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사(郵遞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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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대 근대적 우체 업무를 담당하던 관청.

개설

1895년(고종 32)에 한성을 필두로 농상공부(農商工部) 소속의 우체사(郵遞司)가 전국 각지에 설치되어 우편 사무를 담당하였다. 각지 우체사는 계속 증설되어 1900년에는 모두 38곳으로 증설되었다. 1900년 3월 광무개혁 진행 중에 우체사는 신설된 통신원(通信院)으로 이관되었다. 우체사는 1905년 4월 일본에게 통신권이 강탈되면서 우편국으로 바뀌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근대 우편 제도는 1884년(고종 21) 우정총국(郵征總局)의 설치로 개시되었지만 갑신정변으로 곧바로 중단되었다. 이후 서울과 인천 간의 서로전선(西路電線)과 서울과 부산 간의 남로전선(南路電線)이 가설되어 전보국이 전신(電信)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1893년 8월에는 우편 사업을 재개하면서 전보 사업과 우편 사업을 담당할 전우총국(電郵總局)으로 확대·개편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 때 공무아문(工務衙門)에서 전신 사업을 담당할 전신국과 함께 우편 사업을 담당할 역체국(驛遞局)이 설립되었다. 이듬해 을미개혁 때에는 농상공부 통신국 체신과가 우편 사업을 주관하였고, 대한제국에서는 통신원으로 발전해 갔다. 이때 우편 사업을 실질적으로 담당할 우체사가 1895년 6월 서울과 인천을 필두로 전국 각지에 설치되었다. 1900년 3월 우체사가 통신원에 편입될 당시 전국의 우체사 수는 38개소로 증설되었다.

조직 및 역할

우편 사업과 전신 사업 등의 통신 사업은 농상공부가 설치된 이래 가장 역점을 둔 부분이었다. 조직, 인력, 재정, 운영, 법률 정비 등 모든 부분에서 가장 체계적이고 안정적인 구조를 유지하고 있었다.

1895년 윤5월 한성과 인천을 비롯하여 전국 24곳에 우체사가 설치되었고, 며칠 뒤 한성과 인천 간의 우편 사무가 개시되었다. 「우체사관제(郵遞司官制)」가 반포된 날 「국내우체규칙(國內郵遞規則)」도 칙령으로 함께 반포되었다.

처음 마련된 우체사의 조직과 인원은 사(司)마다 사장(司長) 1명, 우체주사(郵遞主事) 24명, 우체기수(郵遞技手) 27명, 우체기수보(郵遞技手補) 49명을 두는 것으로 정해졌다. 우체사장은 농상공부 대신의 명령을 받들고 통신국장의 지휘·감독을 받도록 규정하였다.

이듬해 8월에는 우체사를 두 등급으로 나누어 한성, 인천, 원산 등지의 우체사를 1등으로 하였다. 그리고 주임관인 사장을 1명, 판임관인 주사를 한성우체사는 15명, 나머지 1등 우체사는 3명, 2등 우체사는 2명을 두도록 하였다. 우체기수나 우체기수보에 대한 규정은 관제에서 사라졌고, 우체사의 등급에 따라 관원 배치 수를 조정하였다. 그리고 주사는 우무학당(郵務學堂)의 졸업생인 우무학도(郵務學徒) 가운데 선발하도록 하였다. 한성우체사의 경우에는 1897년부터 우체총사(郵遞總司)로 규정되어 지방의 1등과 2등 우체사를 관장하였다.

우편 사업은 국영을 원칙으로 하였다. 우편물의 취급 종류는 제1종은 서신, 제2종은 관보, 제3종은 서적·인쇄물·사진·그림·견본·농산물의 씨앗 등으로 되어 있다. 요금은 균일 요금 제도를 실시하였는데, 종류별 요금은 제1종이 중량 2돈중[錢重]마다 1전이며, 제2종 1호의 경우를 보면 중량 1냥 6돈중마다 5푼[分]이고, 제3종은 중량 8돈중마다 1전이었다. 등기는 3전이었고, 무료 우편이 있었다. 요금의 납부 방법은 우표로 선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미납과 부족액은 정해진 요금의 두 배를 현금으로 수취인에게 받았다.

우표는 정부에서 네 종류를 발행하였는데, 5푼·1전·2전 5푼·5전짜리가 있었다. 한성에는 우표 판매소 열 곳을 설치하였다. 취급 시간은 오전 7시부터 오후 10시까지이며, 우편물의 배달은 표기된 주소대로 배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고 1일 2회에서 4회로 늘렸다.

한편, 주소지 수령인이 우편물을 받지 않거나 거짓이나 위력으로 우편 사무를 방해하거나 우표를 위조하는 경우, 또는 배달부인 체전부(遞傳夫)가 우편물을 분실하거나 부당한 품삯을 요구하거나 고의로 우편을 개봉·훼손·은닉하거나 우편을 잘못 전달하는 경우, 또한 우표 매표소 외에서 우표를 매매하는 경우 등은 범죄로 간주하고 벌금, 태형, 징역 등의 처벌을 가하였다.

1897년 6월에는 만국 우편 조약에 서명하고 장차 외국 우편을 개시할 방침을 세웠다. 이듬해 6월에는 영어, 프랑스어 전공 학생 가운데 10명을 선발하여 유럽으로 보내 우체 사무를 견습하도록 하였다.

한편, 우체사가 전국적으로 설치되면서 공문서 전달을 담당해 오던 우역제(郵驛制)는 폐지되었다. 이에 따라 각지의 찰방(察訪)과 역속(驛屬)이 폐지되고 역(驛)의 토지와 금전에 대한 장부는 모두 관찰부나 군에 넘겨졌다.

변천

1900년 3월 우체사·전보사는 신설된 통신원 관할로 바뀌었다. 당시 전국의 우체사는 모두 38곳이었고 군 단위에는 우체지사도 설치되었다. 이후에도 우체사와 우체지사가 계속 설치되었고, 우편 사무 확장에 따라 한성총사와 1등 우체사에 주사를 2명 증원하기도 하였다. 이때 주사는 우무학도 중에서 우체 사무를 잘 알고 외국어를 이해할 수 있는 자로 하였다.

1905년 4월 일본은 러일전쟁을 빙자하여 한국과 통신 협정을 체결하고 한국의 우편·전신·전화 등 모든 통신 기관을 강탈하였다. 이로써 각지의 우체사와 우체지사는 우편국·우편국 출장소 등으로 개편되었다. 통감부 설치 후에는 통감부 통신관리국이 한국의 모든 통신 기관을 장악하였다.

참고문헌

  • 송병기·박용옥·박한설 편저, 『한말 근대 법령 자료집 1~9』, 국회도서관, 1970~1972.
  • 전기통신사 편찬위원회, 『한국 전기 통신 100년사(상)』, 체신부,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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