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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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왕이 한강을 도강하여 행행하거나 군사 훈련을 거행하면서 휴식을 취하던 주정소.

개설

정조가 화성(華城)에 생부인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顯隆園)을 세운 뒤 원행(園幸)을 거행할 때 한강을 건너면서 휴식을 취하기 위해 만든 주정소(晝停所)의 명칭이다. 1789년(정조 13) 정조는 생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으로 옮기고 그곳에 정기적으로 참배하기 위해 한강에 배다리 놓는 일을 전담하는 주교사(舟橋司)를 설치하였다. 1791년(정조 15) 정조는 현륭원에 원행할 때 노량진(露梁津)에 주교(舟橋)를 설치하고 관리하기 위한 주교사를 두고는 주변에 있던 망해정(望海亭)에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을 세워 주정소로 활용하고자 했다.

위치 및 용도

용양봉저정이라는 명칭은 정조가 붙였는데, 그 명칭에 이미 위치한 곳의 특징이 나타나 있다. 정조는 주변 지형을 살펴본 후 “북쪽에는 높은 산이 우뚝하고, 동쪽에는 한강이 흘러와 마치 용이 굼틀굼틀하는 것 같고, 봉이 훨훨 나는 듯하다.”라고 하였다. 정조의 말대로 이곳은 노량진의 언덕에 위치하여 주변을 모두 살필 수 있는 한강의 명승지이면서 주교를 이용할 수 있는 자연 지리적 요건을 갖추었다. 용양봉저정의 건립 목적은 왕의 행행이었다. 용양봉저정은 왕이 용산과 동작진에서 한강을 건너 도착하는 곳에 있었다. 더욱이 이곳은 시흥이나 과천을 통해 화성으로 갈 수 있고, 김포와 인천으로도 갈 수 있는 교통의 요지였다.

정조가 용양봉저정을 세운 것은 무엇보다 화성 현륭원과의 관계 때문이다. 이곳은 화성으로 원행을 가는 행차가 한강을 건너면 반드시 거치는 곳이었다. 또한 정조가 시흥을 거쳐 화성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정조가 완성한 화성 원행길은 고종대에도 진행되었고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왕이 목적지에 가는 도중에 머물 때와 궁궐로 귀환할 때 머무는 목적은 차이가 있었다. 도성에서 나와 한강을 건넌 후 머무는 목적은 휴식을 취하고 행렬을 재정비하기 위해서였다. 예컨대 정조가 이곳에서부터 화성까지 원행을 할 때는 장용영(壯勇營)에서 고취(鼓吹)를 위한 준비를 했다. 또한 정조가 주교에 이르면 승선포(乘船砲)와 행선포(行船砲)를 쏘아야 했으므로 그 준비도 필요했다. 도성으로 돌아올 때도 휴식과 재정비를 위한 것이 목적이었으나, 이때는 행차에 동원한 병사들을 위로하고 상을 내리는 경우가 많았다. 노량진의 백사장에서 시위 군병들의 무예를 시험하거나 진법을 훈련시키고 그 결과에 따라 시상을 하였다.

변천 및 현황

정조대 이후에는 노량행궁(鷺梁行宮)이라고도 했다. 왕이 도성으로 귀환하는 행차가 지연되거나 이곳에서 수행한 사람들에게 시상 및 위로 행사를 거행하면서 숙박을 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노량진 주변의 넓은 모래사장은 군사 훈련을 거행하기 적합하였다.

고종대에도 용양봉저정은 화성에 행행하거나 노량진에서 군사 훈련을 지휘할 때 주정(晝停)하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1867년(고종 4)에 고종은 용양봉저정에서 수조(水操)를 거행하고 야간에는 횃불을 올리는 것을 관람한 뒤 경숙(經宿)하였다(『고종실록』 4년 9월 9일). 고종은 갑오개혁을 거행하던 1894년(고종 31)에도 헌릉(獻陵)과 인릉(仁陵)에 행행하기 위해 노량진에 주교를 만들고 머물렀다(『고종실록』 31년 2월 13일). 대한제국기인 1899년(광무 3)에도 노량진에 주교를 설치했는데, 이때는 주교사가 폐지되어 농상공부(農商工部)에서 배를 이어 만들었다(『고종실록』 36년 11월 7일).

또한 1907년(융희 1)에 순종이 일본에서 귀국한 유길준(兪吉濬)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용양봉저정을 하사하면서 군주가 이곳에 머무는 일은 없어졌다. 유길준은 순종의 특별한 은총에 감격하여 정당(正堂)을 봉인하고 감히 거처하지 않았으며 조호정(詔湖亭)이라 하였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 소유로 넘어갔다가 해방 이후 복원하여 서울특별시 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다.

형태

정조가 혜경궁 홍씨와 화성에 행차하던 기록인 원행 관련 병풍에는 주교를 건너 도착한 노량진에 용양봉저정의 정문과 두 채의 다른 건물이 같이 그려져 있다. 현재는 앞면 6칸, 옆면 2칸의 정자만 복원되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1795년(정조 19) 윤2월 9일에 정조가 혜경궁 홍씨와 화성에 원행을 하면서 용양봉저정에 머물렀는데, 수행 인원이 4,922명이었다. 1800년(정조 24) 정조가 사망하여 화성에 운구할 때 신연(神輦)을 용양봉저정에 잠시 모셨다가 화성으로 이동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만기요람(萬機要覽)』
  • 『속음청사(續陰晴史)』
  • 『온궁일기(溫宮日記)』
  • 『온행등록(溫幸謄錄)』
  • 『홍재전서(弘齋全書)』
  • 나신균, 「인조~숙종대 행궁의 배치와 공간이용에 관한 연구」, 명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1.
  • 이왕무, 「조선시대 국왕의 溫幸 연구」, 『국사관논총』108, 2006.
  • 이왕무, 「조선후기 국왕의 능행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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