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상지(儀象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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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청나라 강희제 때, 벨기에 선교사인 페르비스트가 지은 천문학서를 유성덕이 기술하여 만든 책.

개설

이 책은 중국 청나라 강희제 때, 벨기에 선교사인 페르비스트가 지은 천문학서를 유성덕이 기술한 것이다. 『신제영대의상지(新制靈臺儀象志)』ㆍ『영대의상지』라고도 한다. 청나라 강희제(康熙帝) 때 벨기에의 선교사인 페르비스트(Ferdinand Verbiest: 중국명 남회인(南懷仁))가 흠천감부(欽天監副)로 임명되었을 때 짓고, 유성덕(劉聖德)이 기술한 것이다. 한국에서는 1715년(숙종 41) 4월 관상감정(觀象監正)으로 있던 역관허원(許遠)이 청나라에 가서, 하석(河錫)에게 역법을 배우고 돌아올 때 가지고 온 뒤 관상감에서 13책, 그림 2책으로 모사(模寫)ㆍ간행하여 관상에 이용하였다. 저자 남회인(南懷仁)은 1641년 예수회에 입회하고, 벨기에ㆍ에스파냐ㆍ로마 등지에서 5년 동안 공부했다. 1657년 중국 선교사로 명령을 받고, 1659년 청나라로 들어가, 산시[陝西] 지방에서 전교했다. 1660년 강희제(康熙帝)의 명으로 베이징[北京]에 들어가 샬 폰 벨과 함께 천문ㆍ역사 서적들을 편찬하고, 관직에 올라 흠천감 감정(欽天監監正, 천문대장)을 지냈다. 그 후 한 때 흠천감에서 추방당한 일도 있었으나, 곧 복직되어 청나라 공력(公曆, 국가에서 발행하는 달력) 제작을 감독하였다.

오삼계(吳三桂)의 난(亂) 때에는 대포를 만들어 황제의 환심을 샀는데, 그 공로로 공무시랑(工務侍郞)이 되어 1692년 그리스도교를 공인(公認)받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1678년 러시아와의 회담에서는 통역자로 일하면서 얻은, 시베리아를 통해 러시아를 가로지르는 육로(陸路)에 대한 정보는, 그 후 중국으로 오는 예수회 선교사들이 이용하였다. 저서에는 『성체답의(聖體答疑)』, 세계지도인 『곤여도설(坤輿圖說)』(1672), 『영년역법(永年曆法)』 등이 있다.

서지 사항

14권 14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목판본이다. 크기는 세로 25.0cm, 가로 16.0cm이며,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의상지』는 벨기에 사람인 페르비스트가 저술한 천문기구에 대한 책이다. 여기서 ‘의상(儀象)’이란 천문기구를 말한다. 그냥 아름다움만으로 밤하늘의 별을 본다는 것은 과학이라기보다는 낭만이지만, 옛사람들은 하늘에서 과학을 시작하였다. 별을 본 것만이 아니라, 관측을 하였으며, 별에 이름을 붙이고, 별이 뜨고 지는 시각. 별의 위치를 객관적으로 나타내기 위한 위치측정(위도와 경도) 등을 했다. 그러려면 시계도 있어야 하고, 별을 관측하는 기구도 필요했다. 이 ‘천문관측기구’를 ‘의상’이라고 불렀다.

세종대왕 때 만든 간의ㆍ혼의ㆍ혼상ㆍ앙부일구ㆍ자격루 같은 것이 모두 의상이다. 중국에서도 옛부터 많은 혼상을 만들어 사용했다. 그러다가 서양선교사가 들어 온 이후 서구식 방법에 의한 의상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남회인의 『의상지』는 별을 측정하는 기구에 대해 쓴 것으로 측정기구의 종류와 제작방법, 설치방법, 사용방법 등을 상세히 적은 책이다.

남회인의 기록을 보면, 『의상지』를 통해 별들의 좌표(성표)를 기록하고, 실제로 여러 천문기구를 제작하였지만, 성도를 제작한 기록은 없다. 다만 남회인 이후에 천문대장이 된 민명아(閔明我)에 의해 방성도가 그려진 적이 있다. 『의상지』에는 각종 천문기구와 이것을 만드는 도구(제도기ㆍ기중기ㆍ측량기 등)의 그림도 있고, 천문기구를 설치하는 방법을 그린 그림도 있다. 이 천문기구들은 지금 중국 북경의 고관상대에 모두 전시되고 있다. 옛날 조선시대에 우리 학자들은 뒷돈을 주고도, 구경 할 수 없었던 귀한 물건들이다. 이 천문기구들은 대형이면서, 모두 청동으로 만들어져, 아주 무겁다. 그래서 이것을 운반하고, 들어 올리고 설치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의상지』는 천문기구를 만들어서 설치하고, 사용하는 방법까지 글과 그림으로 상세히 설명한, 지금으로 보면 설계도면, 제작시방서, 설치시방서, 사용설명서가 모두 망라 된 책이다.

의의와 평가

조선후기 천문역산학의 전개 과정은 『시헌력(時憲曆)』의 원리와 계산법을 습득하기 위한 고단한 여정의 연속이었다. 17세기 후반까지도 시헌력에 대한 이해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로 인해 청과 조선의 역법 사이에 오차가 발생하였다. 숙종 대에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관상감 관리를 청에 파견하여, 역법을 배우고, 그와 관련된 각종 참고서를 구입해 오게 하였다. 시헌력의 세부적 계산법을 습득하기 위한 조선 정부의 노력은 숙종대 전 기간 동안 계속되었다. 『시헌력』에 대한 이해의 심화와 함께 서양식 천문의기(天文儀器)에 대한 관심도 증대되었다.

숙종대에 추진된 각종 천문의기의 제작 사업은 서양식 천문의기에 대한 이해와 수용의 과정이기도 했다. 그것은 양란(兩亂) 이후 피폐화된 조선왕조의 천문의기를 개수하기 위하여, 중국으로부터 서양의 앞선 천문의기 제작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숙종대에는 청에서 『의상지(儀象志)』를 구입해 와서 관상감에서 간행하였고, 여러 가지 천문의기를 수입하였으며, 서양식천문의기의 제작을 추진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천문역산학 사업을 담당하는 주무 부서인 관상감의 제반 여건을 개선하기 위한 사업도 추진되었다. 그것은 관상감 건물의 수리, 재정 여건의 개선을 위한 노력, 전문가 양성을 위한 노력 등으로 구체화되었다. 청을 중심으로 구축된 새로운 세계질서 속에서 조선왕조가 그 구성원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시헌력 체제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으로 요구되었다.

숙종대 천문역산학 정비 사업은 이러한 현실적 필요성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면서도 거기에는 정치사상적 필요성이 내재되어 있었다. 유교ㆍ주자학에서는 천문역산학이 역대 제왕들의 필수적인 사업으로 간주되었다. 조선왕조 역시 그와 같은 이념 하에서 국초 이래로 『경천애민(敬天愛民)』의 정치사상을 표방하였다. 양란 이후 국가재조를 담당해야 했던 조선후기의 국왕들은 이러한 문제에 더욱 주목하였다. 숙종 역시 마찬가지였다. 요컨대 숙종대에는 국가체제의 재정비를 통해 조선왕조의 정통성과 국왕의 권위를 회복하고자 노력하였으며, 천문역산학도 그러한 목적에 복무하였던 것이다.

참고문헌

  • 구만옥, 「숙종대의 과학과 실학: 숙종대(肅宗代)(1674-1720) 천문역산학(天文曆算學)의 정비」, 『한국실학연구』 24권, 한국실학학회, 2012.
  • 이은성, 『한국의 책력』 상ㆍ하, 전파과학사, 19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