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골대(龍骨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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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의 장수로, 병자호란 이후 조선 관계 일을 전담한 인물.

개설

용골대는 할아버지인 다이투쿠하리[岱圖庫哈理]를 따라 누르하치에게 귀순하였다. 니루 이 어전([牛彔額眞], niru i ejen)을 제수받고 만주 정백기(正白旗)에 예속되었다. 조선에 여러 차례 사행을 다녀갔는데, 특히 병자호란 때 마부대(馬夫大)와 함께 조선 조정과의 협상을 담당하면서 삼전도에서 인조가 3번 절하고 9번 이마를 찧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관장하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그는 마부대와 함께 조선과의 외교 관계를 전담하였다.

활동 사항

용골대는 그의 만주어 이름 타타라 잉굴다이의 한자 음역어이다. 잉굴다이는 대대로 지금의 요녕성 무순 동남쪽에 위치한 자쿠무[扎庫木]에 거주하였다. 그는 할아버지인 다이투쿠하리[岱圖庫哈理]를 따라 누르하치에게 귀순하였다. 니루 이 어전을 제수받고 만주 정백기에 예속되었다. 1619년에 개원(開原) 공격에 참여하였으며, 1621년 심양(瀋陽) 전투에서는 유격(游擊)을, 요양(遼陽) 공격에서는 2등참장(二等參將)을 제수받았다.

1627년 정묘호란을 일으켜 조선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낸, 후금은 5월에 유해와 함께 용골대를 사신으로 조선에 보내왔다. 당시 사행 목적은 조선과 후금이 영원한 형제의 우호를 맺어 형세를 믿고 남을 속이는 명의 행위를 본받지 말며, 서로 도망해 온 사람이 있으면 숨기지 말고 보내 주기를 당부하는 것이었다(『인조실록』 5년 5월 30일).

용골대는 1628년에도 조선에 사행을 왔는데, 의주(義州)에 사신이 왕래할 수 있도록 하며, 개시(開市)를 열어 서로 교역하는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신의 왕래는 가을과 겨울에 각각 한 번씩 하고 개시를 열어 교역하는 것은 봄·여름·가을의 끝 달에 하기로 하였으며, 교역할 때 값은 시장 관리를 하는 사람이 상의해 결정하는 것으로 논의가 되었다(『인조실록』 6년 2월 28일).

1629년에 용골대는 후금군이 하북성의 준화(遵化)를 함락시킨 후, 홍타이지[皇太極, hongtaiji]로부터 명을 받아 그곳을 지켰으며, 1630년에는 조선의 춘신사(春信使)박난영(朴蘭英)이 심양에서 만나기도 하였다. 그는 박난영에게 사신 도착이 더딘 것에 대하여, 명과의 전쟁에서 승패 여부를 관망하는 것 때문이 아니냐고 질책하기도 하였다(『인조실록』 8년 2월 27일).

1631년 3월에는 용만(龍灣)에서 개시하는 일로 수천 명의 여진인을 이끌고 왔으며, 7월에는 호부(戶部) 승정(承政)이 되었다. 1633년 4월에 다시 조선에 와서 군량미 지원을 요청하였다. 앞선 3월에 명나라 장수 공유덕(孔有德)과 경중명(耿仲明)이 귀부하였는데, 이들에 대한 지원을 얻어 내고자 한 것이다. 조선은 공유덕 등을 추격해 온 명의 주문욱(周文郁)으로부터 이미 식량 지원을 요청받아 3천 석을(3,000석을) 지원하기로 한 상태였기 때문에 곤란한 상황에 처하였다. 조선은 공유덕 등이 명을 배반한 장수이자, 유흥치(劉興治) 등과 함께 조선을 도모하려 한 원수임을 들어 식량을 내줄 수 없다고 반박하였다. 이에 용골대는 형제의 도리를 들어 조선을 압박하였다.

1634년에 후금군은 차하르[察哈爾] 몽골의 마지막 수장이었던 릭단 한[林丹汗]을 평정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몽골 칸들이 사용했다는 옥새인 전국새(傳國璽)를 얻게 되었다. 이에 후금의 여러 버일러([貝勒], beile)들과 신하들은 홍타이지에게 존호를 올리겠다는 청원을 하였다. 이는 홍타이지가 황제로 즉위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홍타이지는 조선도 형제국이므로, 함께 올리라는 요구를 하였는데, 이때 용골대가 조선에 사신으로 왔으나, 문서 접수 자체를 거부하는 등 조선은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이에 용골대는 불만을 품고 되돌아갔는데, 그 과정에서 조선이 후금과 정묘년에 강화한 것은 잘못이니 관계를 단절해야 한다는 문서를 빼앗아 가기도 하였다. 이로 인하여 양국은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이것이 1636년(인조 14)에 일어난 병자호란이었다. 이 과정에서 용골대는 삼전도에서 인조의 삼배구고두례를 관장하기도 하였다(『인조실록』 15년 1월 30일).

1637년에는 인조의 책봉사로 마부대와 같이 조선에 오기도 하였다. 병자호란 이후 홍타이지는 조선에 관한 일은 용골대와 마부대에게 맡겼던 것이다(『인조실록』 16년 8월 4일). 용골대는 볼모로 잡혀 와 심양에 거주하는 소현세자를 위협한 적도 있었다. 당시 소현세자는 화를 내면서 자신이 비록 이역에 와 있지만 한 나라의 세자인데, 어찌 용골대가 협박을 하는가라는 언급과 함께 죽고 사는 것은 천명에 달려 있는 것이니 그 따위로 나를 협박하지 말라고 하자, 용골대가 웃으면서 사과를 한 적도 있다고 하였다(『인조실록』 18년 11월 1일).

1644년에는 예친왕(睿親王)도르곤([多爾袞], dorgon)을 따라 입관하였으며, 다음 해인 1645년에 3등공(三等公)에, 1647년에 2등공(二等公)에 봉해졌다. 1648년 2월에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 『청사고(淸史稿)』
  • 한명기, 『병자호란』, 푸른역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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