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국(郵政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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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근대적 우편 업무를 담당하기 위해 설치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부속기관.

개설

“연해 각 항구를 내왕하는 우편 업무를 취급할 뿐 아니라 내지(內地) 우편 업무까지 점차 확장해서 공사 간의 이익을 거두게 하라.” 하는 1884년 3월 27일 고종의 칙명에 따라 다음 날인 3월 28일 우정총국(郵征總局)이 설립되었다. 책임자인 총판(總辦)에는 홍영식(洪英植)이 임명되었다(『고종실록』 21년 3월 28일). 개국 준비를 위해 홍영식은 4월 9일 일본에, 16일 미국과 영국에 왕의 칙유(勅諭)를 통보하고 일본, 영국, 홍콩의 우정국과 우편물 교환 협정을 체결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 정부는 근대적 제도 개혁의 일환책으로 청나라 실력자 중서사인(中書舍人)마젠창[馬建常]의 건의에 따라 1882년 12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내에 정각사(征搉司), 장교사(掌交司), 부교사(富敎司), 우정사(郵程司) 등 4사와 동문학(同文學)을 설치했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장정에 의한 우정사의 업무는 ‘전보, 역전, 철로 및 수로, 통구(通衢) 등 여러 운도(運道) 업무를 관장’하는 것이었다. 협판홍영식과 참의이교영(李敎榮), 주사정만조(鄭萬朝)가 우정사에 소속되었다.

우정사는 1883년 1월 일본과 「부산구설해저전선조관(釜山口設海底電線條款)」을 체결하기도 하였다. 이미 홍영식은 1881년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으로 일본육군성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우정 사업에 관심을 가졌다. 1883년 8월에는 민영익(閔泳翊)을 정사(正使)로 하는 보빙사(報聘使)에서 부사(副使)로 미국에 갈 때 일본에서 우편 업무에 숙달한 일본인 3명의 고용을 협의한 바 있었다.

조직 및 역할

1884년 윤5월 15일 「개략장정별단(槪略章程別單)」을, 9월 3일 우정총국 사사(司事) 14명의 명단을 왕에게 올렸다(『고종실록』 21년 윤5월 15일). 여기에는 안종수, 서재창, 이상재, 남궁억 등 신진 개화 인사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이보다 앞서 7월 1일에는 홍영식을 도울 일본인 실무 기술자로, 일본에서 우체국장을 하였던 오비 스케아키[小尾輔明]와 오비의 보좌관 겸 우정국 사무 관련 영어 번역자인 미야자키 겐세이[宮崎言成]를 우정국 고문으로 초빙하였다. 이들에게는 각기 월급으로 130달러, 70달러를 주는 것으로 고빙 계약을 체결하였다. 8월 9일에는 일본대장성 인쇄국에 주문한 5문, 10문, 25문, 50문, 100문 등 총 5종 우표의 원판이 완성되었고, 그중 5문, 10문 우표는 우정국 개국 이전에 도착해서 개국과 동시에 사용되었다.

같은 해 9월 11일에는 「대조선국(大朝鮮國) 우정국(郵征局) 직제장정(職制章程)」, 「사무장정(事務章程)」, 「우정규제(郵征規制)」, 「경성내우편개설규법(京城內郵便開設規法)」, 「경성-인천간왕복우정규법(京城-仁川間 往復郵征規法)」 등이 마련되었다. 「사무장정」과 「직제장정」에 따르면 우정총국이 역전(驛傳)과 우편 발송에 관한 모든 사무를 총괄하는 기구임을 밝히고 3과 15부의 명칭을 규정하였다. 3부는 규획과(規劃課), 발착과(發着課), 계산과(計算課)이며 규획과는 관리 업무를, 발착과는 우체국 사무를, 계산과는 경리 업무를 담당하였다. 각 과 산하에는 직무부(職務部)를 비롯한 15부가 있었으며, 「사무장정」과 「직제장정」에서는 각 급 직원의 업무, 총판·방판(幫辦), 과장과 과원 등의 직무도 규정하였다. 9월 23일에는 외무아문을 통해 10월 1일부터 우편 업무를 개시한다는 통지와 관계 규칙을 보냈다.

그해 10월 1일 처음으로 우정 사업을 시작하였다. 우편물 운반 시 깃발로 표시한다는 규정을 두었고, 각 사사(司事)를 교대로 숙직시켰다. 우정총국 청사는 현재 종로구 견지동 397번지인 한성부 중부 견평방(堅平坊) 전동(典洞)의 전의감(典醫監) 건물을 수리 후 사용하였다. 중앙에는 우정총국을 두고 각 지방에 우정국과 우정수취소(郵征受取所)·우초매하소(郵鈔賣下所)를 설치하도록 계획하였고, 별도로 인천분국을 설치하였다.

변천

우정국은 우편 업무 개시 20일 만인 1884년 10월 21일 혁파되고 말았다(『고종실록』 21년 10월 21일). 이는 그해 10월 17일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이 우정총국 개설 축하연을 이용해 일으킨 갑신정변이 진압되었기 때문이었다. 홍영식은 우정국이 주도했던 정변 후 좌·우영사겸우포장에 이어 우의정을 맡았다(『고종실록』 21년 10월 18일). 정변이 실패로 돌아가고 김옥균, 박영효 등은 일본으로 도주하였지만 그는 왕을 끝까지 따르다 동료 박영교 등과 함께 정변 3일 만인 10월 19일 살해되었고 우정국도 폐지되었다. 이후 우정국의 기능은 1893년 전우총국(電郵總局), 1895년 농상공부 통신국, 1900년 통신원 등으로 이어졌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서울특별시사 편찬 위원회 편, 『서울육백년사(3)』, 서울특별시, 1979.
  • 이광린, 『개화기 연구』, 일조각, 1997.
  • 진기홍, 『구한국시대의 우표와 우정(郵政)』, 경문각, 1964.
  • 체신부, 『한국 우정(郵政) 100년사』, 체신부, 1984.
  • 김원모, 「견미사절(遣美使節) 홍영식 연구」, 『사학지』28,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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