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서(韻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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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를 운을 기준으로 분류하여 나열한 발음 자전.

개설

운서(韻書)는 주로 반절(反切)과 36자모(字母)를 이용해, 서로 교환할 수 있는 운(韻)을 가진 한자들을 모아서 나열한 일종의 자전(字典)을 말한다. 한시(漢詩)를 지을 때 음률(音律)을 맞출 수 있도록 서로 압운(押韻)이 가능한 한자들을 모아서 엮은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중국에서 편찬된 것이 주종을 이루지만, 고려시대 중기 이후에는 우리나라에서도 한문, 한시 등의 학습을 위해 편찬하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에는 표준 발음을 확립하기 위해 운서를 간행하였으나, 이후에는 한시를 지을 때 음률을 맞출 수 있도록 서로 압운을 할 수 있는 한자들을 모아서 엮는 경우가 많았다. 중국에서는 한시를 창작할 때 운자를 맞추는 일을 매우 중시하였는데 지역 방언들 사이의 차이가 심해 운자를 제대로 맞추기가 어려웠다. 그에 따라 표준 발음을 확립하기 위해 운서를 간행하였다. 운서는 중국에서 편찬된 것이 주종을 이루지만, 고려시대 중기 이후에는 우리나라에서도 한문, 한시 등의 학습을 위해 많이 편찬하였다.

내용 및 특징

일반적으로 운서를 편찬할 때는 우선 모든 한자를 평성(平聲)·상성(上聲)·거성(去聲)·입성(入聲)사성(四聲)을 기준으로 분류한 다음, 성조가 같은 한자들을 다시 운(韻)을 기준으로 나눈다. 그리고 다시 성모(聲母)가 같은 한자들끼리 묶어서 배열한다. 즉 성조, 운, 성모의 기준을 차례로 적용하여, 최종적으로 세 가지 모두가 동일한 글자들끼리 묶어서 배열하는 것이다. 세 가지 기준 가운데 주로 운을 중심으로 분류한 까닭에 운서라고 부른다.

중국에서는 지역 간 의사소통이 어려울 정도로 방언들 사이의 차이가 심했다. 이러한 차이를 줄이기 위한 방안으로 표준 발음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그에 따라 일종의 통일된 발음 사전의 성격을 지닌 운서가 간행되기 시작하였다. 중국의 운서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수나라 때인 601년(수 문제 21)에 육법언(六法言) 등이 여러 운서들을 집대성하여 편찬한 『절운(切韻)』, 1008년(북송 진종 11)에 북송의 진팽년(陳彭年) 등이 편찬한 『광운(廣韻)』, 송나라의 정도(丁度)가 1037년(북송 인종 15)에 지은 『예부운략(禮部韻略)』, 송나라의 학자 황공소(黃公紹)가 편찬한 『고금운회(古今韻會)』, 명나라 때인 1375년(명 태조 홍무제 8)에 악소봉(樂韶鳳) 등이 펴낸 『홍무정운(洪武正韻)』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러한 중국의 운서들은 주로 반절법과 36자모를 이용하여 편찬되었는데, 발음 표기 수단으로서는 부족한 면이 있어서 한자음을 완벽히 재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한자의 원음과 실제로 쓰이는 우리식 한자음 사이의 큰 괴리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의 일환으로 운서를 편찬하였다. 우리나라의 운서는 크게 『고금운회거요(古今韻會擧要)』처럼 중국 운서를 다시 간행한 운서, 『홍무정운역훈(洪武正韻譯訓)』과 같이 중국의 운서에 한글로 발음을 표기한 한글 표음형 운서, 그리고 『동국정운(東國正韻)』처럼 우리나라의 한자음을 한글로 기록한 우리식 운서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다음 해인 1447년(세종 29)에 간행된 『동국정운』은 우리 한자음에 맞는 우리식 운서를 만들려는 목적에 따라 편찬되었다(『세종실록』 29년 9월 29일). 그러나 여전히 중국 한자음과의 차이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 못하고, 이를 바로잡으려는 시도가 지나칠 정도로 많았다. 그 결과 현실에서 사용되는 우리식 한자음과는 거리가 먼 운서가 되어 버렸는데, 이러한 경향은 이후에도 1796년(정조 20)에 이덕무(李德懋) 등이 편찬한 『규장전운(奎章全韻)』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정조실록』 20년 8월 11일). 그럼에도 한시의 압운자와 입성의 기준을 마련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운서 편찬에 대한 관심과 노력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참고문헌

  • 정경일, 『한국운서의 이해』, 아카넷,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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