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윤(李得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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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53년(명종 8)∼1630년(인조 8) = 78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인조(仁祖) 때의 유일(遺逸)로서 역학(易學)의 대가이며, 음악 이론가. 의성현령(義城縣令)과 괴산군수(槐山郡守) 등을 지냈다. 자는 극흠(克欽)이고, 호는 서계(西溪)이다. 처음 이름은 이덕윤(李德胤)이었으나, 기휘(忌諱 : 임금 이름과 같은 것을 피하는 것)하여 이득윤(李得胤)으로 고쳤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거주지는 충청도 청원군 미원면 가양리 수락동(壽樂洞)이다. 아버지는 진사(進士) 이잠(李潛)이고, 어머니 강씨(姜氏)는 장사랑(將仕郞)강응청(姜應淸)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사복시(司僕寺) 판관(判官)을 지낸 이곤(李鯤)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사육신(死六臣) 박팽년(朴彭年)의 사위인 이공린(李公麟)이다. 이지함(李之菡)의 제자인 서기(徐起)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나중에 서경덕(徐敬德)의 제자인 박지화(朴枝華)에게 역학(易學)을 배웠다. 성리학에 정통한 『역학(易學)』의 대가였을 뿐만 아니라 거문고를 좋아하여 역대의 금보(琴譜 : 거문고 악보)를 집대성하였다.

선조 시대 활동

나이 20세가 넘어 서기를 찾아가서 그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역학의 대가인 박지화를 찾아가서 『주역』을 배우며 역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이때부터 자기의 도를 닦기 위한 ‘위기(爲己)의 학문’에 뜻을 두었고, 과거에 합격하기 위한 ‘과거 공부’는 즐겨하지 않았다. 1575년(선조 8) 23세가 되던 해에 부친상을 당하여 동생 이광윤(李光胤)과 함께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1588년(선조 21) 36세 때에는 사마시(司馬試)의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였는데, 늙은 어머니를 기쁘게 하려고 이득윤이 억지로 진사시(進士試)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그러나 이득윤은 『역학』을 통하여 자기의 인생관을 정립하였고, 두 스승의 영향을 받아서 벼슬하기를 싫어하며 농사를 지으면서 산수(山水)를 즐기고 살기를 원하였다. 스승 서기는 천인 출신이고 스승 박지화는 서자 출신이었으므로, 두 사람은 벼슬하지 못하는 신세를 한탄하고 산수 사이에 노닐기를 좋아하여, 각각 지리산과 금강산에 들어가서 오랫동안 수도(修道)하였다. 두 스승의 영향을 받은 이득윤 또한 벼슬하지 않고 유일(遺逸)로 남았던 것이다.

1597년(선조 30) 1월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끝난 다음 나라에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관찰사들로 하여금 각 지방의 유일을 천거하게 한 후 6품의 벼슬을 주었는데,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가 학행(學行)이 뛰어난 이득윤을 천거하여, 희릉(禧陵) 참봉(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97년(선조 30) 45세 때, 모친상을 당한 그는 묘소에서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그때 선영 옆으로 흐르는 불사천(不舍川)이라는 작은 개천의 동쪽에 ‘완역재(翫易齋)’라는 정사(精舍)를 짓고 여기에 기거하였는데, 이 지명을 본 따 스스로 호를 ‘서계’라고 불렀다.

1600년(선조 33) 이득윤의 학행이 뛰어나다는 소문을 들은 선조가 이득윤을 왕자들의 사부(師傅)로 발탁하였다. 선조가 특별히 역마(驛馬)를 타고 오라고 명소(命召)하였으므로, 이득윤은 부득이 상경하여 사은한 후 장계를 올려 관직을 사양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종학(宗學)에서 선조의 왕자들을 가르쳤는데, 그때 선조는 서출 왕자만 13명이 있었다. 그 가운데 둘째 광해군(光海君)은 세자에 책봉되어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서 따로 교육을 받고 있었으며, 다른 12명의 왕자 가운데 넷째 신성군(信城君)와 일곱째 인성군(仁城君)을 제외한 나머지 왕자들은 모두 학업에 별로 관심이 없었으므로, 이득윤은 왕자들에게 열심히 공부하도록 잠언(箴言)을 지어서 가르쳤다.[『서계집(西溪集)』 권4 「잠언(箴言)」] 선조는 이득윤이 열심히 왕자들을 가르치는 것을 보고 매우 가상하게 여겨서, 1602년(선조 35) 형조 좌랑(佐郞)에 임명하였으나, 이득윤은 병을 핑계대고 고향인 청주 서계로 돌아왔다.

1603년(선조 36) 선조가 경연(經筵)에서 『주역』을 강론하려고 『주역』의 주석을 교정하게 하였는데, 당시 조정의 경연관들이 이득윤을 추천하였으므로, 선조가 이득윤을 다시 불러 『주역』을 교정하게 하였다.(『선조실록』 36년 1월 21일) 이득윤이 상경하여 『주역』의 교정을 끝마치자, 그 공으로 선조는 공조 정랑(正郞)과 형조 정랑을 연달아 임명하였으나, 이득윤은 모두 병을 핑계대고 사양하였다. 얼마 안 되어 의빈부(儀賓府) 도사(都事)에 임명하자, 대간(臺諫)에서 파격적인 승진이라며 이 인사를 반대하였다. 그러난 선조는 대간을 불러 이득윤이 주역을 교정한 공으로 임명한 것이라고 변호하여 대간의 논박은 중지되었다. 그러나 이득윤은 임금에게 누를 끼치는 것이 송구스러워서, 즉시 벼슬을 사양하고 곧 고향인 청주의 서계로 돌아왔다.

1604년(선조 37) 의성현령에 임명되자, 이득윤은 여러 차례 은명(恩命)을 어긴 것을 미안하게 여겨 부임하였다.(『선조실록』 37년 2월 29일) 현령이득윤이 선정을 베풀자, 선조가 의복 한 벌을 하사하여 표창하였다. 의성 백성들이 유임하기를 원하여 3년 동안 현령으로 재임하다가 고향 청주의 서계로 돌아온 후 제자들을 가르치며 『역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1606년(선조 39) 그의 제자인 한백겸(韓百謙)이 마침 청주군수(淸州郡守)가 되어, 그의 저서 『주목괘변도(周穆卦變圖)』를 간행하자, 이득윤이 그 발문(跋文)을 썼다. 1607년(선조 40) 청주 서계에서 동쪽으로 수 십리 떨어진 옥화동(玉華洞)으로 이사한 후 서실(書室)을 지었다. 이어 1608년(선조 41)에는 유정서원(有定書院)의 원장(院長)에 추대되어 후진을 양성하였는데, 유정서원은 나중에 신항서원(莘巷書院)으로 개명되었다.

광해군 시대 활동

광해군(光海君) 대에 이득윤은 서계 동쪽에 있는 옥화동에서 살았는데, 시내와 산이 굽이굽이 돌아 있는 형세가 주자(朱子)의 ‘무이(武夷) 9곡(曲)’과 흡사하다고 하여 ‘옥화 9곡(玉華九曲)’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제 5곡(曲)에다 서실을 지은 후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이때 『주역』을 통하여 역학(易學)을 깊이 연구하다가 충청도 연산(連山)에서 후진을 양성하던 김장생(金長生)과 서신을 왕복하며 역학과 태극도(太極圖)에 대하여 토론하였다.[『서계집』 권2] 또 청주의 유정서원에서는 서원의 규칙을 만들고 유생들을 가르쳤는데, 이곳에서 이덕수(李德洙)·홍석기(洪錫箕) 등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1611년(광해군 3) 광해군 때 정권을 잡은 대북(大北)의 정인홍(鄭仁弘)이 스승 조식(曹植)을 문묘(文廟)에 배향하기 위하여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을 무고하고 비난하였다. 이에 성균관 유생들이 크게 반발하여 정인홍의 명단을 청금록(靑衿錄)에서 삭제하자, 광해군이 진노하여, 성균관 유생들 가운데 그 주동자를 금고(禁錮)에 처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청주에 있던 이덕윤이 이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 “사기(士氣)가 한번 꺾이면 공론(公論)이 없어질 뿐만 아니라, 나라의 명맥도 끊어질 것이다”라고 하고, 청주의 많은 선비들과 더불어 3남(三南) 지방에 통문을 보내 정인홍을 공격하였다. 이에 정권을 잡은 대북의 정인홍·이이첨(李爾瞻) 일당이 청주의 이득윤 일파를 해치려고 하였으나, 3남 선비들의 여론 때문에 마침내 무함하지 못하였다.

1617년(광해군 9) 대북(大北)의 이이첨 일당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출시키려고, 성균관에 있는 성균관 유생들을 부추겨 ‘폐모론(廢母論)’을 제기하게 한 후 인목대비의 죄상을 거론한 글을 사방에 보내게 하였다. 청주에 살던 이득윤이 그 글을 받아보고 혀를 차면서, “사람들이 국모 없는 나라에서 구차하게 살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바로 그것을 불살라 없애도록 명하였다. 당시 제자들의 얼굴빛이 변했으나, 이득윤은 오히려 태연자약하였다.

이듬해인 1618년(광해군 10)에는 의정부에서 인목대비를 폐비(廢妃)하는 문제를 논의하였다. 서인(西人)들은 조정에서 인목대비를 옹호하고 폐모론에 반대하였으나, 청주의 옥화 9곡에 은거하고 있던 이득윤은 3남 선비들과 힘을 합쳐 재야에서 폐비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이첨·정인홍 등 북인들은 묘당(廟堂)에서 백관들을 모아놓고 폐비 문제를 공개적으로 논의한 후 <정청운동(庭請運動)>을 전개하였다. 이때 폐비에 반대하던 서인들은 이에 불참하였다가 죽음을 당하거나 조정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결국 북인들은 인목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하였다. 이때부터 이득윤은 옥화 9곡에서 세상과 인연을 끊고 오로지 『주역』을 읽고 역학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이 기간 동안 이득윤은 역학과 음률(音律)의 관계를 연구하였는데, 이에 정통한 정두원(鄭斗源)과 서신을 왕래하면서 음률에 대하여 토론하고, 음률을 기록한 거문고 악보, 이른바 금보를 수집하였다.[『서계집』 권2] 그리고 1620년(광해군 12) 역대 거문고 악보를 정리하여 『현금동문유기(玄琴東文類記)』를 편찬 저술하였다.

인조 시대 활동

1623년(인조 1) 3월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서 인조가 왕위에 올랐다. 서인들은 71세의 이득윤을 유일로서 추천하여 사헌부 지평(持平)에 의망(擬望)하였다가, 곧 공조 정랑(正郞)에 임명하였다.(『인조실록』 8년 5월 28일) 이득윤이 병으로 서울로 올라가지 못한다고 하자, 인조가 특별히 역마를 타고 상경하라고 명하므로, 이득윤은 들것에 메여 서울에 들어가서 사은숙배(謝恩肅拜)하고 상소문을 올려 관직에서 물러갈 것을 간청하였다. 인조가 이를 허락하고 쌀과 콩을 내려주었는데, 김장생에게 내린 예(禮)와 똑같이 대우하였다. 그해 가을 선공감(繕工監) 정(正)으로 옮겨 임명하였으나, 상경하여 병을 핑계대고 장계(狀啓)를 올려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 청주의 옥화대(玉華臺)로 돌아왔다.

이듬해인 1624년(인조 2) 72세가 된 그는 그해 2월 봄철 도목정사(都目政事) 때 괴산군수에 임명되고, 특별히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되었다.(『인조실록』 8년 5월 28일) 이득윤이 상경하여 사은숙배하고 사직하려고 하였으나, 때마침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는 바람에 의리상 사직하기도 어려워서 괴산군수로 부임하였다. 이후 이득윤은 고을의 오랜 폐단을 일소하고 풍속을 교화하고자 향약과 사창을 실시하였다. 또 향교 교육을 권장하기 위하여 도훈장(都訓長)을 두었는데, 채 1년도 안 되어 고을의 풍속이 점점 변하고 청소년의 교육열이 점차 높아졌다. 그해 12월 이득윤이 괴산 군수를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올 때에 고을 사람들은 송덕비(頌德碑)를 세워 그 덕을 기렸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발생하자 인조가 강화도(江華島)로 피난을 갔는데, 이득윤은 나이가 너무 많아서 행재소로 달려가지 못하였다. 이에 그는 고향 청주 사람들과 상의하여 의병을 모집한 후 장차 후금(後金)의 오랑캐 군사와 싸우려고 하였으나, 난리가 끝났다는 말을 듣고 그만두었다. 어가(御駕)가 돌아오자 이득윤은 병을 무릅쓰고 서울로 올라가서 임금에게 문안을 드리고, 장계를 올리기를, “나라를 상수(象數 : 『주역』 괘상(卦象)의 변화)로써 다스리고, 자강(自强)하는 도리로 취하소서”라고 하니. 인조가 가납(嘉納)하였다.

1629년(인조 7) 겨울 감기에 걸렸는데, 여러 달 동안 낫지 않다가 이듬해인 1630년(인조 8) 5월 28일 서계의 완역재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78세였다.(『인조실록』 8년 5월 28일) 저서로는 『현금동문유기』·『서계가장결(西溪家藏訣)』이 있다. 문집으로는 『서계집(西溪集)』 4권이 있는데, 그가 죽은 지 2백여 년이 지난 1833년(순조 33) 그의 6세손 이정연(李靜淵)이 이득윤의 유고(遺稿)를 모아 간행하였다.

역술가 서기⋅박지화와 역학자 이덕윤

나이 20세가 넘어 이지함의 제자인 서기의 문하에서, 『대학(大學)』·『심경(心經)』·『주역』·『역학계몽(易學啓蒙)』 등을 배우면서, 경전(經傳)의 의문 나는 부문을 질문하고 토론하였다. 그때 서기가 중으로 돌아다니다가 공주(公州)의 고청산(孤靑山) 아래 서당(書堂)을 짓고 학생을 모집하자, 청년 이득윤은 청주에서 공주로 유학을 갔는데, 서기의 가르침이 유학의 정도(正道)에서 벗어나서 역술에 지우치는 것 같다고 판단한 후 공부하던 책들을 싸가지고 청주의 집으로 돌아와서 혼자 수년 동안 경전을 읽고 탐구하였다. 그러나 『주역』의 『역학』은 혼자 그 이치를 깨닫기가 어려웠으므로, 이득윤은 다시 공주로 가서 서기에게 『역학』의 원리를 가르쳐 달라고 간청하였다. 서기가 이득윤과 함께 『주역』의 원리를 토론하다가 감탄하기를, “후일에 우리나라에서 『역학』으로 이름을 날리게 될 사람은 반드시 이득윤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자기의 잡학(雜學)으로써 이득윤의 『역학』에 대한 욕구를 채워줄 수 없다고 판단한 서기는 자기의 친구인 박지화를 소개하였다. 서경덕(徐敬德)의 제자인 박지화는 『주역』에 정통하다는 소문이 널리 났었다. 그때 박지화는 충청도 괴산군 청연(淸淵 : 청안면) 오곡촌(烏谷村)의 들판에 머물고 있었는데, 이득윤은 박지화를 찾아가서 그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득윤이 『주역』의 주석까지도 하나하나 의심나는 부문을 꼬치꼬치 캐묻자 화담(花潭) 학파에서 역술의 대가라고 일컫던 박지화도 대답하지 못하고 “네가 모르는 것을 난들 어찌 알겠는가”라며, 쩔쩔 매었다고 한다. 당시 학자들이 이득윤을 칭찬하기를, “세상에 『주역』을 공부한 사람은 많지만, 정밀하고 철저하게 『주역』을 알고 있는 자는 오로지 이득윤 한 사람뿐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1603년(선조 36) 선조가 경연에서 『주역』을 강론하려고 하면서, 주석에 잘못된 것이 많다고 하여 교정국(校正局)을 설치하고 당시 『역학』에 밝은 학자를 초빙하여 교정하도록 하였다. 이때 이득윤이 첫 번째로 추천되어 주역의 교정을 맡았다. 당시 경연에 참여하던 유신(儒臣)들이 이득윤을 첫 번째로 추천한 것을 보면, 당시 이득윤이 조야에 걸쳐 『주역』에 대해 가장 조예가 깊은 학자로 인정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득윤은 『주역』을 교정한 공으로 의빈부 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대간에서 너무 파격적인 승진이라고 반대하였다. 이에 선조가 직접 이득윤을 비호하며 『주역』을 교정했기 때문에 승진시켜 주었다고 대답하자, 대관들이 논박하기를 중지하였다.(『선조실록』 36년 1월 21일)

그때 이득윤은 생각하기를, “산야(山野)에 있던 천한 사람이 여러 차례 왕의 은혜를 그릇되게 받아 대관들의 논박이 나오자, 주상께서 미천한 나를 이와 같이 덮어주시니, 어찌 감히 사직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관직을 사임하고 행장을 꾸려 그 이튿날 바로 고향 충청도 청주의 서계로 돌아왔다. 이후 이득윤은 옥화 9곡의 서실에 하루 종일 정좌하여, 『주역』을 열심히 연구하였는데, 그가 연구하는 내용도 유교의 경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역학의 원리를 『주역』에서 풀어내면서 오히려 성리학의 심오한 원리를 구명(究明)하는 방법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이득윤은 성리학에 바탕을 둔 순수한 역학자(易學者)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스승인 서기와 박지화가 역학을 도교의 참위설(讖緯說) 및 신선 사상과 결부시킨 역술가였다는 것과 차이가 나는 부분이었다. 말하자면 서기와 박지화는 역술가였으나, 이득윤은 역학자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서기와 박지화의 제자는 거의 역술인이었으나, 이득윤의 제자는 이시발(李時潑)과 한백겸을 비롯한 30여 명이 모두 16세기 청주 지역을 대표하는 유학자였기 때문이다.

이득윤은 중국의 역학이 우리나라에 제대로 전수되지 않은 것을 깊이 한탄하여 제자들에게 일찍이 말하기를, “학업을 닦는 자들은 정주학(程朱學)을 입으로는 말하지만 그 본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점을 치는 자들은 그 본의를 저버리고 상수에만 빠지니, 체(體)와 용(用)이 서로 어긋나서 길(吉)과 흉(凶)이 아주 헷갈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역』의 역학이 인(仁)·의(義)·중(中)·정(正)에 맞기를 바란다면, 이것도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탄식하였다. 이득윤은 항상 정자(程子)와 주자의 성리학에 대한 해석을 정도(正道)의 방법으로 깊이 연구하고, 또 혼자 태극도(太極圖)의 심오한 원리를 터득하여 우주와 인간의 앞날을 예측하였다. 그러나 이득윤은 미래의 일을 함부로 남에게 예언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예언은 반드시 맞지 않는 때가 있어서 낭패를 당할 일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그는 예언이 맞지 않는 것을 병부(兵符)의 부절(符節)이 서로 맞지 않는 것에 비유하며, 예언을 자칫 잘못하면 큰 낭패를 당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서계가장결』

이득윤이 남겼다는 예언서가 바로 『서계가장결』이다. 책의 제목을 ‘가장결(家藏訣)’이라고 하였는데, ‘서계 집안에 간직한 예언 비결(秘訣)’이라는 뜻이다. 이득윤이 그 책을 직접 저술한 것은 아니고, 그가 청주의 사기막(沙器幕)에 거주할 때 이웃에 살던 최생(崔生)이란 사람이 찾아와서 글을 배우며 묻기를, “임진왜란은 요행히 피할 수 있었으나, 앞으로 2백여 년 동안 반드시 큰 난리가 일어날 텐데, 그 일을 조목별로 기록하여 두었다가, 후세 사람들이 난리를 피할 방도를 도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자, 이득윤이 구술로 예언하고 최생이 그 예언을 받아 적었다고 전한다.[『서계이선생가장결(西溪李先生家藏訣)』] 최생이라는 사람은 그 이름을 밝히지 않았으며, 또 서계이득윤의 후손들은 경주 이씨(慶州李氏) 집안에서는 이러한 책을 소장한 적이 없다고 한다. 또 『서계가장결』은 이득윤의 문집인 『서계집』 권4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득윤의 『서계가장결』은 이지함의 『토정가장비결(土亭家藏秘訣)』과 함께 『정감록(鄭鑑錄)』의 비결을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정감록』은 본서에 해당하는 『감결(鑑訣)』과 여러 사람의 『비결』을 합친 예언서이다. 『감결』은 정씨(鄭氏)의 조상이라는 정감(鄭鑑)이 이씨의 조상이라는 이심(李沁)·이연(李淵)과 금강산에서 마주앉아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엮어져 있다. 그 주된 내용은 한양에 도읍한 이씨 왕조가 멸망한 다음에 ‘진인(眞人)’이 나타나서 충청도계룡산(鷄龍山)에 도읍하여, 새로운 정씨(鄭氏) 왕조를 세운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인 출현설(眞人出現說)’이다. 『비결』은 무학(無學)·도선(道詵) 등 승려와 이지함·남사고(南師古) 등 역학자 및 정도전(鄭道傳)·이득윤 등 유학자의 예언서이다. 이득윤의 예언서는 『경주이선생가장결』이라고 『정감록』에 실려 있는데, 속칭 『서계가장결』이라고 한다.

『정감록』의 ‘진인 출현설’은 “진인이 남쪽으로 내려와서 천명(天命)을 자연스럽게 받게 된다.[眞人渡南 順受天命]”고 하여, 말세에 정씨 성씨를 가진 진인이 북쪽 서울에서 이씨 왕조를 타도하고, 남쪽 계룡산 지역으로 내려와서 천명(天命)의 순리에 따라서 새로운 왕조를 세우게 된다는 것이다. 국초 이래로 “충청도계룡산(鷄龍山) 개태사(開泰寺) 터는 바로 후대에 정씨(鄭氏)가 도읍할 곳이다.”라는 참위설(讖緯說)이 있었다. 이것이 겉으로 드러난 대표적 사건이 선조 때인 1589년(선조 22) 10월 발생한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이다. 정여립이 중 의연(義衍)과 모의하여, 조선 왕조를 타도하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고자 대동계(大同禊)를 만들어 매월 15일에 한 곳에 모여 ‘진인 출현설’을 강론한 후, 장사들이 활쏘기를 겨루고 주식(酒食)을 장만하여 먹고 마시다가 발각되었던 것이다. 이보다 앞서 1백여 년 전에는 민간에서 ‘목자(木子 : 이(李)씨)가 망하고 전읍(奠邑 : 정(鄭)씨)이 일어난다.’는 참언이 있었다고도 전한다.(『선조수정실록』 22년 10월 1일)

조선 후기에도 ‘진인 출현설’은 농민 혁명의 이론을 제공하였는데, 불교의 미륵불(彌勒佛) 사상이 중국 농민 운동의 배경이 되었던 것처럼 도교의 참위설(讖緯說)이 우리나라 농민 운동의 배경이 되었다. 말하자면 『정감록』은 조선 후기 부패한 조선 왕조에 저항하는 민중 운동의 텍스트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 왕조에서는 금서(禁書)로 지정하여 철저하게 탄압하였으므로, 이 책은 한 번도 공식적으로 간행된 적이 없었다. 그 결과 민간에서 사본(寫本)으로 전수되었기 때문에 『정감록』을 그 시대 상황에 따라 내용이 수시로 첨삭(添削)되어 더욱 혁명적 성향이 강해졌다. 『정감록』에 포함된 『서계가장결』은 혁명 사상을 담고 있으므로, 직설적인 표현을 피하고 은어·우의(寓意)·파자(破字) 등을 사용하여 난삽한 표현이 많아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조선 후기에 황당무계한 예언서라고 하던 『서계가장결』은 오늘날 조선 후기 사회사 연구에 아주 중요한 사료로 평가된다.

『서계가장결』에서 이득윤이 예언하였다고 하는 주된 내용과 후대 역술가들이 풀이한 것을 보면 황당무계한 부분이 많다. 『서계가장결』에서는 “병인년(丙寅年)에 이인(異人)이 나타나서 화친을 주장한다”고 예언하였는데, 역술가들은 1866년(고종 3) 병인년에 발생한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이것이라고 풀이한다. 또 『서계가장결』에서 “을유년(乙酉年)에 천리 강산이 셋으로 나뉜다”고 예언한 부분에 대해서 역술가들은 1945년 을유년에 우리나라가 남북으로 분단되었다고 풀이한다. “임진년(壬辰年)과 계사년(癸巳年) 사이에 정체불명의 외국군대가 침략해 온다”는 『서계가장결』의 예언은 1952년 임진년과 1953년 계사년 사이에 한국전쟁이 일어나서 많은 외국 군대가 우리나라에 왔다고 풀이하고 있다. 사실 시대가 오래되면 될수록 『서계가장결』에서 예언한 내용은 역사적 사건과 맞아 떨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러나 후세 역술가들은 서계의 예언과 역사적 사실을 결부시키면서 견강부회(牽强附會)한 것이 너무나 많으므로 쉽게 수긍하기가 어렵다.

또 이득윤은 『서계가장결』에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살아남을 수 있는 피난처로 충청도 일대의 길지(吉地)를 선정하였다. 그가 선정한 곳은 충청도 일대의 10여 군데인데, 충청북도에서는 보은속리산의 증항(甑項), 황간(黃澗)과 영동(永同) 사이, 청주(淸州) 남쪽과 문의(文義) 북쪽, 옥천(沃川) 등지이고, 충청남도에서는 진잠(鎭岑)과 공주의 유구(維鳩)와 마곡(麻谷) 등지이다. 이득윤의 고향이 충청도 청원군 미원면 옥화리였는데, 길지를 보면 고향 청주와 보은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산재해 있다. 『정감록』의 10승지(勝地) 가운데 보은속리산 난증항(지금 충북 보은군속리산)과 공주계룡산 유구 마곡(지금 충남 공주시 유구읍) 두 지역과도 일치한다. 『서계가장결』에서 이득윤은 “이러한 난세를 맞으면, 남편은 땅을 갈고 아내는 베를 짜면서 오로지 농사짓는 데 부지런히 힘써서 스스로 살길을 찾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난세를 이겨내는 방법으로 농사를 강조하였다.[『서계가장결』]

한편 유학자였던 이득윤이 조선 왕조를 부정하고 새로운 왕조의 탄생을 예언하였다는 것은 수긍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서계 가장록』의 저자는 과연 누구인가. 또 이러한 금서(禁書)를 과연 경주 이씨 집안에서 과연 간직할 수가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생긴다. 『서계가장록』이라는 서명(書名) 자체도 의심스럽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후세의 역술가들이 이득윤의 이름을 도용하여 이 책을 만들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득윤의 집안에서 이 책을 간직하여 후손에게 전수하였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득윤은 참위설을 믿지 않던 유학자였으나, 그가 <병자호란(丙子胡亂)>이나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한 사실은 정사(正史)와 야사(野史)에 곧잘 등장한다.

그럼에도 이득윤은 유학자였다. 그는 일찍이 그가 평소 좋아하던 옥화 계곡에 묏자리를 잡아 놓았었는데, 병세가 위중하여 운명하게 되었을 때 자제들에게 부탁하기를, “내가 차마 선영(先塋)을 멀리 떠날 수가 없다”며 전에 자리를 잡아 두었던 옥화리의 묏자리를 포기하고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면(米院面) 가양리(佳陽里)인경산(引頸山) 아래 선영에 장사지내도록 지시하였다. 이득윤이 참위설을 믿는 사람이었다면, 처음 자리를 잡았던 옥화리의 명당자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인조 초기에 이득윤이 충청도 괴산군수에 임명되어 서울에 올라온 후 임금에게 사은(謝恩)할 때 서울 도성 사람들의 음성을 듣고 말하기를, “아직도 쇳소리가 거세게 나오고 있으니, 난리가 끝나지 않았다.”고 한 후,(『인조실록』 8년 5월 28일) 곧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당시 사람들은 그가 말한 예언이 들어맞았다며 감탄하였고, 나라의 사관(史官)들조차 이득윤을 훌륭한 예언가라고 격찬할 만큼 이득윤은 역학자로서 명망이 높았다. 그러므로 후세의 역술가들이 신빙성을 높이기 위하여 그의 이름을 도용하여 『서계가장결』을 지어 『정감록』에 포함시켰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옥화 9곡’과 청주의 ‘서계학파’

1575년(선조 8) 23세가 되던 해에 이득윤은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동생 이광윤과 함께 3년 동안 선영에서 여묘살이를 하였다. 선영은 지금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청원군] 미원면 가양리인경산(引頸山)에 있다. 그때 묘소 아래 몇 칸의 집을 짓고 이름을 ‘추원당(追遠堂)’이라고 하였는데, 장차 사당을 지을 계획이었다. 그 뒤 12년이 지난 1597년(선조 30) 45세가 되던 해에 모친상을 당하자 이득윤은 묘소에서 동생들과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그때 선영 옆으로 흐르는 박대천의 동쪽 언덕에 ‘완역재’라는 정사(精舍)를 짓고 여기에 기거하면서, 그 지명을 따서 스스로 호를 ‘서계’라고 불렀다. ‘완역재’는 그 전의 ‘추원당’을 개조하여 지은 사당이었는데, 이득윤은 이를 서재로 사용하고 역학을 연구하였다. ‘완역’은 『주역』을 좋아한다는 뜻이었므로, ‘완역재’는 역학을 좋아하여 연구하는 서재라는 뜻이다. 또 동쪽 개천의 이름을 불사천(不舍川)이라고 명명하였는데, 박대천 냇물이 쉬지 않고 흐르는 것처럼 쉬지 않고 꾸준히 역학을 연구하겠다는 자기의 뜻을 나타낸 것이다.

선조 말년부터 서계 동쪽에 있는 경치가 아름다운 옥화 계곡으로 이사하여 살았는데, 시내와 산이 굽이굽이 도는 형세가 주자의 ‘무이 9곡’과 흡사하였다. 그리하여 이득윤은 이곳에 비위에 부딪치는 물방울이 옥구슬처럼 아름답다는 뜻을 가진 ‘옥화(玉華)’라는 단어를 이용하여 ‘옥화 9곡’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제 5곡의 옥화대에 몇 칸짜리 서실을 지었다. 이어 서재의 편액(篇額)을 ‘춘풍당(春風堂)’이라 달고 바깥 마루채를 ‘추월헌(秋月軒)’이라고 부르며 항상 이곳에서 거처하였다. 옥화대 주변에 있던 8~9그루의 푸른 소나무는 사철 변하지 않고 푸르렀기 때문에 이득윤은 정자를 지어 ‘세한정(歲寒亭)’이라고 부르고, 손수 소나무를 배양(培養)하였다. 평소 때는 서실에 정좌(正坐)한 다음 좌우에 책들을 가득 쌓아 놓고, 아침저녁으로 경전(經傳)을 읽으며 성리학을 탐구하였다. 또 주변 푸른 소나무들 사이로 지팡이를 짚고 산책하며 시를 흥얼거렸다. 나이가 환갑줄에 들어섰으나, 『주역』을 통하여 역학(易學)을 연구하며,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소요(逍遙) 음영(吟詠)하다가, 자기 자신이 늙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였다.

서계(西溪)는 지금 충청북도 상당구[청원군] 미원면인데, 이득윤이 태어난 곳은 수락동(壽樂洞)이고, 완역재(玩易齋)는 가양리(佳陽里)에 있었으며, ‘춘풍당(春風堂)’과 ‘추월헌(秋月軒)’은 옥화리(玉華里)에 있었다. 옥화 9곡은 지금 청원군 미원면을 남북으로 흐르는 박대천을 따라 하류에서 상류로 올라가는 지형을 가리키는데, 만경대(萬景臺)·후운정(後雲亭)·어암(漁巖)·옥화대(玉華臺)·천경대(天鏡臺)·오담(鰲潭)·인풍정(引風亭)·봉황대(鳳凰臺)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옥화대에는 이득윤이 지은 추월헌이 아직 남아 있으며, 충청도 청원군은 옥화 9곡과 옥화대를 관광단지로 개발하고 있다.

16세기 이후 선비들 사이에서는 송(宋)나라 주희(朱熹)의 ‘무이 9곡’을 본받아 산수(山水)가 아름다운 지역에 ‘9곡’을 설정하고 속세를 떠나 자연을 벗 삼아 학문에 침잠하려는 풍습이 유행했다. 충청도 회덕(懷德)의 송시열(宋時烈)은 ‘화양(華陽) 9곡’을, 전라도 해남(海南)의 윤선도(尹善道)는 ‘고산(孤山) 9곡’을, 경상도 성주(星州)의 정구(鄭逑)는 ‘무흘(武屹) 9곡’을, 강원도 사탄(史呑)의 김수증(金壽增)은 ‘곡운(谷雲) 9곡’을 각각 설정해 놓고 자연의 풍광을 벗 삼아서 정계에서 도피하여 학문에 몰입하려고 하였던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송시열과 윤선도는 각각 서인과 남인(南人)의 영수로서 현종(顯宗)·숙종(肅宗) 때 <제1차 예송(禮訟) 논쟁>과 <제2차 예송 논쟁>에 휘말려 서로 싸우다가 천수(天壽)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였다. 이처럼 조선 후기에는 전국에 수많은 ‘9곡’이 설정되었으나, 이득윤처럼 유일로 남아 벼슬을 모두 뿌리치고 평생 자연을 벗 삼아서 일생을 고아(高雅)하게 끝마친 사람은 드물다.

이득윤은 선조 말년부터 광해군 시대에 걸쳐 무려 18년 동안이나 옥화 9곡의 옥화리에 칩거하면서, 오로지 『역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때 세상 사람들과는 교유를 끊고 지냈으나, 오로지 연산에서 후진을 양성하고 있던 김장생과는 서신을 왕복하며 『주역』의 어려운 부문을 묻고, 태극도에 대하여 논쟁을 벌였다. 이때 김장생의 아들 김집(金集)이 이득윤의 『주역』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보고 감탄하였다고 전한다.[『서계집』 권2 「답김희원문목(答金希元問目)」] 그 동안 이득윤은 역학과 음률의 관계를 연구하다가, 거문고의 악보, 이른바 금보에 정통한 정두원과 서신을 왕래하며 음률과 거문고 악보에 대하여 토론하였다.[『서계집』 권2 「답정하숙(答鄭下叔)」] 그리고 1620년(광해군 12) 역대 명현(名賢)들의 거문고에 대한 명(銘)·부(賦)·기(記)·시(詩)·서(書)와 안상(安瑺)·조성(趙晟)·허사종(許嗣宗) 등의 거문고 악보를 수록한 『고금금보견문록(古今琴譜見聞錄)』을 정리하고, 정두원의 의견을 종합하여 『현금동문유기』를 편찬 저술하였다.

한편 청주 고을에 성정(先正 : 선배 유학자)을 모신 유정서원이 있었는데, 이곳에 모여 공부하던 청주의 유생들이 옥화동에 살고 있던 이득윤을 추대하여 유정서원의 원장으로 삼았다. 유정서원은 나중에 신항서원으로 개명하였다. 원장 이득윤은 유생들을 위하여 서원의 규칙을 정하여 유생들을 가르쳤다. 유생들이 학문하는 방법을 물으면 그는 반드시 심술(心術)을 밝게 하여 기질(氣質)을 변화시키는 방도를 먼저 깨우쳐 주었고, 심술이 바로 잡힌 제자들에게 사서오경(四書五經)을 가르쳤다. 『서계집』 부록에는 이득윤의 제자 30여 명이 실려 있는데, 이덕수와 홍석기 등은 스승 이득윤의 『역학』을 통한 철저한 심성(心性) 교육을 받아서 훌륭한 유학자와 정치가가 되었다.

충청도 지방에서는 김장생·김집 부자의 문하에서 배출된 ‘사계학파(沙溪學派)’와 이득윤 문하에서 배출된 ‘서계학파(西溪學派)’가 가장 유명하였다. 사계학파에서는 송시열과 송준길(宋浚吉) 등 서인의 거두가 나와 조선 후기 노론(老論)의 주류를 형성하여 중앙 정치를 좌지우지하였다. 이에 비하여 이득윤의 문하에서는 초기에 배출된 이시발과 한백겸 등은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이시발은 형조 판서(判書)를, 한백겸은 호조 참의(參議)를 각각 지냈으나, 송시열과 송준길처럼 중앙 정계를 뒤흔들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시발과 한백겸은 모두 『역학』에 정통하다는 평을 받았는데, 이시발은 『주변록(籌邊錄)』을 지어 경상도 해안 지방에서 왜구를 방어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고, 한백겸은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를 지어 고증학적으로 우리나라 역사 지리를 다루었다. 그들은 스승 이득윤의 역학을 바탕으로 국방과 지리를 실증적으로 연구하여 조선 후기 실학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16~17세기 충청도 청주 지방에서 수많은 학자와 문학가들이 나왔는데, 이것은 청주의 서계학파가 그 산실(産室)이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청주 지방에서 학문 연구와 문학 창작을 주도한 사림들은 대부분 서계이득윤의 제자들이었다. 『서계집』 부록에 실린 30여 명의 제자들 중에서 이덕수는 과거에 급제하여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와 이조 참의를 지냈는데, 그 형 이덕사(李德泗)의 사위가 바로 송시열이다. 홍석기는 과거에 급제하여 남원목사(南原牧使)를 지내다가 서계로 돌아와서 후운정(後雲亭)을 짓고 학문을 연구하면서 송시열과 교유하였다. 지금의 청원군 미원면 후운정리가 바로 그가 은거하던 곳이다. 또 미원군 북일면 비상리에 살던 선비 변유인(卞惟寅)과 두 아들 변시익(卞時益)·변시망(卞時望)도 모두 뛰어난 유학자들로서, 형 변시익은 과거에 급제하여 승지(承旨)를 지냈으며, 그 동생 변시망은 이득윤의 사위가 되었고, 좌랑(佐郞)을 지냈다. 승지변시망이 이득윤의 행장을 쓴 것을 보면 그가 수제자였을 가능성이 높다.[『서계집』 권4 「행장(行狀)」]

육가 시조의 개척자 서계 이득윤

우리나라 국문학사를 보면, 신라의 향가를 거쳐 고려의 장가, 조선의 시조 순으로 발전해 왔다. 시조는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 작품이 2천여 수(首)에 이를 만큼 양적으로 전성기를 맞았으나, 단 한 수로 형식이 제한되는 특징 때문에 한시(漢詩)보다 내용이 풍부하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16세기 이득윤이 「서계육가(西溪六歌)」와 『옥화육가(玉華六歌)』를 지어 옥화 9곡의 아름다움을 12곡으로 노래한 이후 시조에는 ‘육가(六歌)’라는 장르가 생겨나서, 질적으로 내용이 풍부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평시조 6수(首)를 하나의 단위로 하는 ‘육가’ 형식의 시조가 16~17세기 청주의 서계에서 발달하였던 것이다. 우리나라 국문학사에서 ‘육가’ 형식의 시조가 탄생한 곳이 바로 충청도 미원면 서계 지역인데, 이득윤의 선대 2대와 후세 1대를 합친 경주 이씨 4대가 충청도 청원군 미원면 일대의 옥화 9곡의 아름다운 경관을 시조를 연달아 읊으면서 ‘육가’ 시조가 발달하였기 때문이다.

경주 이씨 4대의 작품을 시대 순으로 보면, 이별(李鼈)의 「장육당육가(藏六堂六歌)」, 이정(李淨)의 「풍계육가(楓溪六歌)」,이득윤의 「서계육가」·「옥화육가」, 이홍유(李弘有)의 「산민육가(山民六歌)」이다. 이정의 『풍계육가』와 이홍유의 『산민육가』는 현존하고 있지만, 나머지는 전하지 않는다. ‘육가’는 6수를 하나의 단위로 창작하는 시나 시조를 말한다. ‘육가’의 기원은 송나라 문천상(文天祥)이 지은 「육가(六歌)」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는 당(唐)나라 두보(杜甫)의 「동곡칠가(同谷七歌)」의 영향을 받아 발달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김시습(金時習)이 한시 「동봉육가(東峰六歌)」를 지었고, 이별이 「장육당육가」를 지으면서 육가 계통의 시조가 시작되었다. 이별의 시조 「장육당육가」는 김시습의 한시 「동봉육가」의 영향을 받았다고 추측된다.

이득윤의 증조할아버지 이공린은 사육신 박팽년의 사위인데, 아들 8형제가 있었다. 8형제의 이름에 모두 ‘자라 별(鼈)’자를 넣었기 때문에 속칭 ‘경주 이씨 8별(鼈)’이라고 불렀다. 그 중에서 3남 이원(李黿)이 김종직(金宗直)의 제자로서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화를 당하자, 집안이 흩어져 5남 이별은 황해도 평산(平山)옥계산(玉溪山)에 들어가서 은둔하였고, 8남 이곤(李鯤)은 충청도 청주의 미원면 서계(西溪)로 은거하였는데, 이곤이 바로 이득윤의 할아버지이다. 이별이 지은 「장육당육가」는 이별의 호인 장육당에서 비롯되었는데, 장육당은 거북이 머리와 꼬리, 사지를 등껍질 속에 감추듯이 온몸을 세상으로부터 감추겠다는 뜻이다. 즉 「장육당육가」는 눈·코·귀·입 등을 막고 더러운 세상을 등진 채 산속에 숨어 산수의 아름다움을 즐기면서 깨끗하게 살겠다는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이황(李滉)은 「장육당육가」를 보고, “세상을 희롱하며 공손하지 못하다[玩世不恭]”고 비판하고, “온유하고 돈후해야 한다[溫柔敦厚]”고 충고하며, 「장육당육가」의 형식을 따라 육가 계열의 연시조 형식인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을 지었다. 이황은 속악(俗樂) 가사와 경기체가를 비판하면서도 이별의 「장육당육가」를 모방하여 「도산십이곡」을 지어 육가 계열의 연시조를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이황의 「도산십이곡」은 이별의 「장육당육가」의 내용은 부정하지만 그 형식은 계승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장육당육가」 원문 시조는 전해지지 않고, 이득윤의 동생 홍문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이광윤(李光胤)이 한문으로 번역한 한시 4수가 그의 문집 『양서집(瀼西集)』에 전해지고 있다.[『양서집(瀼西集)』 권2 「번장육당육가졸제(飜藏六堂六歌拙製)」] 번역된 한시는 시조 1수를 한시 5언(言) 6구(勾)로 번역하였는데, 내용은 권력에 안주하는 사람들을 멸시하고 냉소하고 있다.

이별이 지은 「장육당육가」는 육가 형식을 갖춘 최초의 시조라는 데 의의가 크다. 이득윤의 할아버지인 이곤의 맏아들 이정(李淨)은 박달천의 옥화 계곡에서 가을 단풍을 읊은 「풍계육가(楓溪六歌)」를 지어 삼촌 이별의 「장육단육가」를 계승하였다. 이득윤의 백부인 이정이 지은 연시조 「풍계육가」는 지금 전해지고 있다. 이득윤은 서계의 풍광을 읊은 시조 「서계육가」와 옥화대의 아름다움을 읊은 시조 「옥화육가」를 지어 백부인 이정의 연시조 「풍계육가」를 계승하였다. 서계이득윤는 「서계육가」와 「옥화육가」를 합하여 시조 12곡을 지었는데, 이것은 이황의 「도산십오곡」 체계를 모방한 것이다. 그러나 이득윤의 작품은 전하지 않으므로, 그 내용은 알 수 없다. 이득윤의 아들 이홍유(李弘有)는 서계에 살고 있는 산촌 사람들의 생활을 읊은 시조 「산민육가」를 지었고 현재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 국문학사에서 시조의 발달을 논할 때 충청도 청주의 「옥화구곡」과 옥화대는 육가의 형식을 갖춘 최초의 시조가 탄생한 무대가 되었으므로, 국문학상으로 윤선도의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가 탄생한 무대인 전라도 보길도(甫吉島)와 함께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홍유(李弘有)의 『둔헌집(遯軒集)』에 보면 신득치(申得治)가 「낙우당구곡(樂愚堂九曲」을 청원군 미원면과 보은군 내북면에 걸쳐 설정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둔헌집』 권3] 「옥화구곡」과 옥화대야말로 조선 시대 육가 형식의 시조가 발생한 곳이고, 또 「낙우당구곡」도 이 지역에서 탄생한 것이다. 그러므로 「옥화구곡」의 옥화대는 우리나라 시조 문학의 요람지라고 할 수 있다.

성품과 일화

이득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모습이 의젓하여 깊고 무거운 기상이 있었으며, 성품이 순수하고 후덕하였으며, 효성과 우애는 선천적으로 타고났다.

1553년(명종 8) 윤3월 30일, 이득윤은 충청도 청주의 서계에서 태어났다. 지금 충북 청원군 미원면 가양리 수락동(壽樂洞)이 바로 이득윤의 태어난 곳이다. 나이 6~7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옆에서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글을 읽고 그 뜻을 잊지 않고 기억하였으므로, 아버지 이잠이 칭찬하기를, “뜻을 굳게 가지면, 후일 큰 학자가 될 것이다”고 하였다. 자라면서 경전을 배우면, 그 대의(大義)를 남보다 먼저 깨달았으므로, 글을 읽으면 반드시 그 참된 뜻과 실천할 방도를 생각하였다.

나이 20세가 넘어 이지함의 제자인 서기를 찾아가서, 사서오경을 공부하였다. 청년 이득윤이 『주역』·『역학계몽』 등의 역학에 깊이 몰입하자, 스승 서기는 역학의 대가인 그의 절친한 친구 박지화를 소개하였다. 이에 이득윤은 서경덕의 제자인 박지화를 찾아가서 『주역』을 철저히 배우고, 역학을 깊이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이득윤은 경전을 읽고 대의를 연구하여 반드시 실천하려고 노력하였으므로, 자기의 도를 닦기 위한 ‘위기의 학문’에 뜻을 두었고, 과거에 합격하기 위한 ‘과거 공부’를 즐겨하지 않았다.

부모의 기일을 맞을 때에는 반드시 10일 동안을 재계(齋戒)하고 소식(素食)하였다. 제사를 지낼 때에는 애통해 하는 모습이 초상(初喪)을 당하여 성복(成服)하기 전과 같았다. 매일 닭이 울 무렵에는 의관을 정제하고 사당에 가서 절하고, 초하루와 보름의 삭망(朔望)에는 제수(祭需)를 차려 사당에 올리고, 바깥을 출입할 때에는 반드시 사당에 고알(告謁)하였는데, 아무리 급한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폐지하지 않았다. 이득윤은 『주자가례(朱子家禮)』 대로 유교의 예절에 따랐을 뿐 불교나 도교의 예법은 따르지 않았다. 백부인 이정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 백모인 나씨(羅氏)가 후사가 없어 뒷일을 이득윤에게 부탁하였는데, 그 백모가 살아 있을 동안 섬기는 것과 사후에 장사지내고 제사지내는 것이 친어머니와 다름이 없었다. 형제와 자매에게 전답과 비복(婢僕)을 나눌 때에도 자기는 좋지 않는 땅과 늙은 종을 골라서 가졌다. 의복은 검소하게 입고, 음식은 거칠게 먹었다. 친구들의 급박한 사정을 보면 반드시 구제하여 주었고, 또 혼례나 장례 때에는 힘껏 도와주었다.

평상시 집에 있을 때에는 장중하면서 과묵하였지만, 즐겁고 편안하게 사람을 대하다가도, 사람들 가운데 정치의 잘잘못을 따지거나, 남의 장단점을 말하는 자가 있으면, 곧 정색하고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남의 착한 것을 보면 기뻐서 찬양해주고, 착하지 않은 것을 보면 깨우쳐서 바로잡아 주었다. 학문은 연원을 따져서 깊이 사색하고 바르게 분별하였다. 서실에 정좌하여 하루 종일 열심히 연구하는 책들이 유교의 경전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며, 역학에 더욱 힘을 다하였음에도 역술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일찍이 그는 거문고를 배워서 거문고를 타기를 좋아하였고, 마음을 정화시켜 주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거문고 배우기를 권하였다. 거문고 악보를 수집하여 『현금동금유기』를 편찬하였는데, 오늘날 한국의 전통음악을 연구하는 데에 매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이득윤이 평상시 자주 올라가서 거문고를 타던 옥화대 바위에는 ‘농금암(弄琴巖)’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1629년(인조 7) 겨울 감기로 여러 달 동안 낫지 않자, 곁에 있던 사람들이 침을 맞고 약을 쓸 것을 간청하였으나, 이득윤은 좋아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한 번 죽는 것은 인생의 떳떳한 이치다. 성현도 면치 못한 일인데, 하물며 내가 나이 여든에 임박하여 의원에게 삶을 구한다면, 또한 구차하지 않겠느냐”고 하였다. 장차 역책(易簀 : 샅자리를 바꾸는 것)하려고 할 때 부녀자는 내보낸 후 금침을 반듯하게 펴고 누운 다음에 좌우의 부축하는 사람들에게 팔 다리를 잡게 하고 편안한 자세로 눈을 감았다. 이득윤이 운명할 때의 모습은 유학자의 전형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米院面) 가양리(佳陽里)인경산(引頸山) 아래에 있는데, 이경석(李景奭)이 지은 묘갈명이 남아있다. 청주의 신항서원과 청안(淸安)의 구계서원(龜溪書院)에 제향되었다.[ 행장은 두 가지가 있는데, 제자인 승지변시익이 쓴 행장이 『서계집』에 실려 있고,[『서계집』 권4 부록] 아들 이홍유가 쓴 행장이 『둔헌집』에 실려 있다.[『둔헌집』 권1] 두 행장은 서술 방법이 다르고, 내용에서도 조금 차이가 난다.

첫째 부인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창신 교위(彰信校尉)윤환(尹渙)의 딸이고, 둘째 부인 옥구 장씨(沃溝張氏)는 습독관(習讀官)장징(張徵)의 딸이다. 파평 윤씨는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일찍 죽었고, 딸은 각각 사인(士人) 김일(金鎰)과 정복흥(鄭復興)에게 출가하였다. 옥구 장씨는 3남 2녀를 낳았는데, 2남 1녀는 일찍 죽었다. 다른 아들 이홍유는 음직(蔭職)으로 찰방(察訪)을 지냈고, 딸은 변시익의 동생인 좌랑변시망에게 출가하였다. 측실 남원 태씨(南原太氏)는 3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이홍복(李弘復)·이홍겸(李弘謙)·이홍함(李弘咸)이고, 딸은 무과(武科)에 급제한 김광위(金光偉)에게 출가하였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인조실록(仁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현금동문유기(玄琴東文類記)』
  • 『서계집(西溪集)』
  • 『둔헌집(遯軒集)』
  • 『사계전서(沙溪全書)』
  • 『미수기언(眉叟記言)』
  • 『송자대전(宋子大全)』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양서집(瀼西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정감록(鄭鑑錄)』
  • 『청음집(淸陰集)』
  • 『한강집(寒岡集)』
  • 『규암집(圭菴集)』
  • 『연천집(淵泉集)』
  • 『화곡집(禾谷集)』
  • 『양서집(瀼西集)』
  • 『고청유고(孤靑遺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