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씨폐사(尹氏廢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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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성종이 계비 윤씨를 폐비하고 사약을 내려 죽게 한 사건.

개설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는 1473년(성종 4)에 숙의로 입궁하여 공혜왕후가 죽은 지 3년 만인 1476년(성종 7) 8월에 왕비 책례를 받았다. 그러나 투기죄로 인해 3년 만에 폐비되고 죽음을 당하였다.

역사적 배경

폐비 윤씨는 성종에게 죄를 얻었다. 『성종실록』에는 폐비 윤씨의 죄가 매우 자세히 열거되어 있다. 즉 음조(陰助)의 공은 없고 투기하는 마음만 가진 일, 몰래 독약인 비상(砒礵)을 품고서 궁인을 해치고자 한 일, 무자(無子)하게 하는 일이나 반신불수가 되게 하려는 일, 사람을 해하는 방법을 작은 책에 써서 상자 속에 감추어 두었다가 발각된 일, 엄소용·정소용이 서로 통하여 윤씨를 해치려고 모의한 내용의 언문(諺文)을 거짓으로 만들어서 권씨의 집에 던져 넣은 일, 왕을 바라볼 때 낯빛을 온화하게 하지 않고, 상참(常參)으로 조회를 받는 날에는 성종이 조회를 받고 안으로 돌아온 뒤에나 잠자리에서 일어난 일 등등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윤씨는 폐위되었다.

발단

윤씨의 투기로 불화를 견디다 못한 성종은 그녀를 내쫓았다. 당시 대신들과 대부분의 신료들은 원자(元子)를 낳은 왕비를 내쫓으면 큰 후환이 된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였다. 그러나 성종은 1477년(성종 8) 3월에 정승을 지낸 자와 의정부, 육조 판서, 대사헌, 대사간 등등 주요 대신들을 빈청에 모이라고 명하고, 대왕대비의 한글 의지(懿旨)를 선포하였다. 그 내용은 중궁의 잘못된 행실, 후궁에 대한 투기, 저주하는 방법을 적은 방양서(方禳書)와 비상의 은닉 등으로 국모로서의 체모를 잃었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중신과 대신들의 의견을 묻기 위해 모이게 하였으며 성종은 폐비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성종실록』 8년 3월 29일].

경과

많은 신하의 반대가 있었지만 성종은 1479년(성종 10) 6월에 윤씨를 폐비시켜 사가로 내쫓았다[『성종실록』 10년 6월 2일]. 성종은 그 후 바로 폐비 윤씨 처우 문제를 둘러싼 저항에 부딪쳤다. 대간들은 윤씨의 집이 가난하고 허술하며, 또 원자의 어머니라는 이유를 들어 사가에 그대로 두면 안 되며 그를 특별한 처소에 머물게 하는 것이 도리라고 주장하였다. 1482년(성종 13) 8월에 기근이 들어 물가가 오르자 윤씨가 굶어 죽을 것을 우려하는 많은 신하가 윤씨를 별궁에 안치하여 굶어 죽는 일은 없게 해야 한다고 했다(『성종실록』 13년 8월 11일). 그러나 성종은 이에 대해 강경하게 반대하며 윤씨와 같은 시기에 후궁으로 들어왔던 윤호(尹壕)의 딸을 계비로 책봉하였다. 그리고 폐비와 새 왕비 책봉 사실을 명나라에 알리고 허락을 받았다.

폐비 윤씨의 처우를 달리해야 한다는 언관들의 주장은 계속되었다. 성종은 결코 자신의 처사에 대해 후퇴하려 하지 않았고 자신에게 강요하는 대간(臺諫)들을 처벌하였다. 또한 훗날 있을지도 모를 화(禍), 즉 폐비 사건에 연루된 자들의 보복을 미리 대비한다는 명분에서 1482년 8월 16일에 윤씨에게 사약을 내렸다[『성종실록』 13년 8월 16일]. 폐비 거처와 처우 문제를 둘러싼 성종과 언관과의 극한 대립은 사가에 머물며 근신하고 있는 윤씨를 죽음으로 몰고 가면서 막을 내리게 되었다.

참고문헌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이성무, 『조선왕조사』, 수막새, 2011.
  • 최승희, 『조선 초기 정치사 연구』, 지식산업사, 2002.
  • 한희숙, 「조선 초기 성종비 윤씨 폐비·폐출 논의 과정」, 『한국인물사연구』4, 2005.
  • 한희숙, 「조선 성종대 폐비 윤씨 사사 사건」, 『한국인물사연구』6,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