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승방번전(義僧防番錢)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조선후기에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을 수비하는 승군(僧軍)에게 급료를 주기 위해 전국 각지의 승려에게서 징수한 번전(番錢).

개설

조선 왕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외적의 침입을 계기로 외적 방어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리하여 전국의 군사 요충지에 각종 방어 시설을 본격적으로 구축하였는데, 산성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전란 당시에 많은 활약을 했던 승려들은 산성을 축성하는 데 동원되었을 뿐 아니라 그 방어까지 담당해야 했다. 특히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을 수비하는 데는 전국의 승려들이 동원되었는데, 숙종 연간에는 전국 사찰의 승려들로 하여금 교대로 돌아가면서 번(番)을 서게 하는 의승방번(義僧防番) 제도가 확립되었다. 하지만 의승방번의 부담이 점차 가중되자, 영조대에는 급료병(給料兵) 형식으로 운영되는 의승방번전(義僧防番錢) 제도로 전환하여 그 부담을 덜어 주려 하였다.

내용 및 변천

임진왜란 당시 승군의 우수성에 주목한 조선 조정은 두 차례의 전란 이후 승려들의 우수한 조직력과 노동력을 국역에 적극 활용하려 하였다.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이 산성 축조에 승려들을 대거 동원한 것이었다. 1624년(인조 2)에는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고 후금(後金)의 압력이 점점 가중됨에 따라 수도를 방어하는 데 문제가 있음을 절감하게 되면서 남한산성을 축성하였다. 또 1711년(숙종 37)에는 북한산성을 추가로 축조하였다. 완공 이후에는 두 산성에 승군을 주둔시켜 수도 방위 임무의 일부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그 뒤 1714년(숙종 40)에는 판부사(判府事)이유(李濡)의 건의에 따라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에 각각 의승군(義僧軍) 350명씩을 배정하여 매년 여섯 번 즉 두 달씩 교대로 번을 서게 하는 의승방번 제도를 시행하였다.

그러나 의승방번은 승려가 감당해야 할 역(役)이 과중할 뿐 아니라, 승려들을 경기도로 보내는 비용까지 사찰에서 감당해야 했기 때문에 불교 교단에 큰 부담이 되었다. 그리하여 1756년(영조 32)에 영조는 승려를 직접 동원하는 대신에 번전(番錢)이라는 돈을 내도록 하고, 조정에서는 번전으로 산성에 상주하며 번을 설 산성승을 고용하는 의승방번전 제도를 시행하게 하였다. 우선 각 고을에 번전의 액수를 배정하고 10월에 모두 납부토록 하였다. 징수 책임자인 고을 수령이 번전을 병조로 올려 보내면, 병조에서는 다시 수어청과 총융청에 각각 나누어 주었다. 그러면 두 군영에서는 매년 여섯 차례에 나누어 산성의 도총섭에게 번전을 지급하였다.

의승방번전 제도는 운영된 지 수년 만에 승려들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하여 사회 문제로까지 대두되었다. 의승방번전 제도에 따라 번전을 납부한 승려들에게는 각종 잡역(雜役)이 면제되어야 했지만, 능묘(陵墓)를 조성하거나 산성을 축조할 때 또다시 그 승려들을 동원하는 일이 잦았다. 그 결과 의승방번전 제도는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어려움을 견디다 못한 승려들은 절을 떠나고 폐사하는 절들이 속출하였다. 이에 승려의 부담을 덜어 줄 것을 청하는 지방관의 상소가 이어졌다. 예컨대 경상도관찰사조시준(趙時俊)은, 막대한 의승방번전의 부담으로 인해 많은 승려가 환속하게 되어 100개의 사찰과 100명의 승려가 부담해야 할 부역을 10개의 사찰과 10명의 승려가 부담할 수밖에 없어 그 가혹함이 지대하다고 지적하였다. 이같은 의승방번전 제도의 폐단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자, 1785년(정조 9)에 정조는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의 의승방번전을 반감해 주도록 하였다.

참고문헌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김갑주, 「정조대 남북한산성 의승방번전의 반감」, 『소헌남도영박사화갑기념논총』, 1983.
  • 박용숙, 「조선조후기의 승역에 관한 고찰」, 『인문사회』31, 부산대학교, 1981.
  • 안계현, 「조선전기의 승군」, 『동방학지』13,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1963.
  • 우정상, 「남북한산성 의승방번전에 대하여」, 『불교학보』1,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1963.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