17년 6월 8일) 이후 평안도경력(平安道經歷)으로 임명되어 외직 생활을 하다가 1439년(세종 21)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이 되었다.(『세종실록』 21년 11월 13일) 그 뒤 제주경차관(濟州敬差官)으로 파견되었다가 제주목사로까지 재직한 이명겸은 1450년(문종 즉위년) 안무사(按撫使)로써 제주 주변을 횡행하던 왜선(倭船)을 체포한 공을 인정받아 옷과 술을 하사받기도 하였다.(『문종실록』 즉위년 10월 18일)

1451년(문종 1) 중추원(中樞院)첨지사(僉知事)에 임명되었다가,(『문종실록』 1년 9월 2일) 얼마 후 다시 제주목사로 부임하면서 제주의 방비를 엄격하게 하고자 제주 목관·정의현·대정현 등에 전함을 나누어 배치해줄 것을 요청하였다.(『문종실록』 1년 9월 28일) 단종(端宗) 즉위 이후 형조 참의(參議)에 올랐다가,(『단종실록』 즉위년 12월 11일) 2개월 후인 1453년(단종 1) 2월부터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재직하였다.(『단종실록』 1년 2월 8일) 이듬해 8월 한성부윤에 제수되어 1455년(단종 3) 3월에는 사은사(謝恩使)로 표문(表文)과 해청(海靑)을 가지고 명(明)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단종실록』 3년 3월 28일)

세조 즉위 이후 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었으며,(『세조실록』 1년 12월 27일) 1456년(세조 2)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재직하였다.(『세조실록』 2년 7월 25일) 이후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으나 세조 즉위의 부당함을 깨닫고는 세조의 만류를 뒤로 하고 관직을 내려놓은 후 경상도 합천의 초계(草溪)의 명곡(椧谷)마을로 내려가 생활하다 사망했다고 전한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