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원진(柔遠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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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함경도 온성군에 설치하여 첨사가 관할하던 군사시설 진보.

개설

함경도는 조선초기부터 진보를 설치하여 이민족의 침입에 대비하고 지역사회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유원진이 소속돼 있던 온성군은 조선초기 야인들이 들어와 살면서 다온평(多溫平)이라 불리던 곳이다. 1440년(세종 22) 온성군을 설치하여 경원군(慶源郡)·길주군(吉州郡) 이남과 안변군(安邊郡) 이북의 백성들을 옮겨와 거주하게 하였다. 이듬해 온성도호부로 승격하여 판관을 두고 토관을 설치하였다. 1442년(세종 24)에는 진을 설치하고 절제사를 겸하게 하였다[『세종실록』 지리지 함길도 온성 도호부]. 유원진은 온성군에서도 최북단에 두만강 변에 위치하여 적군을 감시하고 방어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위치 및 용도

온성군 중심에서 북쪽 방향으로 두만강 변에 설치되었다. 유원진의 위치는 압록강과 두만강이 만나는 곳으로 군사적 요충지였다. 유원진과 같은 진보는 기본적으로 함경도 최전방과 내지의 요충지에서 실질적인 방어를 담당하는 군사시설이었다. 특히 유원진은 좁은 두만강 폭으로 인해 적과의 거리가 가까웠기 때문에 긴장감이 높은 지역이었다. 유원진은 적 침입 시 일차적인 방어처이면서 각지에 있는 봉수와 파수를 관리하였다. 유원진 인근에는 평봉(平峰)·압강(壓江)·고성(古城)·시건(時建)·견탄(犬灘)·중봉(中峯)·소동건(小童巾) 등의 봉수가 운영되었다. 한편, 유원진은 전라남도 해남군 땅끝과 한반도에서 가장 긴 사선을 이루는 곳이기도 하다.

변천 및 현황

지리적 중요성으로 인해 조선초기부터 군사적으로 주목받았다. 성종대에 이미 유원보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회령군(會寧郡)에서 유원보에 이르기까지 장성(長城)이 설치되어 있었다(『성종실록』 3년 6월 20일). 유원진의 장성은 1478년(성종 9) 다시 증축되어 소요항(所要項)에서 즙포(汁浦)까지 길이 8,522척(약 2,582m), 높이 6척(약 1.8m)으로 정비되었다(『성종실록』 9년 2월 29일). 1486년(성종 17)에는 기존에 토성으로 지어진 성곽이 흙비[霾雨]가 내릴 때마다 붕괴되어서 수축하는 폐단이 많아짐에 따라 석성으로 변경되었다(『성종실록』 17년 2월 22일). 이렇게 변경된 유원진성은 둘레가 5,609척(약 1,700m), 높이가 17척(약 5m)에 달하였다(『성종실록』 18년 2월 29일). 조선후기 첨사진(僉事鎭)으로 승격되었다.

형태

유원진성은 둘레가 5,609척, 높이가 17척이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조선전기까지만 해도 유원진에는 야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에 병마절도사가 성 아래 사는 야인들에게 ‘너희들이 만약 건너편 적로동구(賊路洞口)로 옮겨가 살면 특별히 서울로 보내주겠다’고 하였다. 이 말을 믿고 야인들이 전택을 버리고 강 건너로 이주하였으나 서울에 보내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올적합(兀狄哈)에게 죽거나 노략질을 당하면서 원한을 품게 되었다. 이에 야인들이 유원진에 복수할 것을 우려하여 그들을 서울로 올려 보내기도 하였다(『중종실록』 12년 6월 8일).

참고문헌

  • 『대전회통(大典會通)』
  • 『만기요람(萬機要覽)』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강석화, 「조선후기 함경도 육진지역의 방어체제」, 『한국문화』36,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5.
  • 고승희, 「함경도 내지 진보의 변화」, 『한국문화』36,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5.
  • 노영구, 「조선후기 함경남도 간선 방어체계」, 『한국문화』36,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5.
  • 오종록, 「조선초기 양계의 군사제도와 국방체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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