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劉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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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금과 명 사이에서 소속을 바꾸어 가며 활동한 요동 출신의 한인으로, 유흥조(劉興祚) 혹은 아이타[aita, 愛塔]로 불린 인물.

개설

유해는 요동 출신 한인으로 후금에 귀부하여 활동하다가, 이후 가도(椵島)의 명군에 투항하여 후금과 대적하였다. 조선과도 정묘호란 전후의 교섭이나 가도 관할 등을 통하여 관계가 깊은 인물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유흥조를 가리키는 명칭이었다.

가계

유흥패(劉興沛)·유흥조·유흥기(劉興基)·유흥량(劉興梁)·유흥치(劉興治)·유흥현(劉興賢)·유흥방(劉興邦)으로 구성된 7형제의 일원으로, 이 중 유흥패·유흥방은 친형제가 아니고 사촌간이다.

활동 사항

요동 개원(開原) 출신인 유해는 1605년 무렵 누르하치에게 귀부하여 신임을 받아 부장(副將)까지 승진하였다. 그러나 1623년 무렵부터 명으로 도주할 것이라는 의혹을 받았고, 당시 교분이 두터웠던 쿠르찬([庫爾纏], kūrcan)의 보증에 힘입어 이를 무마할 수 있었다. 실제로 정묘호란 전후 조선과의 교섭에 참여하였던 유해는 조선에 보낸 서찰에서 한인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등(『인조실록』 5년 2월 11일)(『인조실록』 5년 8월 13일), 명으로 귀순하려는 조짐을 보였다.

그는 1628년 가도의 모문룡(毛文龍)에게 의탁하였고, 1629년 영원순무(寧遠巡撫)원숭환(袁崇煥)에게 모문룡이 처형당한 후에는 부총병(副總兵)모승록(毛承綠), 중군(中軍)서부주(徐敷奏), 부총병진계성(陳繼盛)과 함께 가도를 관장하는 4협(協)의 일원이 되었다. 4협이 얼마 지나지 않아 동서(東西) 2협으로 재편되면서 유해는 부총병진계성과 함께 가도를 총괄하게 되었지만, 1630년 태평채(太平寨)에서 후금군과 전투 중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 『만문노당(滿文老檔)』
  • 스즈키 카이[鈴木開], 「유흥치와 조선과의 관계에 대하여」, 『만주연구』 19,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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