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흥치(劉興治)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명의 모문룡 사후 가도를 관장한 명 장수 가운데 하나로, 후금과 명 사이에서 소속을 바꾸어 가며 활동한 인물.

개설

유흥치는 요동 출신 한인으로 후금에 귀부하여 활동하다가 가도(椵島)의 명군에 투항하였다. 가도에서의 반란 이후 일련의 사건으로 인하여 조선과도 관계가 깊었다.

가계

유흥패(劉興沛)·유흥조(劉興祚)·유흥기(劉興基)·유흥량(劉興梁)·유흥치·유흥현(劉興賢)·유흥방(劉興邦)으로 구성된 7형제의 일원으로, 형제 중 다섯째여서 유오(劉五)라고도 불리었다. 7형제 중 유흥패·유흥방은 친형제가 아니고 사촌간이다. 『만문노당』에서는 우거([五哥], uge)라고 불렀다.

활동 사항

유흥치는 누르하치([奴兒哈赤], nurhaci) 휘하에서 중용된 형 유흥조를 따라 1627년 이전에 후금에 귀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흥조가 가도의 모문룡군에게 투항하면서 유흥치도 1629년 가도로 귀부하였다. 1630년 유흥조가 전사한 후 그를 대신하였는데, 당시 가도를 관장하던 부총병(副總兵)진계성(陳繼盛)이 유흥조의 죽음을 후금으로 재차 투항하려는 위장으로 의심하자 불만을 품었다.

결국 그는 진계성 등 100여 명을 죽이며 반란을 일으켰지만, 이를 진압하러 온 명군에게 명을 배반한 것이 아님을 피력하여 가도의 관할권을 인정받았다. 당시 조선은 유흥치의 반란 소식을 접하고 이를 토벌하려고 하였으나, 명에서 그를 승인하자 취소하였다(『인조실록』 8년 4월 25일)(『인조실록』 8년 7월 23일).

이후 유흥치는 별도로 후금과의 관계를 유지하던 중, 명의 추가 지원에 힘입어 이를 단절하려다가 1631년 여진인들에게 피살되었다. 이 여진인들은 장도(張燾)·심세괴(沈世魁)에 의하여 진압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도리어 유흥치가 후금에 투항하려다 발각되어 진압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조선 측이 전달받은 내용에서도 확인된다(『인조실록』 9년 3월 21일).

참고문헌

  • 『만문노당(滿文老檔)』
  • 스즈키 카이[鈴木開], 「유흥치와 조선과의 관계에 대하여」, 『만주연구』 19,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