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다롱개(李多弄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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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함경도 경흥에 거주한 골간올적합 추장.

개설

이다롱개는 단종대부터 성종대까지 함경도 경흥진(慶興鎭)에서 북쪽으로 20리(약 8㎞) 지점의 강양(江陽)에 거주한 골간올적합(骨幹兀狄哈)의 추장으로, 강력한 세력을 가진 자였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이다롱개(李多弄介)·이다롱합(李多弄哈)·이다롱가(李多弄可) 등으로 이름의 끝 음을 다르게 기재하였으나 모두 동일인이다. 그는 1460년 모련위(毛憐衛) 정벌에도 참전하는 등 조선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조선에 자주 내조하며 조선으로부터 신뢰를 얻었다.

가계

1455년(단종 3) 3월에 함길도도체찰사(咸吉道都體察使)이사철이 여진인 부락과 족류의 강약을 보고한 내용을 중심으로 이다롱개의 가계를 파악할 수 있다. 그의 아버지는 자읍동개(者邑同介)이고, 아들은 두응부리(豆應夫里)이다. 이다롱개의 동생은 이유응거(李留應巨)와 이다양가(李多陽可)이다. 그의 조카, 즉 이다양가의 장남은 산옥(山玉), 둘째 아들은 독송(獨松)이다.

활동 사항

1453년 10월에 수양대군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통하여 권력을 잡자 이징옥은 함경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이징옥의 난이라고 한다. 이때 수양대군은 두만강 유역 여진인이 이징옥에게 협조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 일환으로 이 지역 유력 추장들에게 이징옥에게 협력하지 말라고 주문하였다. 이다롱개는 그 회유를 받았던 유력한 추장 중 한 명이었다(『단종실록』 1년 10월 27일).

세조는 즉위하자마자 왕권의 강화와 국방의 안정 등을 위하여 여러 여진인을 불러서 위무하였다. 그 결과 그해에만 37회, 350명이 조선에 내조하였다. 이다롱개 역시 경흥 지역의 유력한 추장이었기 때문에 1455년 11월에 관하인 7명을 거느리고 조선에 내조하였다(『세조실록』 1년 1월 11일). 같은 해 12월에 세조는 그에게 말 1필 등 물품을 하사하였고, 이듬해 1월에도 빈청(賓廳)에서 이다롱개 등을 공궤(供饋)하게 한 후, 품대(品帶)·옥관자(玉貫子)·사모(紗帽)·의복(衣服)을 내려 주었다. 특히, 그가 내조할 때의 관직은 상호군(上護軍)이었으나, 이 시점에 첨지(僉知)로 승진하였다(『세조실록』 2년 1월 6일)(『세조실록』 1년 1월 11일).

이다롱개는 이후로도 조선에 여러 차례 내조하며 환대를 받았다. 그는 1460년(세조 6) 윤11월, 1463년(세조 9) 12월, 1466년(세조 12) 12월, 1469년(예종 1) 1월, 1470년(성종 1) 12월, 1475년(성종 6) 10월 등 기록상 6차에 걸쳐 내조하였다. 이다롱개가 조선으로부터 환대받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1460년에 조선에서 모련위(毛憐衛)를 정벌하였을 때, 종군(從軍)하였기 때문이다(『세조실록』 6년 윤11월 17일). 이러한 공로로 그는 조선에 자주 조공할 수 있었고, 후하게 대접을 받았다.

이처럼 이다롱개는 조선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조선으로부터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다(『세조실록』 7년 2월 3일). 따라서 조선에서 이 지역 여진인이 동요되어 효유할 일이 있으면 그를 이용하였고, 조선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참고문헌

  • 김주원, 『조선왕조실록의 여진족 족명과 인명』,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8.
  • 박정민, 『조선시대 여진인 내조 연구』, 경인문화사, 2015.
  • 한성주, 『조선전기 수직여진인 연구』, 경인문화사, 2011.
  • 김구진, 「骨看 兀狄哈 硏究」, 『사총』 20,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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