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각사(북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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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북한산성 내에 건립한 10개의 승영사찰 중 하나.

개설

원각사(圓覺寺)는 1711년(숙종 37)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축성한 후 산성의 방어를 위해 성안에 건립한 승영사찰(僧營寺刹)이었다. 북한산성이 축성된 후 신초(信楚)가 74칸 규모의 절로 창건하였다. 당시 원각사는 절과 인접한 부왕동암문(扶旺洞暗門) 주변의 산성의 성곽을 방비하였다. 갑오개혁 때 승군제(僧軍制)의 폐지로 승영사찰은 존립의 근거를 잃게 되었는데, 원각사도 이 시기를 전후하여 폐사하였다.

내용 및 특징

북한산성은 승군이 주둔하며 산성의 방어를 효율적으로 담당했던 남한산성을 본 따서 1711년(숙종 37)에 계파성능(桂坡聖能)이 지휘·감독하여 수축하였다. 산성이 완공된 후 성능은 팔도도총섭의 직책을 맡아 30여 년간 머물면서 승군이 주둔할 승영사찰을 건립하고 이들을 지휘하였다. 당시 북한산성 내에는 기존에 있던 중흥사(重興寺) 외에 10개의 승영사찰이 건립되었고, 그 중 하나가 원각사였다.

원각사는 북한산성이 축성된 후 신초(信楚)가 74칸 규모의 절로 창건하였다. 원각사는 북한산의 증취봉(甑炊峰, 593m)과 나한봉(羅漢峰, 688m) 사이에 위치한 절로(『정조실록』 9년 6월 17일), 인근 동편에 위치한 부왕동암문(扶旺洞暗門) 일대를 방비한 사찰로 보고 있다. 부왕동암문은 청수동암문(靑水洞暗門: 현 가사당암문)과 가사당암문(袈裟堂暗門: 현 청수동암문) 사이에 위치하여 북한산성의 7개 암문 중 가장 큰 규모의 암문(9×8척)이었다. 북한산성 내에 건립된 승영사찰은 일반의 사찰과는 달리 산성의 성문(城門) 가까이에 위치에 있으면서 성곽의 방어가 주요 임무였음을 감안할 때, 당시 원각사는 인접해 있던 부왕동암문을 중심으로 하여 증취봉과 나한봉 사이의 성곽을 방비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원각사는 북한산성 내의 다른 사찰과 함께 8도도총섭(八道都摠攝)을 겸임한 승대장(僧大將)의 지휘 아래 전국의 사찰에서 소집된 의승군(義僧軍)이 중심이 되어 운영되었다. 함경도와 평안도를 제외한 전국 350여 명의 의승(義僧)이 의승입번제(義僧立番制)에 따라 매년 2개월씩 윤번(輪番)으로 사찰에 복무하였다. 전국의 사찰에 할당된 수의 승려가 교대로 산성을 방위하는 이 제도는 지방 사찰의 재정을 고갈시키는 등 많은 폐단을 가져와 1756년(영조 32)에 폐지되었다. 대신 의승방번제(義僧防番制)에 의해 10~22냥의 방번전(防番錢)을 납부하고, 대신 산성 사찰에서 복무하는 것이 면제되었다. 이후 산성의 방위는 연간 17냥을 지급받는 방번승(防番僧)이 전담하였다. 1785년(정조 9) 의승의 방번전이 절감되는 조치가 내려지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승군에 의한 사찰 운영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승군제가 폐지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변천

산성의 방어를 위해 승군이 주둔하였던 조선후기의 승영사찰은 19세기 말 갑오개혁(甲午改革) 때 승군의 해산과 함께 대부분 폐사되었는데, 원각사도 이 시기를 전후하여 폐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참고문헌

  • 『가람고(伽藍考)』
  • 『북한지(北漢誌)』
  • 김윤우, 『북한산의 역사지리(增補譯註 北漢誌)』, 범우사, 1996.
  • 대한불교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 편, 『한국호국불교의 재조명』1·2, 대한불교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 2012.
  • 이병두, 『북한산성과 팔도사찰』, 대한불교진흥원, 2010.
  • 조면구, 『북한산성』, 대원사, 1994.
  • 김상영, 「한국불교사에서 중흥사의 위상과 역할」, 『전법학연구』2, 불광연구원, 2012.
  • 윤기엽, 「북한산성의 승영사찰」, 『국학연구』25, 한국국학진흥원,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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