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록(牛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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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대 팔기제의 한 단위.

개설

청대 팔기제의 한 단위인 니루([牛彔], niru)의 한자 음역어이다. 니루는 대략 300명의 군사로 구성되었으며, 니루 어전([牛彔額眞], nirui ejen, 개명 니루 장긴([牛彔章京], niru janggin))이 지휘하였다. 이후 니루 어전(장긴)을 한어로 좌령(佐領)이라 하였으므로 니루를 좌령으로 표기하는 경우도 있었다. 5개의 니루로 구성된 상위 부대의 명칭은 잘란([甲喇], jalan)이었고, 다시 5개의 잘란으로 구성된 부대가 바로 구사([固山], gūsa), 즉 기(旗)이다.

내용 및 특징

니루는 팔기제로 잘 알려진 청대의 군사 조직에서 가장 하위에 해당하는 제대로서 평상시에는 하나의 사회조직으로 기능하는 공동체 조직이었다. 팔기는 구사마다 잘란이라는 하위 부대를 5개씩 갖추고 있었고, 각 잘란은 5개의 니루로 구성되었다. 규모나 편제는 정해져 있었지만, 경우에 따라 차이는 있었다.

구사의 지휘관은 구사 어전([固山額眞=도통(都統)], gūsa ejen)이었고, 그 아래에는 좌우 각 1명씩의 머이런 어전([副都統], meiren i ejen, 개명 머이런 장긴(meiren i janggin))이 있었으며, 잘란에는 각각 잘란 어전([甲喇額眞], jalan ejen, 개명 잘란 장긴[甲喇章京=參領], jalan janggin)을 두었고, 그 아래에 속한 니루에는 니루 어전(장긴)이 있었다.

이상과 같이 니루에서 구사에 이르는 팔기제는 상하위의 제대라 수직적이고 분명한 지휘 체계 하에 놓여 있었고, 이로 인하여 상황에 따른 유기적인 활용이 가능하였다는 점이 특징이다. 특히 니루는 전쟁을 위하여 군사를 징발할 때, 일정한 병력을 분정하는 대상이 되었다.

변천

본래 니루는 만주어로 화살을 의미하였다. 처음에는 10여 명을 하나의 니루로 편성하였는데 이는 수렵 생활과 관련한 공동체와 관련이 있었다. 니루의 규모는 점차 확대되었는데, 적게는 100~200에서 많게는 700~800명까지 편성되었다. 이는 건주여진(후금)에서(이) 주변 세력을 병합하는 과정에서 각 세력의 추장들로 하여금 지배력을 유지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후에 팔기제가 점차 정비되면서 니루는 대략 300명의 군사를 가진 단위 조직으로 정립되어 갔다.

니루와 관련하여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1631년 청군이 조선 평안도의 가도(椵島)에 주둔한 유흥치(劉興治) 등의 군사를 공격하였는데, 명군 도독(都督)황룡(黃龍)이 격전 끝에 니루 어전 2명을 죽였다는 것(『인조실록』 9년 6월 28일), 그리고 1651년 정친왕(鄭親王)지르갈랑([濟爾哈朗], jirgalang)이 주도하여 섭정왕 도르곤([多爾袞], dorgon)의 악행을 알린 순치제(順治帝)의 칙서에서 한 차례 언급되고 있다(『효종실록』 2년 3월 17일).

참고문헌

  • 『만문노당(滿文老檔)』
  • 『청사고(淸史稿)』
  • 『대청회전(大淸會典)』
  • 마크 엘리엇, 이훈·김선민 역, 『만주족의 청제국』, 푸른역사, 2009.
  • 유소맹, 이훈·이선애·김선민 역, 『여진 부락에서 만주 국가로』, 푸른역사, 2013.
  • 구범진·이재경,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구성과 규모」, 『한국문화』 72,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2015.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