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갱생(李更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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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85년(선조 18)∼1646년(인조 24) = 62세]. 조선 중기 선조~인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공조 정랑(工曹正郞)·나주 목사(羅州牧使)이고, 봉작(封爵)은 정사(靖社) 원종공신(原從功臣)이고, 증직(贈職)은 승지(承旨)이다. 자(字)는 숙향(叔向)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서울과 광릉(廣陵)의 시골집이다. 아버지는 고부 군수(古阜郡守)이수(李綏)이고, 어머니 여흥민씨(驪興閔氏)는 판관(判官)민철명(閔哲命)의 딸이다. 사계(沙溪)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고, 홍무적(洪茂績)·허국(許國)·황일호(黃一皓)와 절친한 사이였다. 예조 참판이사영(李思永)의 조부이고, 예조 판서임상원(任相元)의 외조부다.

광해군 때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출하려는 논의가 일어나자, 홍무적(洪茂積)과 함께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심의겸(沈義謙)의 손자 심명세(沈命世)의 권유로 <인조반정>의 모의에 참여하였는데, <인조반정>이 성공한 뒤 정사공신(靖社功臣)을 책봉할 때 이를 사양하였다. 인조 때 형조 좌랑·공조 정랑을 거쳐, 양양 부사(襄陽府使)·나주목사(羅州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나주 목사 재임시, 아전이 목사이갱생을 칼로 찔러 상해를 입히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인조가 크게 노하여 전라도를 전남도(全南道)로 고치고, 나주를 금성현(錦城縣)으로 강등시켰다.

선조~인조 시대 활동

1601년(선조 34) 17세 때 아버지 이수(李綏)가 돌아갔으므로, 선영(先塋)에서 3형제가 함께 여묘살이를 하였다. 1603년(선조 36) 19세 때 탈상(脫喪)하고 아버지 친구인 사계(沙溪)김장생(金長生)의 문하(門下)에 들어가 예학(禮學)을 공부하였다. 이갱생은 사부(詞賦)를 잘 지었는데,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후, 성균관에 들어가 오랫동안 공부하였으나, 여러 차례 과거(科擧)에 떨어졌다. 이때 과장(科場)에서 부정행위가 많이 일어나는 것을 목격하고, 마침내 과거를 그만두었다. 1615년(광해군 7) 대북(大北)의 이이첨(李爾瞻) 일당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출시키려고 하자, 유생 이갱생은 홍무적(洪茂績)·정택뢰(鄭澤雷)·김효성(金孝誠) 등과 함께 대비를 폐출시킬 수 없으며, 이를 반대하는 영의정이원익(李元翼)도 죄주어서는 안 된다고 상소하였다. 이때 성균관 유생 19명이 함께 상소하였으나, 소두(疏頭: 상소의 우두머리)인 홍무적만 처벌을 받고 귀양 갔는데, 이갱생은 과거를 포기하고 충청도로 내려가 숨어살았다.[비문]

평소 친하게 지내던 서인의 영수 심의겸(沈義謙)의 손자인 심명세(沈命世)가 <인조반정(仁祖反正)>의 모의를 몰래 그에게 알리자, 새로 임금으로 추대될 능양군(綾陽君)이종(李倧: 인조)을 찾아가 만나보았다. 1623년 3월 12일 밤 홍제원(弘濟院)으로 간 이갱생은 반정군에 참여하여 광해군을 몰아내고 능양군을 추대하였고, 마침내 인조가 왕위에 즉위하는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인조반정에 공을 세운 58명을 뽑아 <정사공신(靖社功臣)>을 책봉할 때, 이갱생이 불초(不肖)하다고 여기는 김자점(金自點)이 1등 공신이 되는 것을 보고 본인은 끝까지 정사공신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사양하였는데, 나중에 이서(李曙)의 강력한 추천으로 겨우 원종공신(原從功臣)에 포함되었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김자점이 크게 화를 냈지만, 이갱생은 사과하지 않고 평생토록 절교하였다.[비문] 김자점은 인조 말년에 숙원(淑媛) 조씨(趙氏)와 손을 잡고 영의정의 되어, 소현 세자(昭顯世子)와 강빈(姜嬪)을 죽이는 등 온갖 나쁜 짓을 다하다가, 효종이 즉위하면서 처형되었다.

1623년(인조 1) 금화 현감(金化縣監)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뒤에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1624년(인조 2) 상의원(尙衣院) 판관(判官)이 되었는데,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고 공주(公州)로 피난 갔다. 이때 이갱생은 소모관(召募官)에 임명되어, 소모사(召募使)김지수(金地粹)와 함께 전라도로 가서 군사를 모집하였으나, <이괄의 난>이 한 달도 못 되어 진압되었으므로, 서울로 돌아왔다. 1626년(인조 4) 형조 좌랑(刑曹佐郞)에 임명되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수어사(守禦使)이서(李曙)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충청도와 강원도 지방을 두루 다니면서 군량미를 1천여 석이나 모았다. <정묘호란>이 끝나고 조정으로 돌아와 그해 7월에 아산 현감(牙山縣監)으로 나갔으나,[비문] 1628년(인조 6) 아산 현감을 사임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뒤에 다시 상의원 판관과 형조 좌랑을 역임하고, 1631년(인조 9) 공조 정랑(工曹正郞)으로 승진하였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9년 윤11월 27일] 1632년(인조 10) 풍덕 군수(豊德郡守)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 민씨(閔氏)의 상을 당하여, 3형제가 함께 여묘살이를 하였다. 그때 속병을 얻어 평생 고질병이 되었다. 상복을 벗고 양양 부사(襄陽府使)로 나갔으나 병으로 사임하였다.[비문]

1635년(인조 13) 한성부 서윤(庶尹)이 되었다가, 1636년(인조 14) 청도 군수(淸道郡守)로 나갔다. 이갱생은 군수로 부임한 이후, 낡은 관사(館舍)를 수리하고, 고을의 폐단을 개혁하는 한편, 군사를 정밀하게 뽑고 화포와 활 등의 병기를 수선하였다. 경상도 병마사가 청도 군수이갱생이 군사를 정선하고 병기를 잘 갖추었다고 보고하자, 인조가 표리(表裏) 1벌을 하사하였다.(『인조실록』 16년 1월 13일) 그해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병란(兵亂)을 피하여 남쪽으로 피난 온 서울의 친구들이 매우 많았다. 청도 군수이갱생은 고을 창고에 수천 석의 곡식을 비축하여 청도로 피난 온 사람들을 도와주니, 피난 시절 신세진 친구들이 그 은혜를 잊지 못하고 평생 고마워하였다. 임기가 차서 벼슬을 그만두고 서울로 돌아오자, 고을 백성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비문] 1641년(인조 19)에 인조가 이갱생 등을 개차(改差)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이조에서 직첩을 환급하였다. 1642년(인조 20) 인천 부사(仁川府使)에 임명되었다가, 그해 9월에 전라도 나주 목사(羅州牧使)에 임명되었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20년 9월 11일]

1643년(인조 21) 나주 목사이갱생이 아전의 횡포를 막고 선정(善政)을 베푼다고 보고하자, 인조가 반숙마(半熟馬) 1필을 하사하였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21년 9월 19일] 1645년(인조 23) 7월 전라도 감사윤명은(尹鳴殷)이 “나주(羅州)의 아전 양한룡(梁漢龍) 등이 목사이갱생(李更生)을 칼로 찔러 목사가 중상(重傷)을 입었으나 죽지는 않았습니다.”라고 치계하니, 인조가 크게 노하여 그 일당을 잡아 처형하고, 전라도의 명칭을 전남도(全南道)로 고치고, 나주(羅州)를 금성현(錦城縣)으로 강등시켰다.(『인조실록』 23년 7월 11일) 그해 7월에 인조는 나주 목사이갱생을 연임시키도록 명하였으나, 그는 벼슬을 사임하고 집으로 돌아왔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23년 7월 19일] 그해 10월, 이조에서는 “금성 현감(錦城縣監: 나주 부사)이갱생을 도로 부임시키려고 여러 날 재촉하였으나, 이갱생은 병세가 위중하여 먼 곳으로 부임할 수 없다고 핑계대면서 은거하고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의 병세를 보면, 본래 몸이 약한 사람으로 칼에 찔린 상처가 몹시 심한데다가 정신마저 혼미하고, 기력도 약하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23년 10월 18일] 결국 이갱생은 벼슬에서 물러나 광릉(廣陵)에 있는 시골 농장으로 돌아와 은거하였다. 1646년(인조 24년) 3월 27일 고질병으로 돌아가니, 향년 62세였다.[비문]

전라도를 전남도로 바꾼 나주 목사 이갱생 상해 사건

1642년(인조 20) 9월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부임한 이갱생(李更生)은 아전의 횡포와 토호(土豪)의 발호를 막는 등 선정을 베풀었으므로, 1643년(인조 21) 9월 인조는 나주 목사이갱생에게 반숙마(半熟馬) 1필을 하사하였다. 남쪽 지방에 자리한 나주는 중앙과 동떨어져 있어서 아전의 세력이 세었고, 비옥한 넓은 평야에 물산이 풍부하였으므로 토호(土豪)의 세력이 강하였다. 그러므로 양전(量田)할 때, 아전과 토호들이 손을 잡고 조정에서 파견한 양전관을 속이고, 자기들 마음대로 조세를 정하여 농민들을 괴롭혔다. 또 토산물 가운데 좋은 것은 골라 자기들이 차지하고 그 나머지를 진상(進上)하기도 하였다. 이갱생은 성품이 굳세고 과단성이 있으며, 총명하고 관찰력이 있어서, 본래부터 고을을 잘 다스리기로 이름이 났었다. 그는 나주 목사가 되었을 때, 그 지방의 토호들이 모질고 아전들이 포악하다고 여겼으므로, 형벌과 위력을 사용하여 아전과 토호들을 억압하였다. 그러므로 아전과 토호들이 모두 그를 원망하였다.

1645년(인조 23) 7월 11일 전라도 감사윤명은(尹鳴殷)이 “나주(羅州)의 아전 양한룡(梁漢龍) 등이 목사(牧使)이갱생(李更生)을 칼로써 찔러, 목사이갱생이 중상(重傷)을 입었으나 죽지는 않았습니다.”라고 치계(馳啓)하였다. 이 사실을 들은 조정의 임금과 신하들은 모두 경악하였다. 아전이나 고을 백성들이 중앙에서 파견한 수령관을 죽이면, 임금에게 반역하는 죄와 같았으므로, 그 고을을 반역향(反逆鄕)으로 간주하여, 고을을 강등시키고 조세와 부역을 가중(加重)하여 부과시켰다. 전라도 나주는 대나무가 번성하였으므로 대나무 화살을 만들 수 있는 전죽(箭竹)이 많았다. 나주 목사이갱생은 진상(進上)할 전죽(箭竹)을 고르는 임무를 호방(戶房) 아전에게 맡기지 않고, 본인이 직접 대나무밭에 가서 전죽 가운데 최상품만을 골라 고을 창고에 보관하였다. 이때 호방 아전 양한룡이 사람을 시켜 임금에게 진상할 전죽(箭竹)을 훔치다가 발각되었는데, 목사이갱생이 그를 힐문하였으나 자복하지 않자, 다음날 다시 그를 잡아다가 다스렸다. 그러나 아전 양한룡의 친족인 토호 정이명(鄭爾明) 등이 그의 무리 10여 명과 함께 밤중에 감옥을 습격하여, 양한룡 등을 탈출시키고, 그 길로 칼 등 무기를 가지고 아문(衙門)으로 들어와서 잠을 자던 목사이갱생을 찔렀다. 이갱생이 이불로 자기 몸을 감쌌으므로 다리를 찔려서 다행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갱생은 이를 아전 양한룡 등이 한 짓이라고 생각하고, 그 일당을 모두 체포해서 심문한 결과 과연 이들이 모두 자복하였다.(『인조실록』 23년 7월 11일)

전라도 감사윤명은이 “목사이갱생이 인심을 잃어서 이런 변고가 생겼으니, 목사이갱생을 파직시키소서.” 하고 치계하자, 이조와 비변사(備邊司)에서는 “적도(賊徒)들을 국문도 하기 전에 그 곳의 수령관을 먼저 파직시키는 것은 한갓 적도들의 마음만 부추기는 꼴이 될 뿐이니, 목사이갱생을 파직시키지 마소서.” 하니, 인조가 그를 파직시키지 않았다.(『인조실록』 23년 7월 11일) 그해 7월 16일 형조에서 나주(羅州)의 적도(賊徒)에 관한 사건을 원래의 문건과 함께 계목(啓目)으로 올리니, 인조는 “이와 같이 큰 변고를 평범하게 처리해서는 안 되니, 추고(推考)할 경차관(敬差官)을 파견하여 다시 엄중하게 국문(鞠問)해서 법에 따라 적도들을 사형에 처한 다음에 나주(羅州)의 읍호(邑號)를 강등하고, 감사(監司)는 엄중하게 추고하라.” 고 하였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23년 7월 16일] 이에 경차관 장응일(張應一)을 파견하여 적도들을 국문하여 모두 사형에 처하고, 나주(羅州)를 금성현(錦城縣)으로 강등시키고 전라도를 전남도(全南道)라고 고쳤다. 그 후, 전라도 감사윤명은(尹鳴殷)은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모든 잘못을 나주 목사이갱생에게 돌렸다고 하여, 파직 당하였다.(『인조실록』 23년 7월 11일)

원래 전라도는 큰 고을 전주(全州)와 나주(羅州)를 합하여 만든 명칭인데, 이때 반역향인 나주를 빼버리고 전주와 남원(南原)을 합한 전남도라고 명칭을 바꾸었다. 전남도라는 명칭은 1645년(인조 23) 7월부터 1664년(현종 5) 4월까지 19년 동안 사용되다가 다시 전라도로 바뀌었다. 영조 때에는 전주와 광주(光州)를 합한 전광도(全光道)라고 고쳤는데, 전광도라는 명칭은 1733년(영조 9) 1월부터 1738년(영조 14) 1월까지 5년간 사용되다가, 원래의 명칭을 다시 사용하였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33권] 이때 나주(羅州)를 금성현(錦城縣)으로 강등시키면서 명칭을 바꾸었는데, 주(州)·부(府)·군(郡)·현(縣)의 지방 제도에서 목민관은 주(州)의 정3품의 목사(牧使)에서 현(縣)의 종5품의 현령(縣令)·현감(縣監)으로 등급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현(縣)은 주(州)·부(府)·군(郡)에 속하여 조세와 부역(賦役)이 가중되었다.

1664년(현종 5) 1월에 금성현(錦城縣)을 다시 나주목(羅州牧)으로 승격시키고 목천현(木川縣)을 설치하였다.(『현종실록』 5년 1월 9일)

성품과 일화

외모는 엄격하고 냉정하였으나 내심은 너그러웠는데, 어진 사람을 만나면 존경하여 진심으로 반갑게 맞이하였으나, 불초(不肖)한 사람을 만나면 용납하지 못하고 냉정하게 외면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불초하다고 생각한 김자점(金自點)과는 평생 동안 외면하다가, 마침내 절교하였다. [비문] 성품은 굳세고 과단성이 있었으며, 머리가 총명하고 관찰력이 있었다. 풍채가 준엄하고 논리가 분명하였으며, 어머니의 가르침을 따라 기상(氣像: 기백)과 충절을 숭상하였다. 사람을 사귀기를 좋아하여 친구가 많았는데, 함께 교유하던 사람들이 모두 당대의 유명한 인물들이었다. 그와 가장 가깝게 지낸 사람은 홍무적(洪茂績)·허국(許國)·황일호(黃一皓)인데, 뒤에 세 사람은 모두 기상과 충절로 당대에 이름이 높았다. 집에 있을 때에는 어버이를 효성으로 모셨고, 관직에 있을 때에는 청렴(淸廉)하였으며, 벗과 사귈 때에는 신의(信義)를 반드시 지켰으며, 사람을 대할 때에는 기꺼이 남을 도와주었다.[비문]

이갱생의 어머니 여흥 민씨(驪興閔氏)는 평소에 훌륭한 부덕(婦德)을 가지고 있었는데, 모습도 청아하고 단정하였지만, 사리가 분명하여, 사람들과 시비를 논할 때 비록 명철한 유학자라고 하더라도 그녀를 당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 이수(李綏)가 일찍 돌아가자, 어머니 민씨는 스스로 죽지 못해서 사는 ‘미망인(未亡人)’이라고 하며, 상복(喪服)이나 삼베옷을 입고 채소만을 먹고 고기반찬 등 좋은 음식을 일체 멀리 하며, 30년 동안 고생스러운 삶을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어머니 민씨는 이부생(李復生)·이갱생(李更生)·이재생(李再生) 3형제를 홀로 기르면서 세 아들에게 의리와 충절을 지키도록 항상 가르쳤다. 이부생·이갱생·이재생 3형제는 평생 어머니의 가르침대로 법도에 따라 행동하였는데, 어머니 민씨는 세 아들이 비록 장성하였지만, 조금이라도 법도에 어긋나게 행동하면, 잘못된 점을 훈계하고 회초리를 들어 세 아들의 종아리를 때렸다고 한다.[비문]

이갱생은 평소 서인의 영수 심의겸(沈義謙)의 손자인 심명세(沈命世)와 친하게 지냈는데, <인조반정(仁祖反正)>을 모의할 때 심명세가 절친한 친구 이갱생을 반정에 끌어들이려고 온갖 방법으로 그 마음을 떠보다가, 마침내 반정(反正) 계획을 넌지시 알려주었다. <인조반정>은 서인들이 주축이 되어, 광해군과 대북(大北) 세력을 몰아내려고 모의하였던 쿠데타였다. 이때 이갱생은 “그 말이 내 귀에 이미 들어왔으니, 내가 따르지 않는다면 죽게 될 것이 분명한데, 차라리 새 임금이 되실 분을 한번 만나보고 의롭게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라고 하였다. 결국 이갱생은 심명세와 함께 능양군(綾陽君)이종(李倧: 인조)의 잠저(潛邸: 임금이 되기 전에 살던 집)로 찾아가 그를 만나보고 돌아왔는데, 그 뒤로 이갱생은 두 번 다시 능양군을 찾아가지 않았다. 아마도 이갱생은 어머니의 충절을 지키라는 가르침을 저버리는 것과 같아서 적극적으로 반정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능양군을 만나고 실망하여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던 면도 있었던 것 같다. 심명세가 이를 비판하고 그 까닭을 묻자, 이갱생은 “이것은 마땅히 우리 임금을 위하는 것이다. 미천한 사람이 새 임금과 친해지려고 하는 것은 장차 은혜를 바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대답하였는데, 인조가 그 말을 듣고 이갱생이 참으로 솔직하고 청렴하다고 여겼다.[비문]

이갱생은 친구 심명세와 약속한 대로 1623년 3월 12일 밤, 거사 장소인 홍제원(弘濟院)으로 나가, 반정군에 참여하였는데, 오합지졸의 군중들을 이끌고 창덕궁(昌德宮)을 포위하고 광해군을 몰아낸 후, 능양군(綾陽君)을 추대하였다. 그러나 이갱생은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즉시 광릉(廣陵)에 있는 시골 농장으로 돌아가 은거하였다.[비문] 어머니 민씨는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일어나기 직전에 맏아들 이부생(李復生)이 온양 군수(溫陽郡守)로 부임하였으므로, 맏아들을 따라 충청도 온양군(溫陽郡)의 관아로 가서 생활하였다.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이 제주도로 유배되고 인조가 즉위하였는데, 둘째아들 이갱생이 <반정>에 참여하여 공훈을 세웠다는 말을 들은 민씨는 “우리 아들이 어찌 이런 일에 참여하게 되었는가.” 라고 한탄하며 전혀 기뻐하지 않았다. 그 뒤에 심명세(沈命世)가 온양의 관아로 어머니 민씨를 찾아가 문안(問安)을 드리자, 민씨는 “반정은 바로 나라의 불행이다. 그런데도 자네는 반정에 참여한 것을 가지고, 스스로 공을 세운 것이라고 생각하며, 내 아들을 꾀어내 반정에 함께 참여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라고 정색(正色)을 하며 꾸짖자 심명세가 크게 부끄러워하며 자리에서 물러나왔다.

인조는 광릉의 시골집에 은거한 이갱생을 세 번이나 벼슬을 내려주고 불렀으나, 그는 힘껏 사양하고 조정에 나오지 않았다. 그 뒤에 조정에서 <인조반정>에 공훈을 세운 58명을 뽑아 <정사공신(靖社功臣)>을 책봉할 때, 그는 공신에 참여하는 것을 끝까지 사양하였기 때문에, 결국 <정사공신>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그 뒤에 정사 1등 공신 이서(李曙)의 강력한 추천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봉되었다.[비문] 이갱생은 친구의 권유로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참여하였으나, 공신을 책봉할 때 이를 끝까지 사양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에 책봉되지 않았는데, 반정에 참여한 것은 친구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한 행동이었고, 끝까지 공신 책봉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어머니의 가르침대로 충절을 지키려고 노력한 행동이었다. 공신 책봉을 사양한 이갱생의 행동 한 가지만 놓고 본다면, 동서고금의 역사를 통틀어 이갱생만큼 훌륭한 행동을 한 인물을 찾아보기가 어렵다.[비문]

심명세는 서인의 영수 심의겸(沈義謙)의 손자로서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책봉되고 청운군(靑雲君)에 봉해졌으며, 호위대장(扈衛大將)과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지냈다. 이갱생이 공신 책봉에 참여하였다면, 심명세와 같은 2등 공신 정도가 되었을 것이고, 벼슬도 판서와 재상의 반열에 올랐을 것이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 양주(楊州) 풍양현(豐壤縣) 도장동(道藏洞)의 언덕에 있는데, 외손자인 염헌(恬軒)임상원(任相元)이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있다. 처음에 경기 광주(廣州) 동면(東面) 성아리(成阿里)에 있는 부인 이씨(李氏)의 무덤에 합장하였다가, 그 뒤에 양주 도장동(道藏洞)의 언덕으로 옮겼다.[비문]

부인 함평이씨(咸平李氏)는 통례원(通禮院) 상례(相禮)이득원(李得元)의 딸인데, 자녀는 1남 2녀를 두었다. 아들 이명하(李鳴夏)는 군수(郡守)를 지냈고, 장녀는 한유경(韓有慶)에게, 차녀는 사헌부 지평(持平)임중(任重)에게 각각 시집갔다. 측실에서 2남을 두었는데, 서자(庶子)는 이광하(李光夏)와 이만하(李晩夏)이다. 손자 이사영(李思永: 이명하 맏아들)은 과거에 급제하고, 예조 참판(禮曹參判)·황해도 관찰사(觀察使)를 지냈고, 외손자 임상원(任相元: 사위 임중의 맏아들)은 과거에 급제하고, 예조 판서(禮曹判書)·의정부 좌참찬(左參贊)·홍문관 제학(提學)을 지냈다.[비문]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편]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보감(國朝寶鑑)』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해사록(海槎錄)』
  • 『소전집(少痊集)』
  • 『응천일록(凝川日錄)』
  • 『청천당집(聽天堂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