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승(院主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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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공공 숙박 시설로 활용되던 원을 맡아 관리하던 승려.

개설

원(院)은 담장이 있는 궁실(宮室), 불사(佛寺), 도관(道觀) 등을 가리키는 말로, 불교에서는 큰 절의 한 구역 또는 소규모의 절을 의미한다. 고려시대부터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원은 지방에 파견되는 관원이나 상인 등에게 숙식 등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요로(要路)에 설치한 공공 여관으로 활용되었다. 신라시대의 문헌에도 등장하지만, 교통로에 위치하면서 여행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는 기록은 고려시대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원은 고려시대 이래로 불교계와 깊이 연결되어 운영된 까닭에 승려가 원주(院主)를 맡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들어와서는 원주가 점차 속인(俗人)으로 바뀌었다.

내용 및 변천

고려시대의 원은 역(驛)을 이용할 수 없는 일반 여행객이나 공물(貢物) 등을 운반하는 관인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기 위해 교통로에 설립한 교통 시설이자 숙박 시설이었다. 또한 번잡한 교통의 요지나 지세가 험한 곳에 위치하여 역의 기능을 보조하는 역할을 하였다. 원은 왕과 왕실의 지원 또는 개인의 노력으로 설립되기도 하였으며, 불교계와 관료, 불교계와 향리의 협력을 통해 건립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개는 불교계에서 노동력과 물자를 공급하는 형식으로 설립되어 운영되었다. 그런 까닭에 고려시대의 원은 한편으로는 불교 사찰이면서 동시에 숙식 시설의 역할을 하였으며, 국가의 행정 체계를 보조하는 기능도 하였다. 원에는 숙식을 준비하거나 우마에게 먹일 꼴을 마련하는 등의 잡일을 하는 노비가 있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사령(使令)이 있는 곳도 있었다. 원에 상주하며 관리 및 운영을 담당하는 사람을 원주(院主)라 하였는데, 대부분 승려가 맡았다. 승려가 원주인 경우에는 주지(住持)라 부르기도 하였다.

고려시대 후기에는 원의 수가 늘어나는 가운데 원이 퇴락하는 사례도 빈번하였다. 재정상의 어려움으로 문을 닫기도 하였고, 전쟁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그에 따라 파괴된 원을 중창 또는 중수하거나 새로 짓는 일이 잦았는데, 여기에 속인이 참여하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속인이 원주가 되어 원을 관장하는 사례가 증가하였다. 한편 조정에서는 원에 새로운 인호(人戶)를 배정하고 토지를 지급하는 등 운영을 체계화하려 하였다.

조선 왕조는 건국 초기부터 원에 관심을 가졌는데, 사찰보다는 숙박 시설로서의 원을 우선적으로 정비하였다(『태조실록』 1년 9월 24일). 또 지방관에게 필요한 곳에 새로 원을 짓도록 하였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원의 운영과 관리를 국가적인 차원에서 중시하였는데, 이때도 원은 주로 불교계에서 관리하였다. 원주승의 잡역(雜役)을 면제해 줄 뿐 아니라, 원의 수리 및 관리를 잘하는 승려에게는 승직(僧職)을 제수하되 승직이 있으면 직을 더 높여 주자는 논의가 있었던 점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세종실록』 10년 윤4월 17일). 세조대에는 평안도의 원은 관찰사가 각 군현의 승려 중 지원자를 선발해 조성하고, 그 대가로 승직과 복호(復戶) 가운데 원하는 것으로 포상하도록 하였다(『세조실록』 4년 윤2월 15일). 성종 연간인 1472년(성종 3)에는 승려들로 하여금 심하게 훼손된 원을 수리하게 하였다(『성종실록』 3년 2월 28일). 이처럼 15세기까지는 원의 운영에 승려를 적극적으로 동원하였다. 그러나 『경국대전(經國大典)』의 규정대로 점차 속인을 원주로 임명하고 국가가 원의 운영에 직접 개입하면서, 원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것은 지방관의 주요 임무 중 하나가 되었다. 그에 따라 원의 운영과 관리는 점차 불교계와 멀어져 국가의 관할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원의 운영을 법제화하였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원호(院戶)에게는 잡역을 면제해 주고, 한성부 성 밑의 원은 5부(部)에서, 지방의 원은 수령이 거주민을 원주로 삼아 관리하도록 하였다. 또한 원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경비에 충당하도록 하기 위해 원주에게 원위전(院位田)을 지급하도록 하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이병희, 『고려시기 사원경제 연구』, 경인문화사, 2009.
  • 정요근, 「고려·조선초의 역로망과 역제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 한희숙, 「조선초기의 원주」, 『서암 조항래교수 화갑기념 한국사학논총』, 아세아문화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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