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점유생(圓點儒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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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 시간 이상 성균관에서 수학하고 원점을 얻어 관시 및 절일제 등에 응시할 자격을 얻은 유생.

개설

문과초시의 하나인 관시(館試)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원칙적으로 출석 점수인 원점(圓點) 300점을 얻어야 했다. 1742년(영조 18)에는 성균관 시험인 절일제(節日製)에도 원점 50점을 얻어야만 응시를 허용하는 제도를 도입하였다. 그러나 시기별로 요구한 원점은 변동이 있었다.

내용 및 변천

조선초기부터 성균관에서는 유생들의 기숙 생활을 장려하기 위하여 원점제도(圓點制度)를 시행하였다(『태종실록』 17년 윤5월 14일). 아침저녁 식사에 모두 참여하면 원점 1점, 아침저녁 중 한 번의 식사에만 참여하면 반점(半點)을 부여하였다. 문과초시의 하나인 관시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원점 300점을 얻어야 한다는 내용은 1411년(태종 11)부터 등장하며, 『경국대전』에도 이 규정이 수록되었다(『태종실록』 11년 6월 4일).

생원·진사에게 일괄적으로 원점을 적용하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생원·진사로 왕의 시중이나 궁궐 숙위 등을 담당하는 성중관(成衆官)이 되거나 지방의 훈도(訓導)로 나간 자, 지방에 거주하는 자들이 식년시 주기인 3년 내에 300일을 성균관에서 머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였다. 이 때문에 여러 가지 예외 조항들이 만들어져 세종대부터 부모가 연로한 경우는 부모의 봉양을 위하여, 지방의 교수나 훈도로 나간 경우는 상경이 어렵다는 이유로, 성중관은 근무 때문에 거재(居齋)가 어렵다는 이유로 원점의 적용 기준을 완화하였다. 중종대에는 최종적으로 문과 초시 중 관시는 300점, 한성시·향시는 150점을 기준으로 삼게 되었다(『선조실록』 28년 4월 25일). 별시(別試)의 경우 시험 때마다 기준이 달랐으나 원점을 적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성균관에서 공궤하는 유생의 숫자를 200명에서 75명으로 줄인데다가 별시·정시(庭試) 등 원점을 요구하지 않는 시험이 늘어나면서 성균관에 거처하며 원점을 얻으려는 유생이 줄어들었다. 그 결과 1662년(현종 3)부터는 응시자가 적다는 이유로 증광시 관시를 폐지하였다(『현종실록』 2년 8월 20일). 이후로 원점유생은 더욱 줄어들어 관시의 선발 인원에도 미치지 못하는 일이 종종 발생하였다. 그 결과 시험 때마다 원점의 적용 기준을 조정하였는데, 『속대전』에서는 원점 50점을 기준으로 삼았다.

영조는 유생들의 거재를 늘리기 위하여 1742년(영조 18) 공궤 인원을 100명으로 늘리는 한편 원점 50점을 얻은 유생만 성균관 절일제에 응시할 수 있도록 제도화하였다(『영조실록』 19년 1월 25일). 이 내용이 『속대전』에도 수록되었다. 이와 함께 절일제는 원점과(圓點科)로도 불리게 되었다. 이후 절일제의 원점 기준은 30점으로 하향 조정되었는데, 1777년(정조 1)에 반포한 「성균관 원점 절목」에서는 이를 정식으로 삼았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태학성전(太學成典)』
  • 『태학지(太學志)』
  • 박현순, 『조선후기의 과거』, 소명출판, 2014.
  • 차미희, 『조선시대 문과제도연구』, 국학자료원,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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