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양풍수학(陰陽風水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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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음양학을 가르치는 잡학 중의 하나.

개설

음양풍수학(陰陽風水學)은 1406년(태종 6)에 십학(十學)의 하나로 설치되었으며, 1466년(세조 12) 관제 개정 때 천문학·지리학·명과학으로 개칭하였다.

내용 및 특징

음양풍수학은 십학의 하나로 고려말인 1390년(공양왕 2)에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고려사(高麗史)』「백관지(百官志)」에 따르면 예학(禮學)은 성균관(成均館), 악학(樂學)은 전의시(典儀寺), 병학(兵學)은 군후소(軍候所), 율학(律學)은 전법시(典法寺), 자학(字學)은 전교시(典校寺), 의학(醫學)은 전의시(典醫寺), 풍수음양학(風水陰陽學) 등은 서운관(書雲觀), 이학(吏學)은 사역원(司譯院)에 각각 속하게 하고, 교수관(敎授官)이 전문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런데 실제로 언급된 영역은 8개였다. 나머지 2개는 “풍수음양학 등은 서운관에 둔다.”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천문학·풍수학·음양학의 3학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을 건국하면서 유학을 독립시키고 풍수음양학은 폐지하고 1393년(태조 2)에 육학(六學)을 설치하였다(『태조실록』 2년 10월 27일). 그러다가 1406년(태종 6)에 하윤(河崙)의 건의에 따라 음양풍수학을 유학(儒學)·무학(武學)·이학(吏學)·역학(譯學)·의학·자학(字學)·율학(律學)·산학(算學), 악학과 함께 십학의 하나로 설치하였다(『태종실록』 6년 11월 15일). 십학 중에서 양반들이 입학하는 유학과 무학을 제외한 나머지 제학(諸學)을 잡학(雜學)이라 하였다.

『원육전(原六典)』에는 천문(天文)·지리(地理)·성명(星命)·복과(卜課)를 총칭하여 음양학(陰陽學)이라 일컬었는데, 1406년(태종 6)에 십학의 하나로 음양풍수학을 설치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1438년(세종 20)에 역상(曆象)·일(日)·월(月)·성신(星辰)에 관한 학문을 천문학(天文學)이라 하고, 지리에 관한 학문은 풍수학(風水學)이라 하게 되자 성명·복과에 관한 학문만 음양학이라 칭하게 되었다(『세종실록』 20년 10월 22일). 그 후 1466년(세조 12년) 관제 개정 때 풍수학은 지리학(地理學)으로 이름을 고쳐서 교수·훈도 각 1명을 두고, 천문학은 교수·훈도 각 1명을 두고, 음양학은 명과학(命課學)으로 이름을 고쳐서 훈도 2명을 두었다(『세조실록』 12년 1월 15일).

음양학은 조선초기에 특히 건국과 관련하여 민심의 향배, 하늘에 대한 경외감 등으로 역할이 컸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기상이변이나 재이(災異)현상에 관한 기록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음양관은 도읍 입지 선정, 각종 국가행사의 길일(吉日) 선택, 제언(堤堰)을 쌓는 곳의 택지(擇地) 등의 실무를 담당하였으며, 해괴제(駭怪祭)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역술(曆術)에 정밀한 자는 자급(資級)을 뛰어 올려 관직을 주기도 하였다.

음양과는 천문학·지리학·명과학 등의 전공이 있었으며, 대과·소과의 구별이 없는 단일과로서 식년시와 증광시에만 실시하였다. 합격자 정원은 초시에 천문학 10명, 지리학 4명, 명과학 4명 총 18명, 복시에 천문학 5명, 지리학 2명, 명과학 2명 총 9명으로 식년시와 증광시가 동일하였다. 국가에 경사가 겹쳤을 때 특별히 실시하는 대증광시는 초시에 각 전공별로 4명, 복시에 각 전공별로 2명씩을 더 선발하였다. 음양학은 서울에 45명의 생도가 있었으며, 전공별로는 천문학 20명, 지리학 15명, 명과학 10명으로 나뉘어 관상감에서 교육받았다. 지방에는 음양학 생도가 없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이성무, 『한국 과거제도사』, 민음사, 1997.
  • 한우근 외, 『역주 경국대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5.
  • 김대식, 「조선 초 십학 제도의 설치와 변천」, 『아시아교육연구』12-3, 2011.
  • 이남희, 「조선후기 잡과교육의 변화와 특성」,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13-1, 2014.
  • 이성무, 「조선초기의 기술관과 그 지위」, 『혜암유홍렬박사 화갑기념사학논총』,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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