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충현(魏忠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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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말기 환관·정치가.

개설

위충현은 천계제(天啓帝)의 신임을 얻어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비밀경찰이라고 할 수 있는 동창(東廠)의 수장(首長)이 되어 동림파(東林派) 관료들을 탄압하고 전횡을 일삼았다. 천계제 사망 후 숭정제가 황위에 오르면서 권력을 상실하고 유배지로 가던 중 자살하였다. 명의 멸망을 촉진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활동 사항

위충현은 빈한한 집안에서 출생하여 소년 시절에는 시정에서 떠돌며 도박을 일삼았다.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한 후 스스로 환관(宦官)이 되었다. 입궁 후에 이진충(李進忠)에서 위충현(魏忠賢)으로 개명하였다.

위충현은 황장손(皇長孫)이었던 희종(熹宗)의 유모인 객씨(客氏)와 결탁하여 권력을 얻기 시작하였다. 희종이 명의 제15대 황제인 천계제로 황위에 오르자 그의 신임을 얻어 환관의 수장인 사례감(司禮監) 병필태감(秉筆太監)에 임명되었고, 1623년부터는 관민의 동정(動靜)을 몰래 살피기 위하여 황제 직속의 비밀경찰 격으로 설치한 동창(東廠)의 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목공에 빠져 국정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던 천계제를 대신하여 정사를 처리하면서 황제로부터 신임을 얻었다.

위충현은 1624년 동림당인 좌부도어사(左副都御史)양련(楊漣)의 탄핵을 받아 동창 수장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다시 황제의 신임을 회복한 후 동림당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1625년 동림당의 양련(楊漣)·좌광두(左光斗)·주기원(周起元) 등 핵심 인사들을, 1626년에는 고반룡(高攀龍)·주종건(周宗建)·황존소(黃尊素) 등을 죽였다. 또 동림서원을 폐쇄하고 강학(講學)도 금지시켰다. 동림당 탄압 이후 위충현의 전횡은 더욱 심해졌다. 그는 자신을 요(堯)·순(舜)에 비견할 만한 성인(聖人)으로 자처하며 ‘요천순덕지성지신(尭天舜徳至聖至神)’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또 자신의 생사당(生祠堂)을 전국 곳곳에 세웠다.

그러나 1627년 천계제가 세상을 뜨고 그의 동생 숭정제가 황위에 오르면서 위충현은 탄핵을 당하여 봉양(鳳陽)으로 유배되었고, 유배지로 가던 중 자살하였다(『인조실록』 5년 11월 7일). 또한 그의 아들 위양경(魏良卿)도 참형을 당하고 가산을 적몰당하였다(『인조실록』 6년 2월 11일)[ 『인조실록』 6년 11월 13일 1번째기사].

묘소

북경(北京) 향산(香山) 벽운사(碧雲寺).

참고문헌

  • 강용규, 『인물로 보는 중국사』, 학민사, 2000.
  • 데라다 다카노부 지음, 서인범·송정수 옮김,『(중국의 역사) 대명제국』, 혜안,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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