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오을미(劉吾乙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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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대 경흥 일대에 거주한 골간올적합 추장.

개설

중종대 두만강 유역의 여진인 속고내(速古乃)가 자주 조선을 침입하였다. 조선은 논의 끝에 속고내를 정벌하기로 결정하고, 두만강 유역의 여진인에게 참전을 명령하였다. 유오을미(劉吾乙未)는 여기에 참전하여 임호징(林好澄) 등을 잡아오는 공을 세웠다. 이후 유오을미는 큰 상을 바라고 조선에 내조하였다. 하지만 조선에서 다른 여진인과의 형평성을 고려하여 그에게 당하관에 제수하자 행패를 부렸다.

활동 사항

유오을미는 경흥에 거주하는 골간올적합(骨幹兀狄哈)의 추장이었다(『중종실록』 8년 2월 13일)(『중종실록』 32년 12월 19일). 실제로 골간올적합은 대부분 경흥과 그 맞은편 일대에 거주하였고, 골간올적합 유력 추장의 성이 김·유·이씨였기 때문에 이러한 내용은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1512년경(중종 7)에 회령 일대의 성저야인(城底野人)인 속고내가 조선의 변경을 공격하였다. 조선 조정은 속고내를 정벌하기로 결정하고, 두만강 유역의 여진인에게 참전을 명하였다. 이 명령을 받은 함경북도절도사(咸鏡北道節度使)유미는 같은 해 4월 19일에 성저야인을 보내 속고내를 공격하게 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5월 5일에 여기에 참전하였던 유오을미가 임호징을 잡아 오는 공을 세웠다(『중종실록』 7년 5월 17일).

조선은 이 공로를 인정하여 유오을미의 내조를 허가하였다. 그가 내조한 것은 1513년 1월로 보인다. 왜냐하면 1513년 1월에 조선은 유오을미에게 관직과 물품을 하사하기 위하여 논의하였기 때문이다. 이때 조선은 그의 공은 충분히 당상관을 줄 만하지만 다른 여진인과의 형평성을 고려하여 이번에는 줄 수 없다고 하였다(『중종실록』 8년 1월 14일).

내심 높은 관직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하였던 유오을미는 여기에 실망하였다. 그는 예조(禮曹)에서 배사(拜辭)할 때, 화를 내며 관교(官敎)와 삽대(鈒帶) 및 하사한 물건을 던지는 등 행패를 부렸다. 결국, 이 사건은 예조에서 내년 가을에 조공하면, 당상을 제수하겠다고 타이른 끝에 일단락되었다(『중종실록』 8년 2월 13일). 그가 이후에 다시 조선에 왔는지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1537년에 조선 조정은 유오을미를 함경도에서 손꼽히는 추장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조선에 꾸준히 내조하여 높은 대우를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중종실록』 32년 12월 19일).

참고문헌

  • 김구진, 「骨看 兀狄哈 硏究」, 『사총』 20, 1976.
  • 박정민, 「연산군~명종대 여진인 來朝의 재검토」, 『역사학보』 222, 2014.
  • 박정민, 「조선과 제종올적합의 관계 검토」, 『군사연구』 139, 2015.
  • 한성주, 「조선전기 女眞 僞使의 발생과 處理 問題에 대한 고찰」, 『사학연구』 100, 2010.
  • 河內良弘, 「中宗·明宗時代の朝鮮と女眞」, 『朝鮮學報』 82,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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