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해사(銀海寺)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인종의 태실 수호사찰로, 경상북도 영천시팔공산에 있는 절.

개설

은해사(銀海寺)는 통일신라 때인 9세기에 창건되어 고려시대에는 유가종 사찰이었다. 동화사, 파계사, 부인사 등과 함께 팔공산불교를 이끌었다. 원래 이름은 해안사(海眼寺)였고, 조선전기에 인종(仁宗)의 태실(胎室) 수호사찰로 지정되었다. 1545년(인종 1) 천교(天敎)가 절을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여 중창하면서 은해사로 바꿨다. 1712년(숙종 38) 종친부(宗親府)에 귀속시켰다. 태실 수호사찰을 명분으로 종친부에 귀속됨으로써 왕실의 직접 보호는 물론 재정 지원도 받을 수 있었다. 이를 통해 1712년부터 1761년에 이르는 장기간의 중창이 전개되었다. 19세기 이후 여러 차례의 중건이 이어졌고, 추사김정희(金正喜)가 전각 대부분의 현판을 직접 쓰기도 하였다. 조선후기 화엄교학의 전통을 잇는 강원이 개설되어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내용 및 변천

(1) 창건

창건에 관해서는 두 가지의 설이 있다. 먼저 809년(신라 헌덕왕 1) 혜철(惠哲) 국사(國師)가 해안사로 창건하였다고 한다. 혜철은 전라남도 곡성의 태안사(泰安寺)에 동리산문(桐裏山門)을 개창한 신라하대의 대표적인 선승이다. 은해사의 창건에 관한 자세한 내력은 전하지 않지만, 9세기 신라불교의 흐름이 대부분 선종 중심이었으므로 창건 당시부터 선찰(禪刹)이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헌덕왕 창건설이다. 헌덕왕은 조카인 애장왕을 폐위시키고 즉위하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무력을 동원하였고 그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절을 창건하여 명복을 기원하였다고 한다.

(2) 고려시대

고려시대 들어 1270년(고려 원종 11) 홍진(弘眞) 국사(國師)혜영(惠永)과 1275년 원참(元旵)이 중창하였다. 혜영은 고려후기의 유가종 승려이다. 1290년(고려 충렬왕 16) 사경승 100명을 데리고 원나라에 들어가 많은 경전을 사경하였다. 원나라에서 『인왕경』을 강의하여 큰 존경을 받았다. 원참은 1298년(고려 충렬왕 24) 거조사(居祖寺)에서 악서(樂西)라는 도인을 만나 전해들은 이야기를 『현행서방경(現行西方經)』으로 기록하였다. 중창의 내력은 전하지 않지만 국사의 지위에 오를 정도의 고승들이 주석하였던 명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고려후기에는 일연(一然)이 은해사에서 멀지않은 군위인각사(麟角寺)에 머물며 『삼국유사』를 찬술한 것으로 유명하다.

(3) 조선시대

조선시대 들어 1515년(중종 10) 은해사는 인종의 태실 수호사찰이 되었다. 왕실의 태(胎)는 국운과 직접 관련이 있다고 소중하게 석실을 만들어 보관하였다. 태실 주변에서는 채석·벌목·개간·방목 등 일체의 행위를 금지시켰다. 관할 구역의 관청에게 태실 관리의 책임을 맡겼으나 현실적으로 깊은 산중에 있어 가까운 사찰에 맡기는 일이 흔했다. 사찰은 태실 수호의 책임을 맡는 대신에 왕실의 지원과 보호를 받을 수 있어 사격을 높이는 좋은 방안이었다.

1545년 천교가 절을 이전하여 중창한 후 비로소 이름을 은해사로 바꾸었다. 은빛 바다가 춤추는 극락정토, 또는 절 주변에 안개가 끼고 구름이 피어날 때면 그 광경이 은빛 바다가 물결치는 듯하다는 뜻이다. 1563년(명종 18)과 1589년(선조 22) 각각 중건이 있었다. 17세기에도 중건과 중수가 이어졌고, 1712년 주지 일주(一珠)가 절을 종친부에 귀속시켰다. 일찍이 절은 인종의 태실을 수호하는 사찰이 되었지만 과도한 부역에 고통을 겪고 있었다. 종친부에 귀속됨으로써 지방 토호와 관아의 속박에서 벗어나 왕실의 직접 관리를 받는다는 사실은 절의 위상을 한층 높이는 일이었다. 곧바로 왕실의 지원을 받아 대대적인 중창이 이어졌다. 1712년부터 1761년까지 50년에 걸친 장기간의 불사를 통해 오늘날 가람의 원형을 이룩하였다. 1778년(정조 2) 절에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었다(『정조실록』 16년 4월 7일). 조선 왕실의 관리 사찰이라는 인연으로 신라 역대왕의 영정도 봉안한 듯하다. 1782년에는 현왕도를 조성하였다. 이 무렵 조선후기의 대강사 영파성규(影坡聖奎)가 주석하면서 절을 중창하고 강원을 열었다. 영파는 화엄학과 선·염불 등에 모두 밝았던 인물로 은해사의 교학 전통을 수립하였다. 「갑자갑수공명비(甲子甲樹功銘碑)」, 「영천군은해사적」 등을 찬술하였다.

1787년(정조 11)에는 인악의첨(仁岳義沾)이 절에 머물며 갑오갑계의 공덕비를 세웠다. 인악 역시 조선후기의 대강백으로 주로 비슬산(琵瑟山)·팔공산·불영산(佛影山) 등 영남 지방에서 교학을 전파하였다. 명성이 왕실에까지 미쳐 1790년(정조 14)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수원 용주사(龍珠寺)를 창건하고 불상을 조성하여 점안(點眼)할 때 증사(證師)로 초빙되었다. 이때 「불복장원문경찬소(佛腹藏願文慶贊疏)」와 「용주사제신장문(龍珠寺祭神將文)」을 지었다. 정조는 그의 문장에 감탄하여 홍제(弘濟)라는 호를 내렸다.

1847년(헌종 13) 화재로 가람이 거의 전소되었다. 팔봉(八峰) 등의 노력으로 전각 대부분을 중건하였다. 대웅전·심검당·향실·청풍료·설현당·보화루·향적각·옹호문·안양전·만월당·동별실 등 대가람의 모습을 갖추었다. 이때 김정희가 힘을 보태 대웅전과 보화루 등의 여러 편액을 썼다.

조선후기에는 많은 사찰계(寺刹契)가 활동하면서 절의 재정이나 운영에 큰 도움을 주었는데, 은해사에서는 19세기 중엽까지 8개 이상의 갑계가 활동하였다. 1822년(순조 22) 무렵 갑계에 소속된 승려만도 350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볼 때 당시 은해사의 규모와 갑계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은해사는 갑계 등의 활동으로 재원을 마련함으로써 중건을 계속해 나갔다. 중건을 마치고 1862년(철종 13)에는 혼허지조(混虛智照)가 「은해사중건기」를 썼다. 또한 중건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군수들의 공덕을 비로 조성하였다. 19세기 사찰의 역사에서 이처럼 군수를 칭송하는 공덕비를 흔히 볼 수 있다. 억불의 시대였지만 이미 불교는 기층 신앙으로 확고히 자리잡고 있었고, 유학으로 입신한 관료들에게도 불교는 중요한 신앙이고 전통 문화였다.

(4) 근현대

1920년 주지 석담(石潭)이 대웅전 등을 중건하였다. 중건을 마치고 김달현(金達鉉)이 「은해사중수기」를 지었다. 1943년에는 김정래(金鼎來)가 「팔공산은해사사적비」를 써서 창건부터 당시까지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였다. 은해사의 근현대사에는 역사적 인물이 적지 않다. 먼저 독립운동가 김법린(金法麟)은 15세에 이곳에서 출가하였다. 평생을 독립 운동과 불교 혁신에 헌신하였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문교부장관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또한 현대의 고승으로서 동곡일타(東谷日陀)는 한국불교의 정통 율맥을 계승하였다. 은해사의 조실로서 조계종의 전계대화상을 지냈다. 현재 은해사는 대한불교조계종의 제10교구 본사로서 영천시, 경산시, 청송군, 군위군 등 4개 지역 50여 개 말사를 관장하고 있다. 은해사의 역사에서 산내 암자는 중요한 위상을 지닌다. 거조암(居祖庵), 백흥암(百興庵), 운부암(雲浮庵), 기기암(寄寄庵), 묘봉암(妙峰庵), 중암암(中巖庵), 백련암(白蓮庵), 서운암(瑞雲庵) 등 유구한 역사와 귀중한 성보를 지닌 암자들이다. 특히 거조암의 영산전과 백흥암 극락전의 수미단(須彌壇), 운부암의 청동보살좌상 등은 국가문화재로서 중요한 성보이다.

참고문헌

  • 김용태, 『조선후기 불교사 연구: 임제법통과 교학전통』, 신구문화사, 2010.
  • 은해사, 『은해사 사지』, 사찰문화연구원, 2006.
  • 정인수, 『산사로 떠나는 여행: 팔공산 동화사·은해사·갓바위부처』, 문예마당, 2006.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