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유(苑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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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에서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고 동물을 기르며 꽃과 나무를 심던 동산.

개설

원(苑)은 나라 동산을 뜻하는 말로 원유(苑囿)는 새와 짐승을 놓아기르는 동산을 말한다. ‘원유(園囿)’와 혼용하여 쓰였으며 『조선왕조실록』에서 원유는 후원(後苑)이나 금원(禁苑)보다 더 넓고 포괄적인 의미로 쓰였다. 조선전기 성종대까지는 대부분 강무장(講武場)을 의미했고 강무하는 활동의 의미도 어느 정도 포함하고 있었다. 강무는 국왕이 장수와 군사, 백성을 데리고 사냥하던 행사였다. 강무를 통해 무예 연습과 군사훈련의 효과를 얻었고, 종묘와 대전에 올릴 음식을 마련하였다. 세종은 나라가 태평하면 군대가 이완된다고 하여 일 년에 두 번, 봄과 가을에 강무를 시행하였다. 세조는 “원유는 국왕이 놀고 즐기는 곳이 아니며 제사에 이바지하고 강무일을 할 뿐”이라고 했다(『세조실록』3년 10월 17일).

강무장은 일정한 장소가 없었으나 세종 때에는 철원, 평강, 이천으로 정했다. 강무장으로 정해진 곳에는 금령(禁令)을 내려 백성들이 나무와 풀을 베지 못하고, 짐승을 잡지 못하도록 했다. 때문에 ‘원유’라는 단어에는 ‘일반인에게 사냥과 나무 채취를 금한 나라의 땅’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었다. 강무장에서 사렵(私獵)한 죄는 율문에 조항이 없어서 ‘금원(禁苑)에 허가 없이 들어온 자에 대한 죄’를 적용하려는 사례가 있었는데, 세종은 ‘이른바 금원이라는 것은 상림원(上林園) 같은 것을 가리키는 말이므로 여기에 적용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했다. 그러나 결국 같은 죄를 물어 벌하는 것으로 판정하였다『세종실록』13년 1월 4일 1번째기사]. 즉, 원유의 범위에 드는 강무장은 금원과 엄연히 달랐으나 나라에서 출입을 금하는 점에서는 같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정약용(丁若鏞)의 『경세유표(經世遺表)』에는, “예부터 원유가 반드시 대내(大內)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국가에는 오직 내원(內苑)뿐이었다. 근교(近郊)에 시초장(柴草場)이 매우 많으니, 그 중에 땅이 기름진 곳을 택해서 진기한 과목과 기이한 나무를 많이 심고, 낭관(郞官)을 파견해서 감수(監守)하도록 함이 또한 마땅하다.”고 했는데 이를 통해 원유는 나라에서 관리·감독하여 과실과 나무를 공급하는 곳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종 이후 원유는 공간적인 범위가 축소되고 한정되기 시작하여 강무보다는 꽃을 기르고 짐승을 놓아 완상하고 즐기는 장소로 변화했고, 강무는 국왕이 군대를 사열하는 열무(閱武)로 바뀌어갔다.

원유와 비슷한 단어로 후원(後苑)이나 금원(禁苑)이 있다. 후원, 금원은 원유에 비하여 공간적으로 훨씬 축소되어 『조선왕조실록』에서 용례를 살피면 궁궐 궁장 내의 범위로 한정되고 장소적인 의미를 강하게 가진다. 후원과 금원은 조선초기부터 후기까지 쓰였는데 후원이 더욱 일반적이었고 ‘후원(後苑)’과 ‘후원(後園)’이 혼용되었다. 후원(後苑)이라는 명칭이 일반화된 이유는 조선시대 궁궐의 입지 조건과 관련 있다. 조선시대의 궁궐은 전면이 넓게 트이고 뒤로 갈수록 지형이 높아지며, 앞쪽에는 통치를 위한 외전, 그 뒤에는 왕실의 생활을 위한 내전이 배치되었다. 꽃과 나무, 새와 짐승을 놓아기르는 곳은 뒤쪽의 내전에 배치되었으므로 후원이 일반화되었다.

조선시대의 용례를 살펴보면, 궁원(宮苑)·상원(上苑)(『태조실록』 7년 4월 21일), 위치에 따라 내원(內苑)·북원(北苑)·서원(西苑)·상림원(上林園), 일반인의 출입 제한에 따른 금원(禁苑), 관리 기관의 명칭에 따른 비원(秘苑)이 있다. 1904년(광무 8) 후원의 관리 기관으로 비원(秘院)을 두었는데 이 비원이 관장하는 곳이라는 뜻으로 ‘비원(秘苑)’이라는 명칭이 생기기도 하였다(『고종실록』 40년 12월 30일). 궁원은 궁궐의 동산이라는 의미로 내원이나 후원, 금원 등을 포괄한다.

내용 및 특징

궁궐 안에 조성된 원유, 궁원은 단순히 기화요초(琪花瑤草)와 누정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왕에게 휴식 공간으로만 사용된 것이 아니었다. 원유에는 나라를 바로 다스리기 위한 여러 가지 시설들이 채워졌고, 여기에 아름다움과 휴식 기능을 더한 것이었다.

우선, 후원 앞쪽에는 논을 만들어 왕이 농작물의 작황을 살필 수 있게 하였다. 논 주변은 습지이므로 주변에 연꽃을 심은 연못과 정자가 같이 지어졌다. 조선전기 경복궁의 취로정(翠露亭) 일대, 창덕궁의 ‘답십야미’, 고종대의 ‘팔도배미’가 여기에 해당한다. 왕이 농사를 살피는 곳이 필요했다면, 왕비에게는 친잠을 할 수 있는 곳이 필요했다. 성종대에 친잠에 대하여 상고하여 제도를 마련했는데, 친잠을 하는 곳은 건물을 따로 짓지 않고 악전(幄殿), 즉 천막을 치도록 하고 후원에 친잠단 터를 정하게 했다(『성종실록』 7년 9월 25일).

궁원에는 넓은 터를 마련하여 활쏘기나 말 타기 등을 시연할 수 있는 장소도 확보했다. 경복궁에서 조선전기에 충순당(忠順堂)을 중심으로 한 공간, 고종대의 경무대(景武臺), 창덕궁의 조선전기 서총대(瑞葱臺)와 조선후기의 춘당대(春塘臺)가 여기에 해당한다. 궁원의 앞쪽에는 이러한 시설들을 배치하고 그 뒤로 깊숙한 곳의 경치가 좋은 곳을 골라 작은 연못을 파고 정자를 지어 휴식의 공간으로 이용하였다.

조선시대의 궁궐은 전각들이 있는 앞부분과 궁원이 있는 뒷부분이 나뉘어 별도의 영역을 형성하는데, 이에 따라 후원이라는 일반명사는 원유의 한 양식이 되었다. 현재 경복궁과 창덕궁의 경우, ‘후원’을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정원(庭園)은 일본 메이지시대에 영어 ‘garden’의 번역어로 만든 것이다.

변천

조선전기 경복궁에서 후원은 아미산 북쪽에서 신무문(神武門)까지였고 후원 남쪽에는 담장이 있어서 대내(大內)와 궁장(宮墻)이 구분되었다. 세종대에는 대군들을 후원에 머물게 하였으며 왕들은 건강이 좋지 않으면 후원의 전각에 피어(避御)하기도 하였다. 신무문 안쪽의 후원이 적극 개발되고 사용된 것은 세조대부터였다.

조선후기의 경복궁은 고종대에 중건하여 아미산 북쪽에도 내전의 전각을 지었고 신무문 안쪽에는 향원정(香遠亭)과 녹산이 있었다. 여기에 더하여 신무문 북쪽으로 그 영역을 확장하여 팔도배미와 경무대를 조성하고 그 안쪽에는 오운각(五雲閣) 등의 휴식 공간을 만들었다. 경복궁의 후원은 일제 강점기에 총독부의 관사로 사용되다가 해방 후에는 대통령 관저인 청와대가 들어섰다.

창덕궁은 태종대에 창건되었으며 처음에는 현재 전각이 있는 범위에 불과했으나 세조대에 후원의 동쪽 담을 넓혀 현재의 영역을 확보했다[『세조실록』 9년 2월 7일, 9일 2번째기사]. 연산군이 서총대를 만들었으며 인조대에 옥류천 일대를 조성하고 후원 곳곳에 정자를 세웠다. 정조대에 이르러 주합루와 부용정 일대가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창덕궁은 조선시대에 창경궁과 함께 동궐(東闕)이라고 불렸고 전각 영역도 명확히 분리되지 않은 채 시기에 따라 변화하였다. 따라서 창덕궁과 창경궁의 후원은 하나로 되어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분리하여 창덕궁은 순종의 거처로, 창경궁은 공원으로 조성하였다. 후원 또한 춘당대 일대에서 둘로 나누어 창덕궁과 창경궁에 따로 속하게 하였다. 창경궁은 창경원(昌慶苑)으로 바뀌면서 동물원과 식물원이 들어서서 지형이 변형되고, 전각이 철거되었다. 1986년에 창경궁으로 회복하여 복원하였으나, 후원은 현재 그대로 둘로 나뉘어 있다.

참고문헌

  • 『궁궐지(宮闕志)』
  • 문화재청, 『창덕궁·종묘 원유(苑囿)』, 문화재청, 2002.
  •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http://db.itk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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