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복사(隆福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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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북경에 있던 티베트불교의 사찰.

개설

융복사(隆福寺)는 1452년에 창건되었으며, 1744년에 티베트불교 사원으로 재건되었다. 1797년 건청궁(乾淸宮) 교태전(交泰殿)에 화재가 나서 수리를 할 때 융복사 불전 재목을 사용하였으며, 황제가 여러 황릉(皇陵)을 참배할 때 융복사에 들르기도 했다. 당시 융복사에는 우리나라 5일장과 비슷한 묘회(廟會)가 열려 큰 시장이 형성되었다.

내용 및 특징

(1) 절의 연혁

융복사는 중국 북경 동성구(東城区) 융복사가(隆福寺街)에 있던 사찰이다. 이 사찰은 1452년에 처음 지어졌다. 명나라 경제(景帝)가 내린 조서에 따라 숭국사(崇國寺)의 옛터에 융복사를 재건하였다. 융복사는 1744년에 티베트불교 사원으로 재건되어 옹화궁(雍和宮)의 하원이 되었다.

1797년 건청궁(乾淸宮) 교태전(交泰殿)에 화재가 나서 수리를 할 때 융복사 불전 재목을 사용하였다(『정조실록』 18년 2월 22일). 그리고 황제가 여러 황릉(皇陵)을 참배할 때 융복사에 들르기도 했다(『정조실록』 24년 4월 26일).

1901년 10월 22일에 융복사에 화재가 일어나 대웅보전(大雄寶殿), 위태전(韋駄殿), 종루(鐘樓) 등이 소실된 후 재건되지 못하여 퇴락하였고, 1976년에 일어난 당산대지진에 의하여 융복사의 남은 전각들 역시 파괴되어 전체적인 철거가 이루어졌다. 이때 융복사의 정전(正殿)이었던 만선정각전(萬善正覺殿)의 중앙 천정을 장식했던 화려한 조정(藻井)이 북경고대건축박물관의 태세전(太歲殿)에 옮겨 보존되었다. 융복사 자리에는 융복빌딩이 들어서 백화점으로 운영되다가 2012년에 철거하고 융복사가 중건되었다.

(2) 조선과의 인연

작자 미상의 연행록(燕行錄)인 『부연일기(赴燕日記)』의 「역람제처(歷覽諸處)」에서 융복사에 대해 소개하기를, 법당 사면을 계단으로 두르고 낭실(廊室)의 안팎에는 모두 가게를 열었는데 물건은 모두 자질구레한 잡물에 지나지 않았으며, 유희와 재주를 부리는 자들도 여기서 재주를 팔고 있었다고 하였다.

당시 융복사는 묘회(廟會)로 유명하였다. 묘회는 우리나라 5일장과 비슷한 것으로 매월 8·9·10일, 18·19·20일, 28·29·30일에 시장이 개설되었다. 조선 사신들은 융복사 묘회에 대해 기록을 남겼는데, 홍대용(洪大容)은 『담헌서(湛軒書)』에서, 열흘마다 8·9·10일 사흘 동안을 그 안에서 장을 서게 하니, 온 성안의 장사꾼과 상품들이 모여들게 된다고 하였다. 또 박지원(朴趾源)은 『열하일기(熱河日記)』에서, 의주 상인과 함께 융복사엘 갔으나 절 안이 너무나 붐비는 바람에 금방 서로 잃어버려서 혼자 구경을 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1803년 중국으로 사행을 다녀온 어느 사신이 쓴 『계산기정(薊山紀程)』에서 소개하기를, 사찰 가운데에 전각이 첩첩이 있고 불상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으며, 전후좌우에는 물건을 종류별로 구분해서 각각 벌여 놓았는데, 서책(書冊)은 동쪽에, 주옥(珠玉)은 서쪽에 벌여 놓았다고 하였다.

참고문헌

  • 『담헌서(湛軒書)』
  • 『열하일기(熱河日記)』
  • 『계산기정(薊山紀程)』
  • 王玉甫, 『隆福春秋』, 北京: 中國社會出版社, 1995.
  • 百化文; 張智 主編, 『中國佛寺誌叢刊』, 揚州: 江蘇廣陵古籍刻印社, 1996.
  • 中國佛敎寺廟誌數位典藏, http://buddhistinformatics.ddbc.edu.tw/fosi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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