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대(伊羅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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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기 두만강 유역에 거주한 여진족 추장.

개설

이라대는 선조대에 종성진(鍾城鎭)에 소속된 번호(藩胡) 추장으로 상당한 세력을 가진 자였다.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4년경 두만강 유역의 번호가 조선에 반발할 때, 그가 중심이 되어 종성과 온성 등지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방어가 단단하게 이루어지자 심처(深處) 올적합(兀狄哈)에게 청병하여 조선을 공격하였다.

활동 사항

임진왜란이 발발한 뒤, 함경도 지역은 가등청정(加藤淸正)에게 함락되었다. 곧 정문부 등의 활약으로 조선은 함경도를 회복하였지만, 조선은 여러 사정상 이 지역에 관심을 기울일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전부터 조선에 조공하며 필요한 물품을 확보하던 두만강 유역의 번호들은 큰 타격을 입었다. 그리고 이들 중 일부는 점차 조선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1594년(선조 27) 7월에 골간올적합(骨看兀狄哈)이 서수라(西水羅)를 공격한 이래 번호의 공격이 지속되었다. 종성 등지에서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이라대는 주변 번호를 준동하여 조선을 공격하였다. 1588년(선조 21) 3월에 당시 함경북도병마절도사(咸鏡北道兵馬節度使)였던 이일이 증보(增補)한 『제승방략』에 두만강 내외의 번호 추장과 부락(部落), 거리, 규모 등의 정보가 기재되어 있다. 이때 이라대는 종성부 소속의 번호로, 종성에서 서쪽으로 3식(息) 25리(里)(115리, 약 45.2㎞)가량 떨어진 동량개(東良介) 부락에서 100호(戶)를 거느렸다고 한다. 다른 번호 추장들이 20호·30호·50호 등을 거느리고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라대는 상당한 세력을 갖춘 추장이었다.

이라대는 주변 번호들과 함께 영건보(永建堡)·미전보(美錢堡) 등을 두 차례나 포위하였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자 홀라온우지개(忽刺溫亐知介) 등에게 청병하여 수시로 출몰하였다(『선조실록』 27년 9월 28일). 특히, 그의 심복인 거추(巨酋) 역수(易水)가 영건보의 휴악(鵂嶽) 부락에 주둔하며 조선에 강하게 반항하였다. 결국, 역수는 함경북도병마절도사정현룡에게 토벌당하였다(『선조실록』 27년 10월 11일). 이때 정현룡은 골격장(鶻擊將)정시룡에게 전에 조선을 공격한 적이 있는 투정내(投丁乃)의 부락도 토벌하게 하였다. 이후 이라대에 대한 기록도 보이지 않는다.

한편, 1466년 5월에 함길도관찰사오응이 여진의 변고에 대비하고 있다는 내용을 보고하였다. 이때, 올량합(兀良哈) 대이사(大伊舍)는 형인 이라대가 원래 벌인(伐引)에 거주하다가 지금 가족을 이끌고 옮겨 와서 사오이(沙吾耳)에 거주하고 있다는 내용이 있다(『세조실록』 12년 5월 3일). 이처럼 『조선왕조실록』에 2명의 이라대가 기재되어 있으나, 이들은 서로 다른 인물이다.

참고문헌

  • 『제승방략(制勝方略)』
  • 박정민, 『조선시대 여진인 내조 연구』, 경인문화사, 2015.
  • 한성주, 「임진왜란 전후 女眞 藩胡의 朝鮮 침구 양상과 조선의 대응 분석 」, 『동양사학연구』 132,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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