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라(要時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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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조선과 일본의 진영을 직접 오가며 교섭을 담당한 일본인.

개설

요시라(要時羅)는 대마도(對馬島) 출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소서행장(小西行長)과 종의지(宗義智)의 부하로서 조선의 진영에 와서 여러 정보를 전하며 강화교섭을 진전시키려 한 인물이다. 조선어에 능통하여 조선인들과 자유롭게 대화하며 교섭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요시라(要時羅)’라는 이름은 일본어 발음을 한자로 옮긴 것으로 보이는데, 원래 이름은 ‘여사랑(요지로)’에 가까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 측과 접촉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그와 같이 소개하였을 것이다. 강화교섭 기간 중 김응서의 진영을 자주 방문하여 여러 정보와 요구조건을 전달하였으며, 1596년 통신사가 일본으로 갈 때 이를 수행하였다. 또한 정유재란의 발발을 막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또한 정유재란 전 반간계를 주도하였다는 견해도 있다. 정유재란 중에는 순천왜성에 주둔하면서 명군 장수 유정과의 교섭에 참여했다. 그러나 교섭을 촉진하기 위해 스스로 명군 진영에 들어갔다가 북경까지 끌려간 후 처형되었다. 임진왜란 후 1599년 조선에 국교 재개를 위해 온 또 다른 인물인 제칠태부(梯七太夫)가 요시라라는 설이 있으나 그는 요시라가 아닌 별도의 인물로 생각된다.

가계

활동 사항

요시라는 임진왜란 이전에도 조선으로부터 관직을 받는 등 조선과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발발 후 조선에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는 것은 강화교섭이 한창 진행 중이던 1594년 후반부터였다. 당시 일본군은 경상남도 해안 지역에 성을 짓고 주둔하고 있었으며, 조선군은 그와 가까운 내륙 지역에 포진하고 있었다. 소서행장과 종의지의 휘하에 속했던 요시라는 경상우도병마절도사김응서의 진영과 자주 접촉하였다(『선조실록』 28년 7월 8일). 그가 맡은 역할은 명과 일본 사이에서 진행되던 강화교섭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던 조선을 협박과 회유로 설득하는 일이었다(『선조실록』 29년 1월 23일).

1596년 중반 명나라에서 보낸 책봉사가 일본으로 건너갈 채비를 갖추자, 요시라의 주 임무는 조선을 설득하여 통신사를 차출하게 하는 일이 되었다(『선조실록』 29년 6월 21일). 조선은 책봉사의 접반사로서 부산의 일본군 진영에 머물던 황신(黃愼)을 통신사정사에 임명하여 일본에 보냈다. 이미 부산에서 황신과 여러 차례 대면했던 요시라는 일본을 오가는 동안 황신에게 여러 정보를 전했다. 조선은 요시라의 정보가 허위가 아니었다는 것을 잘 알았으며, 요시라에게 첨지(僉知) 관직을 내려주어 정보원을 유지하고자 했다.

풍신수길(豊臣秀吉)은 강화조건에 만족하지 않고 재침을 선언하였다. 요시라는 귀환하던 통신사에게 풍신수길이 일본 국내에서 인심을 많이 잃었고 일본이 군대를 보내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니 교섭을 이어나가면서 시간을 끌다 보면 스스로 망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비밀리에 전했다(『선조실록』 29년 12월 21일). 이듬해 1월에는 소서행장의 명령을 받아 김응서에게 가등청정(加藤淸正)의 도해 위치와 시일을 알려주면서 조선으로 하여금 가등청정을 요격할 것을 부추기기도 하였다. 이를 반간계로 파악하기도 한다(『선조실록』 30년 1월 19일). 이 사건은 요격 명령에 응하지 않은 이순신(李舜臣)의 파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후로도 요시라는 김응서의 진영을 왕래하며 가등청정의 진영을 방화하고 일본군을 꾀어내려는 계책을 세우거나, 재침에 대한 정보를 전하였다. 요시라는 김응서에게 풍신수길이 최종적으로 재침을 결정하였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일본군의 작전과 대응책 등을 알려주었다(『선조실록』 30년 6월 14일).

정유재란 발발 후 소서행장 등은 강화교섭을 재개하기 위해 요시라를 조선에 보냈다(『선조실록』 31년 5월 7일). 요시라는 대치하고 있던 명군에 구류되었고 한양으로 압송되어 명군의 심문을 받게 되었다. 요시라는 자신의 목적이 강화이며, 강화의 상대는 조선임을 밝혔다(『선조실록』 31년 6월 3일). 요시라는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 채 한양에 갇힌 신세가 되었으며 다시 일본군 진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북경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명군에 의해 일본군 장수로 포장되어 처형되었다(『선조실록』 33년 1월 29일)(『선조실록』 33년 8월 24일).

전쟁이 끝난 후에도 대마도 사람들을 비롯한 일본인들은 요시라의 거처를 묻고 그를 돌려보내지 않는 것을 비난했다. 후일 사명대사유정이 일본을 방문하여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을 송환하려 할 때 일본인들이 요시라에 대한 일을 이야기하며 원망하였다고 한다.

참고문헌

  • 『일본왕환일기(日本往還日記)』
  • 『난중잡록(亂中雜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久芳崇, 『東アジアの兵器革命―十六世紀中國に渡った日本の鐵砲』, 吉川弘文館, 2010.
  • 김경태, 「임진왜란 직후, 대일강화정책의 성격연구」, 『한국사연구』138, 한국사연구회, 2007.
  • 홍성덕, 「정유왜란 이후 명·일 정전협상과 조·명관계」, 『전북사학』18, 전북사학회, 1995.
  • 久芳崇, 「明朝皇帝に獻納された降倭 -『經略御倭奏議』を主要史料として」, 『山根幸夫敎授追悼記念論叢』下, 汲古書院, 2007.
  • 久芳崇, 「朝鮮の役における日本兵捕虜-明朝による連行と處置」, 『東方學』105,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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