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담역(龍潭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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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강원도 지역의 역도 중 하나인 은계도에 속한 역.

개설

용담역(龍潭驛)은 고려시대에는 개경에서 동계 지역을 연결하는 중간 지대에 위치한 역도(驛道)도원도(桃源道)에 소속되었다. 조선 건국 직후부터 전국적인 역로망 정비를 시행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용담역은 경기도의 역도인 도원도의 속역으로 편제되었다(『세종실록』 지리지 경기). 그 뒤 성종대에 반포된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철원이 경기도에서 강원도로 이속되었기 때문에 강원도의 역도인 은계도(銀溪道)에 편입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철원도호부에 위치하였으며, 갑오개혁 때까지 존속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사(高麗史)』「병지(兵志)」 참역(站驛) 조에 따르면, 도원도에 소속된 42개 속역 가운데 하나였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고려의 역제(驛制)가 22역도-525속역 체제로 정비된 문종대 이후에 도원도에 편성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초기의 6과(科) 체제에서는 2과에 해당하여 정인(丁人) 60명이 배속되었다.

조직 및 역할

다른 역과 마찬가지로 용담역에도 역의 운영에 필요한 역마와 토지 등이 지급되었는데, 1424년(세종 6)에는 대마 2필, 소마 2필 등 역마 4필과, 위전(位田) 6결, 공수전 6결 등 12결의 역전(驛田)이 지급되었다(『세종실록』 6년 3월 25일). 또한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강원도 철원 조에는, 역리(驛吏) 31명, 역노(驛奴) 66명, 역비(驛婢) 30명과, 대마 1필, 기마 1필, 복마 4필 등 총 6필의 역마가 배속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변천

『세종실록』에는 용담역이 1425년(세종 7)에 도원역(桃源驛)·구화역(仇和驛) 등과 함께 신설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세종실록』 7년 5월 20일). 그런데 『태종실록』에는 태종이 용담역에 머물렀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태종실록』 16년 10월 18일). 또한 『세종실록』의 또 다른 기사에는, 1424년(세종 6)에 용담역을 비롯해 도원역·백령역(白嶺驛)·옥계역(玉溪驛) 등에 소로(小路)에 해당하는 전지(田地)를 분급했다고 되어 있다(『세종실록』 6년 3월 25일). 따라서 1425년 이전에 이미 용담역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한편 한양이 조선의 도읍지로 지위를 굳히게 되면서 개성과 동북방을 잇는 기존 역로의 역의 규모는 축소되고 한양과 함길도 방면을 연결하는 역로에 위치한 역들의 위상이 강화되었다. 이는 함길도 방면의 영토 개척이나 여진의 사행 등으로 늘어난 역로 이용 수요를 감당하기 위한 조치였다. 때문에 개성과 연결된 역들 중에서 용담역을 비롯해 도원역·백령역(白嶺驛)·옥계역(玉溪驛)은 직로의 규모에서 소로로 역의 규모가 축소되었고 그 결과 세종 6년에 용담역·도원역·백령역(白嶺驛)·옥계역(玉溪驛)에 소로에 해당하는 전지가 분급되었다.

조선 왕조는 건국 직후부터 지속적으로 한양 중심의 역도 체제 구축을 위한 개편을 시도하였는데, 용담역은 경기도의 역도인 도원도에 소속되었다(『세종실록』 지리지 경기). 그 뒤 성종대에 『경국대전』이 반포되면서 확정된 조선시대 전기의 역도 체제에서는 강원도의 역도인 은계도의 속역으로 편제되었다. 이후 조선시대 후기까지 은계도의 속역으로 존속하다가, 1896년(고종 33)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한편 『여지도서』강원도 철원 조에는, 용담역이 예전에는 관아 서쪽 10리 지점에 위치하였는데, 나중에 관아 동쪽 7리 지점으로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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