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신사(乙未信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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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년(효종 6) 일본의 제4대 장군 덕천가강(德川家康)의 취임을 축하기 위하여 조선에서 파견하였던 사신단. 을미통신사라고도 한다.

개설

1651년(효종 2) 일본의 제3대 장군이었던 덕천가광(德川家光)이 사망하자 그의 장남이었던 덕천가강이 제4대 장군으로 취임하였다. 조선에서는 취임 축하를 위하여 1655년 을미통신사를 파견하였다. 일본 측의 권유에 의하여 덕천가강의 무덤이 있는 일광산(日光山)을 다녀오기도 하였다.

연원 및 변천

덕천가강이 취임하고 2년이 지난 1653년(효종 4) 9월 대마도주(對馬島主) 종의성(宗義成)은 통신사 파견 요청서를 예조 참판과 예조 참의, 동래부사와 부산첨사 앞으로 보냈다. 이어 이듬해 6월과 9월에는 통신사가 1655년 8월 초순에 강호에 도착할 것을 요청하였고, 1655년 1월에는 5월 하순에 대마도에 도착할 것과 8월 하순에 강호에 도착할 것을 요청하였다.

사행의 강정절목(講定節目)은 1654년(효종 5) 예조와 동래부의 지시를 받고 대마도에 갔던 문위역관(問慰譯官)이형남(李亨男)·박원랑(朴元郞) 등과 대마번 사이에서 결정되었다. 사행단의 편성은 정사는 조형(趙珩), 부사는 유창(兪瑒), 종사관은 남용익(南龍翼)이었다. 그 외에 당상역관(堂上譯官)·상통사(上通事)·의원 등까지 모두 485명으로 구성되었다. 을미통신사행은 1655년 효종을 알현하여 하직 인사를 하고 출발하였다. 통신사는 왕명을 수행하는 사행인 만큼 국내 노정에는 전별연(餞別宴)과 해신제(海神祭) 등 공식 행사가 있었다. 전별연은 일본으로 향하는 통신사를 위로하는 잔치로 충주·경주·안동·영천·부산에서 열리다가 접대의 간소화로 1655년 을미통신사부터는 중간 집결지인 영천과 최종 집결지인 부산에서만 행해졌다.

을미통신사행은 1655년 6월 9일 부산을 출항하였고, 7월 21일 대마도주 종의성과 이정암(以酊菴) 장로(長老)들의 호행을 받으며 대마도에서 출항하였다. 강호성에 들어가 국가의례를 수행한 것은 10월 8일이었다. 의례가 끝난 후 이전 사행과 마찬가지로 향연이 있었다. 10월 18일에는 덕천가강의 무덤이 있는 일광산에 도착하였다. 통신사행의 일광산 방문은 일본의 강한 요청에 의한 것으로 ‘산수유람’과 양국 선린의 상징적인 행사인 ‘치제(致祭)’를 수행하기 위하여 1636년(인조 14), 1643년(인조 21년) 그리고 1655년 통신사행 때 실시되었다. 1655년 통신사의 일광산행은 덕천가강에 대한 분향과 3대 장군 덕천가광에 대한 치제로까지 확대된 것이 특징이었다. 조선에서는 일광산 치제 제문과 등롱(燈籠) 1쌍, 일광산 편액 제작 등 거듭된 대마번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일광산 치제에서 을미신사는 조선 왕의 어필을 봉안하고 참배를 끝냈다.

통신사행이 강호를 떠날 때 덕천가강의 국서와 선물 품목이 적힌 별폭(別幅)을 받아서 출발하였다. 1656년(효종 7) 2월 10일 부산에 입항한 후 20일에 한양에 돌아와 복명(復命)을 마칠 때까지 10개월이 걸렸다.

참고문헌

  • 민덕기, 『前近代 동아시아 세계의 朝·日관계』, 경인문화사, 2007.
  • 손승철, 『조선시대 한일관계사 연구』, 지성의 샘, 1994.
  • 三宅英利, 『近世日朝關係史の硏究』, 文獻出版, 1986.
  • 한태문, 「조선후기 通信使 使行錄에 반영된 日光山行」, 『韓民族語文學』 65,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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