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주(儀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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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여러 가지 의식(儀式)의 상세한 절차, 또는 이를 기록한 서첩(書牒)이다.

개설

이 책은 나라의 전례(典禮)에 관한 절차를 주해(註解)해서 기록한 것이다. ‘의주(儀註)’란 여러 가지 의식의 상세한 절차를 뜻하는 말로,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중요한 행사를 사전에 마련한 ‘의주’에 의해 치렀다. 조선왕조는 각종 행사에 따라 시행된 ‘의주’를 뒷날의 필요에 대비해 기록해 두었는데, 그것이 바로 『의주등록(儀註謄錄)』이다. 『의주등록』은 훗날 전례서를 만드는 데 활용되는 기초자료였다.

또 다른 장서각에 소장된 『의주등록』은 원본을 영인하고, 해제를 덧붙여 엮은 것이다. 효종연간부터 숙종 대까지의 기록을 엮은 것으로, 원본에 따라 분류한 원문 영인자료에 표점을 하고 색인까지 추출하여, 원사료를 이용하는 독자들이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였다.

편찬/발간 경위

이 책에 대하여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의주가 틀린 이유를, “의주(儀註)는 곧 명(明)나라 고황제(高皇帝) 때에 반포(頒布)된 것으로서 우리나라에서 이를 시행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이보다 먼저 조사(詔使)가 올 때에는 모두 이 의주(儀註)를 사용하였습니다.”라고 한 것을 보면, 조선은 명나라로부터 온 ‘의주’를 모든 궁중 의식 등에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근대 국제법 체계가 관철되기 이전, 동아시아 세계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중화적 질서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한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삼국시대 이래 오랫동안 중국과 조공책봉(朝貢冊封)을 매개로 관계를 맺어왔다. 대대로 중국에서는 이 관계를 규정하는 ‘예제(禮制)’를 반포하였으며, 한국도 이를 수용하여 중국과의 관계를 모색해 나갔다. 결국 한국에서 성리학적 화이론(華夷論)에 입각한 조선왕조가 성립되면서, 이 관계는 절정을 이루게 되었다.

조선은 1392년(태조 1) 건국 이래 조선 나름대로의 예제를 지속적으로 정비하여, 마침내 1474년(성종 5)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완성할 수 있었다. 당시 중국 대륙을 장악하고 있었던 명나라에 대한 사대 의례는 대표적으로 ‘망궐례(望闕禮), 영조칙의례(迎詔勅儀禮)’를 들 수 있는데, 이 의례들은 모두 가례(嘉禮)에 편성되었다. 특히 명나라의 사신과 조칙을 맞이하는 ‘영조칙의례’는 통상 중국에서는 빈례(賓禮)로 취급하였는데, 조선에서는 가례(嘉禮)로 정립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영조칙의례’를 다룬 의주(儀註)를 통하여, 명 중심의 질서를 수용하면서도, 대내적으로는 국왕 및 왕조의 위상을 높이고자 하였다. 조서(詔書)에 관한 의례와 칙서(勅書)에 관한 의례를 분리하여, 조서에 대해서는 명에서 규정한 예제, 즉 『명집례(明集禮)』의 방식을 따르면서도, 칙서에 대해서는 그 절차를 훨씬 간소하게 꾸렸다. 고압적인 배례 중의 하나였던 앙두(叩頭)도 1회에 그쳤다. 『고려사(高麗史)』 예지(禮志) 단계에서는 앙두가 3회 있었는데, 이를 줄여 국왕의 대내적 위신을 최대한 높이려 한 것이다.

명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이와 같은 조선의 자구 노력은 사대의리를 거스를 수도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국조오례의』 성립을 전후로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들은 종종 조선의 영조칙(迎詔勅) 의식이 명례(明禮)를 따르지 않은 점을 지적하였다. 심지어 명 이전 요(遼), 금(金), 원(元) 등 정복 왕조나 사용하던 ‘오배삼앙두(五拜三叩頭)’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결국 이를 사용하지 않고, 『국조오례의』의 완성을 통하여 독자적인 영조칙(迎詔勅) 관련 ‘의주’를 마련하였다.

서지 사항

39종 79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초고본이다. 사주단변이고, 반곽은 32×21cm이다. 오사난(烏絲欄), 반엽, 10행 자수부정(不定), 주쌍행, 내향화문어미를 갖추고 있고, 크기는 40.6×26.7cm이며, 규장각, 장서각,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의주(儀註)는 ’의주(儀注)‘라고도 한다. 조선왕조에서는 1443년(세종 25)에 의주상정관(儀註詳定官)을 두어, 왕실에서 거행하는 각종 의식의 진행 절차를 제정하게 했고,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 그에 합당한 의전절차를 마련해 이에 따라 거행하였다.

왕실의 예식은 대체로 『국조오례의』·『속오례의』·『상례보편(喪禮補編)』 등을 참고해 진찬하였다. 특히, 임금·세자 등의 혼인 및 장례와 세자·왕후 등의 책봉 행사를 비롯해, 그 밖에 건물의 축조, 공신책봉, 궁실의 개조, 선왕에 대한 추호 행사(追號行事), 실록 편찬 등을 포함한 왕실 및 국가적 행사에는 특별히 도감이나, 실록청을 설치해 운영하였다.

또한 행사가 끝난 뒤에는 다시 의궤청(儀軌廳)을 설치해, 그 일의 논의 과정에서부터 행사 후에 유공자에 대한 포상에 이르기까지 관계된 전교(傳敎)·계사(啓辭), 해당 관청 사이에 오간 문첩(文牒), 소요된 경비와 인원 따위를 빠짐없이 기록해 의궤를 편집, 후세에 참고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영조·정조 때까지만 해도 임금이나 왕후가 농잠(農蠶)의 중요성을 실감하기 위해, 행했던 친경례(親耕禮)·친잠례(親蠶禮) 등을 거행한 뒤에도 의궤를 편집할 만큼 각종 행사를 치르는 데 비교적 성대하게 준비, 거행하였다.

조선 말기에 들어오면서, 왕실의 각종 행사를 간소화함에 따라, 이 의궤의 편집도 현저히 줄어든 반면에, 이때부터는 일정한 기간 동안 왕실에서 행한 여러 가지 의식의 시행시기·명칭·준비 과정 등을 한꺼번에 기록한 『의주등록(儀註謄錄)』의 편집이 눈에 띄게 증가하였다. 그러면서도 1897년(고종 34) 10월에 고종이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대한제국의 황제로 존칭되는 의식의 거행에는 『고종대례의궤(高宗大禮儀軌)』를 편집하는 등 의식의 규모가 웅장할 때에는 이처럼 의궤의 편집도 지속적으로 시행되었다. 그러나 이 의궤의 편집이 꼭 도감이나 의궤청을 통해서만 이루어졌던 것은 아닌 듯하다. 예를 들면, 현재 국립중앙도서관·규장각·장서각 등에는 여러 종류의 『의주(儀註)』·『의주(儀注)』·『의주등록』 등이 내용이나, 분량에서 매우 다양하게 전해지고 있다.

특히 한말에 구미 제도를 참작해 새로 제정한 신식예복으로 복장이 바뀌고, 이전까지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임금의 거동에 의장을 갖춘 행렬의 총지휘를 병조판서가 맡았지만, 그 이후로는 궁내부대신이 대신하는 한편, 의주의 본문 이외에는 국·한문 혼용체로 되어 있다.

‘의주’에 관한 가장 직접적인 자료는 앞서 말한 규장각 소장의 『의주』·『대열의주』·『삼반례식(三班禮式)』, 장서각 소장의 『의주』·『의주등록』·『의주등록속』·『의주등록목록』 등이 있다. 그 밖에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예장청등록(禮葬廳謄錄)』·『친림경무대대종회의(親臨景武臺大宗會儀)』·『조선궁중제의절(朝鮮宮中諸儀節)』·『묘제의(墓祭儀)』·『각전궁동가의절(各殿宮動駕儀節)』·『의절유초(儀節類抄)』·『영흥본궁의식(永興本宮儀式)』 등 왕실의 예식으로부터 사가(私家)의 제사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행사를 대상으로 마련한 의주들이 전해지고 있다.

의의와 평가

『의주』는 조선의 방대한 궁중의식의 의례를 종합해 놓은 것으로 조선시대 국중의식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자료다.

참고문헌

  • 김명희·김아현·손은주, 「『고종정해진찬의궤』에 나타난 의례식 분석-의주(儀註)를 중심으로-」, 『외식경영연구』 제18권 제4호 통권 제68호, 서울: 한국외식경영학회, 2015.
  • 신병주, 『66세의 영조 15세 신부를 맞이하다』, 효형출판, 2001.
  • 윤서석, 「한국의 풍속 잔치」, 『우리 문의 뿌리를 찾아서』 24,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08.
  • 이범직, 『조선시대 예학연구』, 국학자료원,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