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방원(流芳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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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시대 대마번 종가의 중신인 유천조신의 시호이자 원당의 명칭.

개설

강호시대(江戶時代) 전기 대마번(對馬藩) 종가의 중신으로, 임진왜란 이후 대마도주 종의지(宗義智)를 도와 조일 간의 국교회복 교섭 과정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유천조신(柳川調信)의 시호[法名]이자 원당(願堂)을 말한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605년 유천조신이 사망하자 조선에서는 조일 관계 개선에 노력한 공로를 인정하여 역관을 파견하고 특별히 물품을 보내 부의하였다. 1611년경(광해군 3)에 아들인 유천경직(柳川景直, 유천지영(柳川智永)이라고도 함)은 조선의 부의에 사례하면서 편액을 써 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이에 예조에서는 ‘유방원(流芳院)’이라는 세 글자를 써 주었다. 1622년(광해군 14)에 손자인 유천조흥(柳川調興)이 유방원의 제사 경비 마련을 위하여 사송선(使送船) 1척씩을 파견할 수 있도록 도서(圖書)를 만들어 줄 것을 조선 측에 청원하였다. 도서는 조선 정부에서 대마도주나 호족에게 합법적으로 통교할 수 있도록 증명해 주는 인장이었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1622년에 이르러 만송원송사(萬松院送使)의 예에 따라서 도서를 지급하였다(『인조실록』 23년 6월 16일)(『인조실록』 24년 9월 21일). 이로써 매년 한 차례씩 수도서선(受圖書船)인 유방원송사(流芳院送使)가 파견되었다.

변천

대마도주가 중앙에서 조선으로 보내는 국서 위조가 폭로된 국서개작폭로사건인 유천일건(柳川一件)으로 손자인 유천조흥이 1635년(인조 13)막부의 처벌을 받게 되면서 유방원송사의 도서는 1635년 3월에 조선에 파견된 사자(당방좌와위문(塘坊佐左衛門))를 통하여 조선에 반환되었다. 그러나 1638년 이정암송사(以酊庵送使)와 마찬가지로 유방원송사의 도서는 다시 종씨(宗氏)에게 지급되었으나 얼마 후 중지되었다.

참고문헌

  • 『통문관지(通文館志)』
  • 田代和生, 『日朝通交貿易史の硏究』, 創文社, 1981.
  • 田代和生, 『書き替えられた國書』, 中公新書, 1983.
  • 荒野泰典, 「大君外交體制の確立」, 『近世日本と東アジア』, 東京大學出版會,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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