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수사(龍壽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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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퇴계이황이 머물렀던 경상도 안동의 사찰.

개설

용수사(龍壽寺)는 1146년(고려 의종 즉위)에 각화사 주지 성원(誠源)이 닦은 터에 화엄종 승려 석윤(釋胤)이 1164년(고려 의종 18)에 왕명을 받아 공사를 시작하였으며 1178년(고려 명종 8)에 대화엄회(大華嚴會)를 열고 낙성하였다. 조선전기 퇴계이황(李滉)은 명종의 초상에도 병이 있어서 시골에 내려갔는데, 발인하는 날에 서울로 가서 분곡(奔哭)할 수 없었으므로 집에 있기가 마음이 편치 않아서 가까운 용수사에 가서 지냈다고 한다.

내용 및 특징

(1) 고려시대

용수사는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운곡리의 용두산(龍頭山)에 소재해 있다. 용수사와 관련한 기록은 고려시대 최선(崔詵)이 왕명을 받아 지은 「용수사개창기(龍壽寺開剏記)」의 탁본이 일본 천리대학(天理大學) 도서관에 남아 있어서 이를 통해 알 수 있다.

용수사는 1146년(고려 의종 즉위) 가을에 각화사(覺華寺) 주지 성원이 용두산의 경치가 뛰어나다는 이야기를 듣고 땅을 정하여 건물 몇 칸을 지은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 후 성원의 제자인 처이(處彛)가 스승을 계승하여 살다가 운영이 힘들어지자 각화사 주지로 있던 석윤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였다. 석윤은 1164년(고려 의종 18)에 임금의 부름을 받아 대궐에 갔는데, 의종이 화엄 사찰을 짓고자 하자 용두산 처이의 일에 대해 말하였다. 의종은 곧바로 용수사라는 이름을 내리고 지방관에게 명하여 공사를 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석윤의 제자인 운미(雲美)가 공사를 주관하여 법당과 요사채 등 90여 칸을 지었다.

석윤이 입적한 후 문인 확심(廓心)이 주지를 맡아 13층 청석탑(靑石塔)을 조성하고 1178년(고려 명종 8)에는 대화엄회(大華嚴會)를 열고 낙성하여 화엄종 사찰로 개창하였다. 사찰의 개창을 주도한 석윤은 대각(大覺) 국사(國師)의천(義天)의 문인인 무애지(無㝵智) 국사(國師)계응(戒膺)의 제자이며, 석윤의 제자 확심은 의천이 편찬한 『원종문류(圓宗文類)』에 대한 주석서를 지은 인물이다.

(2) 조선시대

퇴계이황은 명종의 초상에도 병이 있어서 시골에 내려갔는데 발인하는 날에 서울로 가서 분곡할 수 없었으므로 집에 있기가 불안하여 용수사에 가서 의탁하였다(『광해군일기(중초본)』 2년 2월 8일). 퇴계가 용수사에서 머물렀던 것과 관련해 『퇴계집』 언행록(言行錄) 유편(類編)에서는 "1567년 6월 13일에 용수사에서 묵었다."고 하였고, 연보(年譜)에서는 "1567년 9월 18일, 용수사(龍壽寺)에 머물다. 19일이 대행왕의 발인 날이므로 집에 있는 것이 편치 못했기 때문이었다."라고 하였다. 퇴계 생가와 용수사의 거리는 약 3.7㎞ 정도로 가까워서 퇴계가 가끔 독서하며 휴식을 취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용수사는 조선후기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다가 1895년 을미의병이 일어났을 때 일본군과 전투 중에 소실되었다고 한다. 현재 건물들은 근래에 중창한 것이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용수사개창기(龍壽寺開剏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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