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맥(李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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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55년(세조 1)∼1528년(중종 23) = 74세]. 조선 중기 연산군(燕山君)~중종(中宗) 때의 문신.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과 돈녕부(敦寧府) 동지사(同知事) 등을 지냈다. 자는 정부(井夫)이고, 호는 일십당(一十堂)이다. 본관은 고성(固城)이며, 거주지는 서울 청파동(靑坡洞)이다. 아버지는 돈녕부 정(正)을 지내고 예조 참판(參判)에 추증된 이지(李墀)이고, 어머니 연일 정씨(延日鄭氏)는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지낸 정보(鄭保)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좌의정을 지낸 철성부원군(鐵城府元君)이원(李原)이며, 증조할아버지는 고려 때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낸 이강(李岡)이다. 병조 참판이륙(李陸)의 동생이자, 형조 판서(判書)이칙(李則)의 사촌이며, 우의정윤호(尹壕)의 외사촌으로, 윤호의 딸이며 중종의 어머니인 자순대비(慈順大妃)의 5촌 아저씨이기도 하다. 좌의정성세창(成世昌)의 처삼촌이다.

연산군~중종 시대 활동

1474년(성종 5) 사마시(司馬試)의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0세였다. 어머니는 그를 낳자마자 세상을 떠났으며, 1486년(성종 17) 아버지 상(喪)을 당하였다.

1498년(연산군 4)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44세였다. 이후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에 보임되었으나,(『연산군일기』 4년 8월 10일) 이듬해인 1499년(연산군 5) 계모 남씨(南氏)의 상을 당하였다. 상례(喪禮)를 마친 후 다시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었고, 교서관(校書館) 교리(校理)와 예조 정랑(正郞)을 거쳐 종부시(宗簿寺) 첨정(僉正)으로 승진하였는데, 춘추관(春秋館) 편수관(編修官)을 겸임하였다. 1503년(연산군 9) 사헌부 장령(掌令)에 임명되었으나,(『연산군일기』 9년 10월 6일) 연산군의 총애를 받던 장숙용(張淑容)의 전횡을 탄핵하다가 충청도 괴산(槐山)으로 유배되었다.(『연산군일기』 10년 3월 15일)

1506년(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 성균관 사예(司藝)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사헌부 장령을 겸임하였다. 1507년(중종 2) 사복시(司僕寺) 부정(副正)이 되었고, 사간원 대사간을 거쳐 승정원(承政院)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임명되었다.(『중종실록』 2년 9월 19일),(『중종실록』 2년 11월 23일) 1508년(중종 3) 중추부(中樞府) 첨지사(僉知事)가 되었다가 공조 참의(參議)로 전직되었다. 1509년(중종 4) 다시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장례원(掌隸院) 판결사(判決事)로 전직되었다.(『중종실록』 4년 8월 7일) 1510년(중종 5) 중추부 첨지사로 교체되었다가 1511년(중종 6) 다시 장례원 판결사에 임명되었다. 1512년(중종 7) 돈녕부 도정(都正)이 되었고, 1513년(중종 8) 호조 참의에 임명되었으며,(『중종실록』 8년 3월 13일) 1515년(중종 10) 또 다시 장례원 판결사에 임명되었다가 1525년(중종 20) 돈녕부 동지사가 되었다.(『중종실록』 20년 11월 11일) 1528년(중종 23) 10월 25일 집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74세였다.

저서에 『태백일사(太白逸史)』가 있다.

성품과 일화

이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이 대쪽 같이 곧았으며, 밖으로 드러나게 꾸미지 않았다. 종친(宗親)이 조정에 가득하였으나, 소원한 사람들까지도 일가(一家)처럼 생각해서, 정성으로 사람을 대하여 조금도 거슬린 적이 없었으므로 이웃 사람들의 환심을 얻었다. 3번이나 옥사를 판결하는 장례원 판결사가 되었으나 마음이 공평하고 지식이 명철하여 막힘없이 일을 처리하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광주(廣州) 관내 서쪽 율촌(栗村)에 있고, 좌의정성세창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

첫째 부인 여양 진씨(驪陽陣氏)는 광양현감(光陽縣監)진치중(陳致中)의 딸인데, 자녀가 없다. 둘째 부인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호군(護軍)권상평(權尙平)의 딸인데, 자녀는 2남 3녀를 두었다. 장남 이린(李嶙)은 합천군수(陜川郡守)이고, 차남 이구(李嶇)는 거창현감(巨昌縣監)이다. 장녀는 개성유수(開城留守)윤탁(尹倬)의 처가 되었고, 차녀는 홍주현감(洪州縣監)이영복(李永福)의 처가 되었으며, 3녀는 계산군(桂山君)이수계(李壽誡)에게 시집갔다.

참고문헌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용재집(容齋集)』
  • 『음애일기(陰崖日記)』
  • 『패관잡기(稗官雜記)』
  • 『해동야언(海東野言)』
  • 『충재집(冲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