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녕(李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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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평양성 전투에서 전공을 세운 명의 장수.

개설

이녕은 제독이여송이 군사 3만 명을 인솔하고 평양성을 공격할 때부터 참전했던 명군의 참장(參將)이다. 이녕은 이후 임진왜란이 끝나는 1598년(선조 31)은 물론 1599년(선조 32) 명군이 모두 본국으로 철수할 때까지 조선에 주둔하면서 많은 전투에 참여했다. 평양성 전투를 비롯한 여러 전투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고, 많은 전공을 세웠다. 전투 중에 간혹 지휘 실수를 하기도 해 징계를 받기도 했지만 전쟁 기간 동안 항상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활동 사항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처음으로 파견되었던 명군은 조승훈(祖承訓) 등이 인솔하는 요동군(遼東軍)이었다. 1592년(선조 25) 7월 당시 명군은 3천 명의 병력을 동원해 평양성을 공격했지만 크게 패했다. 이후 그해 11월 명에서는 대군을 조선으로 파견했다.

명에서는 병부 시랑 송응창을 경략군문(經略軍門)으로, 도독동지(都督同知)이여송을 제독군무(提督軍務)로 삼았다. 그리고 이들은 4만 3천 명 규모의 명군을 인솔하고 조선으로 출동했다.

이여송은 우선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부총병(副總兵)양원(楊元)을 중협대장(中協大將), 부총병이여백(李如栢)을 좌익대장(左翼大將), 부총병장세작(張世爵)을 우익대장(右翼大將)으로 임명했다. 이녕 역시 이 부대의 장수로 편성되어 있었다.

이여송은 1592년(선조 25) 12월 압록강을 건넜는데, 다음 해 1월에 군사를 인솔하고 평양으로 진격했다. 1월 5일에 순안현(順安縣)에 잠시 주둔했고, 다음 날 새벽에 바로 평양성을 포위했다. 일본군의 반격을 상대하던 명군은 7일부터 본격적으로 성문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8일에 대규모 전투를 통해 평양성을 회복했다(『선조실록』 26년 1월 11일).

이 과정에서 이녕은 명군이 순안에 잠시 머물 때, 이여백(李如栢)과 함께 일본군 장수 평후관(平後寬)을 사로잡고 그가 거느리고 있던 병력들을 베어 죽였다. 하지만 이때 일본군 병사 3명이 도망쳤기 때문에 이여송은 이녕의 죄를 물어 곤장을 때렸다(『선조수정실록』 26년 1월 1일).

평양성 전투 과정에서 이녕은 조승훈·갈봉하(葛逢夏) 등과 군사를 거느리고 매복했다. 일본군은 명군의 추적을 피해 큰길로 도망가다가 이녕 등의 매복에 걸려 요격되었다. 이 전투로 명군은 일본군 359명을 참획(斬獲)하고, 3명을 생포했다(『선조수정실록』 26년 1월 1일). 이후 이녕은 조승훈·갈봉하와 함께 거창(居昌)에 주둔하게 되었다(『선조수정실록』 26년 5월 1일). 정유재란 때 부총병으로 참전하였다. 1598년 4월에 거창에서 일본군과 싸우던 도중 전사했다.

참고문헌

  • 『기재사초(寄齋史草)』
  • 『명신종실록(明神宗實錄)』
  • 『양조평양록(兩朝平壤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정한위략(征韓偉略)』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상촌선생집(象村先生集)』
  • 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역사비평사, 1999.
  • 손종성, 「임진왜란시 대명외교 - 청병외교를 중심으로」, 『국사관논총』제14집, 국사편찬위원회, 1990.
  • 이현종, 「16세기 후반기 동아(東亞)의 정세」, 『한국사』12, 국사편찬위원회, 1977.
  • 조원래, 「5. 조·명군의 반격과 전국의 추이」, 『한국사』29, 국사편찬위원회, 1995.
  • 최소자, 「임진란시 명의 파병에 대한 논고」, 『동양사학연구』11, 동양사학회, 1977.
  • 최영희, 「임진왜란 중의 대명사대에 대하여」, 『사학연구』18, 한국사학회,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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