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천역(龍泉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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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황해도 서흥에 위치했던 역.

개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용천역(龍泉驛)은 서흥도호부(瑞興都護府) 남쪽 22리(약 8.6㎞)에 있는 용천(龍泉)의 서쪽 10리(약 4㎞)에 위치해 있었다. 용천역은 고려시대에도 동주(洞州, 현 서흥)에 위치하였으며, 금교도(金郊道) 소속의 역(驛)으로 중시되었다. 조선시대에도 용천역은 금교도의 소속 역으로 편성되었다.

내용 및 변천

용천역은 고려시대에도 동주에 위치했던 금교도 소속의 역으로서, 개경과 서경을 연결하는 간선 교통로상의 역으로 중시되었다.

조선시대에 용천역은 한양과 의주를 잇는 간선 교통로상에 위치했던 관계로 중시되었다. 한양과 의주를 잇는 간선 교통로의 역 중에서 황해도에 위치한 역들은 ‘참(站)’이라는 명칭으로도 불렸다. 특히 개성과 절령(岊嶺: 현 황해도 황주 자비령) 사이에 위치했던 7곳의 역은 보통 ‘7참’으로 불렀다. 용천역도 7참에 속하는 만큼 용천참(龍泉站)이라는 명칭으로도 자주 불렸다.

조선시대 황해도 지역의 역도(驛道) 편성은 몇 차례의 변동이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한양과 의주를 잇는 교통로상의 역 중 용천역 등 황해도 지역에 위치한 10곳의 역을 황해도참로찰방(黃海道站路察訪)의 관할하에 두었다[『세종실록』 지리지 황해도]. 한편 1462년(세조 8) 전국적인 역도제(驛道制)의 개편 때에, 황해도칠참찰방(黃海道七站察訪)의 관할 역들에 대해서는 기존과 동일하게 한다고 결정하였다(『세조실록』 8년 8월 5일). 이때의 칠참찰방은 황해도참로찰방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1470년(성종 1년)에 금교도찰방(金郊道察訪)의 직책이 확인되므로(『성종실록』 1년 2월 3일), 세조 말년에서 성종 초년 사이에 황해도참로찰방이 금교도찰방으로 개편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용천역 역시 이때 황해도참로찰방의 관할로부터 벗어나 금교도 소속이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에 간행된 『경국대전(經國大典)』과 『대전회통(大典會通)』 등에는 모두 용천역이 금교도의 소속 역으로 기록되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용천역에는 역노(驛奴) 4명, 역비(驛婢) 8명, 역마(驛馬) 12마리가 배속되어 있었다.

용천역은 동남쪽으로는 평산 방면, 서북쪽으로는 봉산·황주 방면을 연결하는 한양~의주간 간선 교통로상에 위치하였다. 용천역에서는 동남쪽으로 안성역(安城驛), 서북쪽으로 검수역(劒水驛) 등과 연결되었다.

1896년(고종 33)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전국의 역들이 폐지되면서 용천역도 폐지되었다.

용천역의 위치는 현재 북한의 행정 구역으로 황해북도 서흥군 화곡리에 비정된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정요근, 「高麗·朝鮮初의 驛路網과 驛制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 정요근, 「조선초기 驛路網의 전국적 재편」, 『조선시대사학보』46, 조선시대사학회, 2008.
  • 조선과학백과사전출판사·한국평화문제연구소 공편, 『조선향토대백과사전』, 평화문제연구소,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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