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윤선(魏綸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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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임오군란 직후 조선에 파견되었던 청나라의 한인(漢人) 관료.

개설

위윤선은 1876년 상해기기직포국(上海機器織布局)을 만들려는 이홍장에 의하여 조선에 파견되었으나, 설립에 실패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 직후 부흠차(副欽差) 자격으로 조선에 파견되어 활동하였다.

활동 사항

위윤선의 아버지는 위승월(魏承樾)이고, 누나인 위씨(魏氏)는 증기량(曾紀梁)의 부인이었다. 증기량은 당대 최고의 한인 관료였던 증국번(曾國藩)의 조카이며, 증기택(曾紀澤)의 사촌이었다. 위윤선은 증국번 가문과 사돈 관계였다. 이러한 집안 환경은 증국번의 막우(幕友)였던 이홍장이 위윤선에게 양무운동(洋務運動) 당시 주요 역할을 맡기는 배경이 되었다.

아편전쟁 이후 외국산 면포가 중국 내 시장을 광범위하게 장악함에 따라, 이홍장은 상인 자본을 모아 상해(上海)에 방직공장을 건설하는 사업의 타당성을 주장하고 반관반민(半官半民)의 관독상판(官督商辦) 기업 설립을 추진하였다. 이에 1876년 상해기기직포국 설립을 시도하였다. 이홍장은 위윤선이 집안 대대로 광산업(鑛山業)에 종사하였음을 강조하며 그의 능력을 높게 평가하고 상해기기직포국 추진의 업무를 맡겼다. 하지만 자금 모집 등에 문제가 생겨 당시 설립은 실패하고, 이후 1880년에야 설립할 수 있었다.

조선 관료 김윤식(金允植)이 1882년 천진에서 조선과 청 사이의 통상 관련 논의를 할 당시, 위윤선과 논의한 일도 있었다. 1882년 음력 6월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청은 난의 진압을 명분으로 군대를 파견하였다. 1차로 마건충(馬建忠)·오장경(吳長慶), 2차로 정여창(丁汝昌)·위윤선이 통솔한 군대가 조선에 진입하였다. 입국 직후 위윤선 등은 대원군을 청국으로 압송하는 역할을 수행하였고(『고종실록』 19년 7월 12일)(『고종실록』 19년 7월 13일), 이러한 청국의 개입은 이후 조선에 대한 청의 정책이 바뀌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저술 및 작품

『잠상직무기요(蠶桑織務紀要)』

참고문헌

  • 『음청사(陰晴史)』
  • 中國史學會 主編, 『洋務運動』 7, 上海書店出版社, 2000.
  • 『上海機器織佈局: 盛宣懷檔案資料選輯之六』, 上海人民出版社,2002.
  • Folsom Kenneth E., Friends, Guests, and Colleagues: the Mu-fu System in the Late Ch’ing Period,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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